Part9 - 이집트 문명 (고왕국: 제5~6왕조, 제1중간기: 제7~10왕조)

 

이집트 고왕국의 제3~4왕조가 강력한 왕권의 표상이었다면, 제5~6왕조는 선대 왕조의 찬란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그 그림자 속에서 발버둥 치던 시기이다. 이 시기부터는 고왕국의 시스템 체계가 서서히 붕괴하며 특히 제6왕조에 들어서면 중앙의 권위가 전면적으로 무너진다. 무너진 이유 중 선대 왕조의 무분별한 국력 낭비가 그 단초였다면, 이러한 흐름에 쐐기를 박은 것은 기원전 2,200 ~ 1,900년에 들이닥친 전 세계적인 기후 변화(건조화)이다. (4.2ka 이벤트) 이 때문에 제6왕조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맹주였던 아카드 제국도 사르곤 이후 힘을 쓰지 못하고 기원전 2,200년대 말부터는 세력이 위축된다. 그 이후 이집트의 각 노모스(지금으로 치면 '주'에 해당하는 행정구역)를 다스리는 노마르크(주지사)들이 각자 발호(跋扈) 하면서 각자도생하고 이집트는 제1중간기라 불리는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제1중간기는 제7~10왕조에 해당하고 제7~8왕조는 나름 멤피스에 '중앙'이라 부를만한 세력이 존재하나(그나마 멤피스에만 영향력을 끼치는) 제9~10왕조는 왕이라 칭할 인물이 존재했는지조차 의문인 시기로 변모한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인류사에 주기적으로 도래하는 기후변화가 인간 집단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지 기록유물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8.2ka 이벤트는 인류사의 입장에서 보면 선사시대에 벌어진 일이기에 그 영향이 어떠했는지 추정만 가능하지만(아래 토막 상식 참고), 4.2ka 이벤트부터는 기록 유물의 증거가 남아 있다. 이번 part를 통해 왕조의 내리막이 어떠했는지, 중앙 권력의 붕괴가 초래한 지방 권력의 상승이 어떤 양태를 띄었는지 여실히 확인해 볼 수 있다.

[토막 상식]
8.2ka 이벤트가 서남아시아에 끼친 영향:
이 지역은 오랜 기간 동안 지역이 건조해지는 건조화를 겪었다. 이러한 건조화 영향으로 인해 선토기 문화가(PPNB의 선토기 문화 유적지, 차탈회위크 등등) 사라지게 되고 비옥한 초승달 지역 동부의 문명이 꽃 피는 계기가 된다.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인해 작물 재배와 수확을 위한 관개 시스템의 발명이 필수적이었다.)


가축의 변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돼지를 기른 흔적은 고고학 기록에서 점점 사라지고 소의 생물량도 줄어든다. 대신 가축화된 염소와 양의 비율이 증가한다. 돼지는 습한 환경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돼지를 키울 수 없을 정도로 건조해졌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변화는 종간 물 수요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는데, 양과 염소는 소보다 물이 덜 필요하다.


유목의 증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유목 생활의 증거가 많이 나타난다. 이는 더 이상 풍족한 초원을 찾기 힘들었음을 증명하며 동시에 사람들이 가축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유 소비에 대한 첫 번째 증거가 기원전 6200년경)
출처:  https://www.iamag.co/the-prince-of-egypt-100-original-concept-art-collection/#jp-carousel-138674

<이집트 문명 연대표>

*리버풀 대학 영국의 이집트 학자 Ian haw가 2000년대에 재정립한 이집트 연대 순을 따름.

**강력한 중앙 정부가 있었던 시대는 왕국이라고 하고, 분열되거나 중앙 정부가 없었던 시대는 중간기라고 함.

 

  • 이집트 초기왕조 이전:기원전 6,000년 ~ 3,100년 (신석기시대) 
  • 이집트 초기왕조[제1~2왕조]: 기원전 3,100년 ~ 2,686년 (국가의 기반 확립)
  • 이집트 고왕국[제3~6왕조]: 기원전 2,686년 ~ 2,181년 (전제적 왕권의 등장, 이집트의 제도적 경제적 예술적 전통 정착) 
  • 이집트 제1중간기[제7~10왕조]: 기원전 2,181년 ~ 2,040년 (정치적 혼란과 해체) 
  • 이집트 중왕국[제11~12왕조]: 기원전 2,040년 ~ 1,783년 (분열된 이집트 재통일, 문화적 성장 및 주변국과 교류 확대) 
  • 이집트 제2중간기[제13~17왕조]: 기원전 1,783년 ~ 1,550년 (힉소스인의 영향력 확장과 감소) 
  • 이집트 신왕국[제18~20왕조]: 기원전 1,550년 ~ 1,069년 (이집트의 제국 시기)
  • 이집트 제3중간기[제21~25왕조]: 기원전 1,069년 ~ 664년 (리비아-이집트계 소왕국들과 도시들의 군웅할거)
  • 이집트 말기왕조[제26~31왕조]: 기원전 664년 ~ 332년 (페르시아;아케메네스제국에 의한 지배, 27 & 31왕조)
  • 알렉산드로스 제국[헬레니즘]: 기원전 332년 ~ 323년 (알렉산더의 이집트 정복)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헬레니즘]: 기원전 305년 ~ 30년 (알렉산더의 휘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 -> 이후 로마 제국의 속국)

고왕국(Old kingdom) - 기원전 2,686 ~ 2,181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208~209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172~174p}

{출처: https://www.ancient-egypt.org/history/old-kingdom/index.html}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Old_Kingdom_of_Egypt/}

{출처: Lecture 14:Dyns.5-6: Historical+ background.© Notes & images compiled by Gregory Mumford 2023}

 

피라미드의 시대 'Age of the Pyramid'라 불렸던 고왕국의 피라미드 크기로 당대의 통치자가 이용할 수 있던 국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세계 유수의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국력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한 시기에 지어지곤 한다. 하지만, 국력은 연속적이지 않고 내부 정세, 환경적 요인, 외세의 침입 등으로 쉽게 변동될 수 있는 것이기에 소위 국력을 믿고 과감한 행동을 벌이는 통치자들은 본인의 재위 기간 동안은 나라가 무사했을지 몰라도 후대에는 항상 탈이 났다. 그런 의미에서 피라미드의 시대라 불리는 고왕국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여실히 보여준다. 실제로 고왕국 기간 내 피라미드의 부피를 비교해 보면, 제4왕조 때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다가 제4왕조 후반에 급격하게 그 부피가 줄어든다. 제5왕조의 시작인 우세르카프(Userkaf)부터는 그 명맥만 유지한다. 이집트 제3~4왕조 이야기는 링크를 참조 바라며, 본격적으로 제5왕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고왕국 기간 내 피라미드 크기의 변화 = 국력과 비례

제5왕조 - 기원전 2,494 ~ 2,345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208~209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172~174p}

{출처: https://www.ancient-egypt.org/history/old-kingdom/index.html}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Old_Kingdom_of_Egypt/}

 

제4왕조 ​​말엽쯤의 이집트는 거의 파산 직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막대한 재정을 사용했던 효과가 누적되어 왕조 자체가 흔들렸다. 제5왕조는 전임자들로부터 위태로운 재정적, 정치적 상황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방탕한 장례 관행으로 인해 이집트 국민의 대다수가 왕족이라는 개념 전체에 불만을 품는 상황까지 껴안아야 했다. 반면에 기후는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강수량 감소로 가뭄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흉작으로 인해 국가의 번영과 조세 수입이 위협받게 되었고,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얽혀 왕의 절대 권력이 약해졌을 것이다. 단일 왕가에 모든 권력이 집중됐던 이전 왕조의 모델은 제5왕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제5왕조 들어서는 왕실 중심이 아닌 새로운 계층의 관리들과 권위를 공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것은 신관과 서기였다.(각 주의 주지사들은 이미 범접할 수 없는 세력) 이러한 직업을 갖고 있던 가족 집단들의 힘이 강력해졌고, 왕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자원을 통제하고 호화로운 무덤을 건설하였다.

아부시르(Abusir)에 있는 제5왕조시기 서기관 석상, 출처:  https://www.archaeology.org/issues/399-2011/features/9098-egypt-abusir-sun-kings#art_page2

제5왕조의 왕들은 큰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에 지위를 위한 경쟁을 해야 했다. 특징으로 꼽자면 제5왕조는 태양왕 왕조로 알려져 있는데,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중요도를 두지 않고(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가 아니라는 것뿐, 본인들의 무덤은 자그마한 피라미드이긴 했음) 태양신을 위한 신전만 여섯 개나 건설하기 때문이다. 이집트 왕들의 지위는 이전에는 호루스, 오시리스 같은 신들의 지위와 동급이었지만, 제5왕조 들어서는 태양신 라의 아들을 자청하며 태양신을 모셨고, 태양신 숭배를 통제하였다. (이때 오시리스에 대한 숭배는 통제가 없었기에 오시리스 숭배가 부흥한다) 또한, 각 지방의 주(노모스)들이 갖는 영향력이 커지고 지방 관직이 세습된다. 원래라면 왕이 명한 사람들이 관직을 받아야 하지만, 왕은 그런 힘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6왕조쯤 되면 지방의 주지사인 노마르크(Nomarch)는 본인의 출세를 중앙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그러한 의지의 투영은 무덤의 장소를 어디로 정했는지의 여부로 확인할 수 있는데 노마르크들은 사카라와 같은 중앙의 네크로폴리스가 아닌, 본인들이 다스리는 지방에 무덤을 조성한다. 신들의 화신인 왕과 함께 태양의 배를 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명계의 지배자인 오시리스를 향해 가는 것이다. (다른 신들과 달리 오시리스 숭배는 통제가 없었으므로)

 

<제5왕조 왕들에 대한 대략적인 서사>

 

제5왕조의 첫번 째 왕인 우세르카프(Userkaf)는 제데프레의 여러 딸 중 하나인 네페르헤텝(Neferhetepes)의 아들이며,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멘카우레의 딸인 켄트카우스(Khentkaus)와 결혼한다. 우세르카프는 사카라 북쪽의 아부시르(Abusir)에 태양 신전을 건설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태양 신전은 3~4단계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이 화강암 오벨리스크를(긴 샤프트 꼭대기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얹은 모양) 세워 네페리르카레(Neferirkare) 통치 기간에 완료되었다.

 

이 신전은 태양신인 라(Ra)에게 헌정되었으며 왕의 권위를 태양신의 패권과 연결시켰다. 이는 위대한 제4왕조의 혈통과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한 조처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태양신 라(Ra)와 관계 설정을 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그나마 주장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제5왕조의 모든 왕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권력을 라(Ra, Rah, Ré)와 연결하는 왕명을 따서 태양신과의 특별한 관계를 입증했다. 그래서 제5왕조 왕들의 이름 끝에는 대부분 Re가 붙어 있다.

 

제1왕조의 순장 관을 제2왕조에서 멈췄듯이, 제4왕조의 거대한 피라미드 건설은 제5왕조가 시작될 무렵 그것이 왕의 능력을 넘어서버렸다는 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왕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릴 수는 없기에 자그마한 피라미드로 대체)

[토막 상식]
아부시르(Abusir): 사카라 북단에 위치한 아부시르는 대부분 제5왕조 피라미드가 밀집해 있는 영역이지만, 그 밖에도 비왕족 엘리트의 유해가 묻힌 마스타바와 수백 개의 다른 장례식 기념물이 밀집되어 있다. 새로운 엘리트 그룹에는 사제와 서기관이 포함되어 있다.
아부시르의 피라미드 위치
아부시르의 피라미드 상상도
아부시르의 피라미드 상상도2
우세르카프의 두상
우세르카프의 태양신 신전

우세르카프의 사후 그의 아들인 사후레(Sahure)가 왕위를 이어 받는다. 그는 푼트 땅(홍해에 가까운 수단 동쪽 지역)에 대한 최초의 원정대를 조직하고 무역 협정을 맺었다. 푼트는 귀중한 자원의(금, 상아, 표범 가죽, 기린 꼬리, 개코원숭이, 호박금, 향료, 흑단, 고무나무 수액) 원천이 되었다.

 

사후레는 아부시르(Abusir)에 자신만의 태양 신전을 또 지었고 그 이후로 이집트 전역의 기둥에 대한 표준이 될 손바닥 모양 기둥(상단이 종려나무 잎 모양인 잘 알려진 기둥)을 건축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사후레의 군사 원정과 자원에 대한 신중한 소비는 국가를 풍요롭게 했다.

사후레의 피라미드와 그의 아부시르 태양 신전 (우측의 두 기둥이 종려나무 모양 기둥)

사후레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 네페리르카레 카카이(Neferirkare Kakai)가 계승했다. 비문에 따르면 그는 훌륭한 왕이었고 존경을 받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관료와 신권의 권력이 더욱 강력해졌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해졌다는 것 외에는 그의 통치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네페리르카레의 사후 셰프세카레(Shepseskare) 왕이 그를 계승했지만 그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셰프세스카레는 그의 다음 왕인 네페레프레와 니우세레 사이의 통치자라는 의견도 있음)

 

네페리르카레와 켄트카우스 2세(Khentkaus ll) 사이의 아들인 네페레프레(Neferefre)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이 얼마 안 되어 아마도 20세쯤에 사망했다.

 

네페리르카레와 켄트카우스 2세(Khentkaus ll) 사이의 둘째 아들인 니우세레(Nyussere)가 형의 뒤를 이었으며, 니우세레는 우세르카프의 태양 신전의 북쪽에 1km 떨어진 곳에 또 다른 태양 신전을 건설한다. 이곳은 음식부터 가구까지 대규모의 공물을 보관할 수 있는 거대한 저장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렇게 제물들이 태양 신전으로 흘러들어간 뒤 제단에 성공적으로 바쳐진 후에는 다양한 직급의 관리들에게 현물 지급금으로 사용되었다.

니우세레의 태양 신전
우세르카프 태양 신전의 북쪽에 위치함

이집트의 주요 보직에 왕실 가족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점점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를 통해 이집트의 고위, 중, 하급 관료들은 유례없는 수준의 권한과 수입을 얻게 된다. 그 증거로써 니우세레의 통치 때 묻힌 한 관료의 무덤을 들 수 있다. 그곳에는 조각된 큰 부조에는 적어도 1,800명의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사제뿐만 아니라 농부, 사냥꾼, 기타 일반 사람들도 일상생활을 하며 관료의 가족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새겨 놓았다. 또 다른 고위 관료의 무덤에는 오시리스를 죽음의 왕으로 찬양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으며, 아부시르에 있는 그의 장례용 기념물은 왕족의 무덤보다 더 화려했고 사후레(Sahure)와 니우세레(Nyussere)의 피라미드 앞에 당당하게 솟아올랐다. 이집트의 미라화된 시체는 제5왕조의 엘리트 계층 무덤에서 서서히 발견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무덤은 니우세레의 통치 기간 동안 가속화된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해준다. 이 기간 동안 아부시르에서 발견된 호화스러운 비왕실 무덤과 가족무덤의 출현은 새로운 권력 네트워크(족벌주의적 네트워크)가 왕권과 경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토막 상식]
미라화의 역사
- 나카다 2기: 히에라콘폴리스의 한 매장지에 내부 장기를 린넨으로 감아 흉부에 다시 넣어놓은 형태의 시신이 발견됨
- 제3왕조: 린넨으로 몸을 둘러싼 초기 형태의 미라 발견됨
- 제4왕조: 헤테페레스(Hetepheres) 여왕, 메레산크 3세(Meresankh lll) 여왕의 무덤에는 장기를 따로 보관한 카노푸스 단지(Canopic jars - 적출한 장기를 보관하기 위해 사용한 단지)가 발견됨. 메이둠에서 발견된 무덤의(Tomb 9) 시신은 뇌를 따로 보관하지는 않았지만, 내부 장기를 적출하고 린넨으로 몸을 감쌌으며, 린넨의 표면에는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였다. (눈과 눈썹은 녹색, 입은 적갈색으로)
- 제5~6왕조: 방해석으로 만든 카노푸스 단지가 왕실 무덤, 엘리트 무덤에서 발견되며 카노푸스 단지를 보관하기 위한 상자는 방해석 혹은 나무로 만들어짐. 가족무덤에서 발견된 미라의 경우 장기는 적출되지 않았지만, 각 팔다리와 손가락이 개별적으로 린넨에 쌓였으며, 여성의 몸인 경우 유방과 유두를 린넨으로 표현해 줌, 린넨 드레스를 입히고 겉에는 석고로 다시 쌓아서 마무리
- 이후 미라 제작 방식은 조금 더 발전하게 됨 --> 미라 제작 동영상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OZvRIKM_1AI
제3왕조 때 발견된 린넨으로 쌓인 초기 형태의 미라
카노푸스 단지와 상자

 

제5왕조 때 발견된 미라
이집트 엘리트 관료들의 무덤

멘카우호르(Menkauhor)가 니우세레를 계승했지만, 그가 태양 신전을 지은 마지막 왕이라는 것 외에는 그의 통치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멘카우호르 이후 제드카레(Djedkare)가 왕위를 이어 받는다. 제드카레는 멘카우호르의 친척쯤으로 간주된다. 제드카레는 위기감을 느꼈다.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흥세력(사제, 서기 등 엘리트 관료들)이 커가는 것이 보기 불편했다. 그렇기에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안정적인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관료제와 사제직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제트카레는 태양 신전을 짓는 전통적인 관행을 거부하고 신전 유지에 필요한 사제 수를 줄였다. 나라의 부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사제들이 문제라고 판단했기에 제드카레는 지방에 나가 있는 정부 관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분권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또한, 제4왕조 때 불어나버린 대규모 관료제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수행되었다. 논리적으로는 그 생각이 타당했을지라도 이 정책은 사실상 유명무실이 돼버린다.

 

지역 사제들은 이미 정부 행정관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만큼 영향력이 커져 있던 상태라, 본인들이 부리는 지방 관료들의 힘이 세지는 것은 사제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는 역효과가 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제의 권력을 축소하려는 왕의 노력은 무산된다.

 

제드카레 때부터 태양신 숭배는 그 인기가 사그라들고 오시리스 숭배가 발전한다. 제드카레의 무덤은 아부시르가 아닌 사카라에 조성된다.

 

그다음 왕은 우나스(Unas)이지만 전임자인 제드카레와의 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우나스는 제5왕조 중 태양신 라(Ra)와 이름을 연결 짓지 않은 유일한 왕이다. 이를 통해 오시리스가 태양신을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사카라에 있는 우나스의 피라미드는 고왕국 시대에 건설된 것 중 가장 작은 피라미드였지만, 소박한 피라미드 내부에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될 혁신이 있었다. 우나스는 자신의 묘실에 색을 칠하고 피라미드 텍스트(왕이 죽고 난 후 사후 세계로의 여행이 안전하도록 명운을 빌어주는 비문)로 알려지게 된 비문으로 표시한 최초의 이집트 왕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문에는 우나스 왕이 라(Ra) 및 오시리스(Osiris)와 관계있음을 보여주며, 오시리스 숭배에 대한 내용이 주요하다. 또한, 이집트인의 내세관 & 왕에 대한 축복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우나스는 왕의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다. 우나스가 시작한 피라미드 텍스트는 이후 몇 백 년 동안 왕실 무덤을 넘어 이집트 전역의 관리들의 관에 새겨진다.

 

제5왕조 후반에는 다수의 비왕족 가문이 멤피스의 중앙 권력을 장악함에 따라 이집트 전역에 존재했던 지방 총독 제도(노마르크)도 중요성이 커졌다. 이러한 총독직은 초기 왕들의 통치 기간 동안은 명목적인 자리였고 큰 힘을 쓰지 못했지만, 제5왕조부터 노마르크들은 멤피스가 아닌 실제로 지정된 지역에서 살면서 구역들을 통치하면서 힘이 커졌다.

 

노마르크(총독)의 자율성이 높아지면서 제6왕조 말기 이후 정치적, 기후적 불안정이 증가하면서 고왕국이 몰락하고 학자들에 따르면 제1중간기라고 알려진 정치적 분열 기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질서 시대의 씨앗은 제5왕조에 심어졌다. 모든 문명은 가치, 상징, 의사소통 체계가 사라지면 해체된다. 그러나 이 붕괴가 반드시 종말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1중간기 이후 이집트의 왕들이 다시 한번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강화했을 때, 왕족이 아닌 가문들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오시리스는 모든 이집트인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지하세계의 신으로 계속 통치했다.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 있지만, 제5왕조 동안 시작된 근본적인 사회적, 종교적 변화는 오랫동안 이집트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우나스가 부인(케누트Khenut, 넵티Nebti)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후계자가 없던 우나스로 인해 제5왕조는 대가 끊긴다.

우나스 피라미드
우나스의 무덤 내부와 벽면에 세겨진 피라미드 텍스트
[토막 상식]
이집트 제5왕조
  • 우세르카프 (Userkaf)
  • 사후레 (Sahure)
  •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Neferirkare Kakai)
  • 셰프세카레 (Shepseskare)
  • 네페레프레 (Neferefre)
  • 니우세레 (Nyuserre)
  • 멘카우호르 (Menkauhor)
  • 제드카레 (Djedkare)
  • 우나스 (Unas)


출처: http://www.narmer.pl/dyn/05en.htm

제6왕조 - 기원전 2,345 ~ 2,181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208~209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172~174p}

{출처: https://www.ancient-egypt.org/history/old-kingdom/index.html}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Old_Kingdom_of_Egypt/}

{출처: Lecture 14:Dyns.5-6: Historical+ background.© Notes & images compiled by Gregory Mumford 2023}

 

제6왕조는 날로 취약해져가는 제5왕조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좋다. 제5왕조 시대에 분산된 권력으로 인해 노마르크(주지사)와 지방 귀족들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강력해졌다. 많은 지역의 직책이 세습되었으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력과 재산을 물려주었다. 지역의 통치자들은 약해진 중앙 권력에 따라 본인만의 작은 왕국처럼 주변지역을 통제했으며 중앙인 멤피스의 명령이 하달되더라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앙 권력의 본산인 멤피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아직은 이집트가 평화롭게 남아 있고 적은 세금이나마 왕실 금고로 들어가고 있으니 이집트 왕실은 이러한 상황에 거의 체념했다. 하지만, 국경에서는 점점 약해진 국력을 노리고 주변 민족의 침입이 잦아졌다. 때문에, 무역로를 보호할 군대와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 인력 충원을 위해 이집트 정부는 누비아에서 용병(고용 군인)을 모집한다.(관련된 내용은 하이퍼링크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리비아가 있는 서부 사막에서 이집트 방면으로 반복적인 침입이 존재했다.

 

<제6왕조 왕들에 대한 대략적인 서사>

 

제6왕조의 첫 번째 왕인 테티(Teti)는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우나스(Unas)이 딸인 이푸트(Iput I) 공주와 결혼하여 정통성을 이어나간다. 이들 사이에서 후대의 왕인 우세르카레(Userkare)와 페피 1세(Pepi I)가 나온다. 테티는 몰락하는 왕조의 상황을 정리하고자 했고 지방 권력의 강화를 막기 위한 움직임을 펼쳤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위 관리들이 왕의 화려함에 필적할 만한 무덤을 짓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집트 귀족의 부는 계속해서 증가했고 그에 따라 영향력과 명성도 높아졌다. 권력 자원이 몰리는 곳에는 권력이 생긴다. 중앙 권력이 부재하고 지방 세력이 떠오르는 것은 역사의 아주 흔한 패턴이다. 그 밖의 업적으로는 부바스티스 지역에 카(Ka)를 숭배하는 사원을 세웠고, 아비도스에 있는 사원은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테티는 마네토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경호원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우세르카레(Userkare)가 그 살해의 배후에 있다고 추정된다. 아버지의 살해를 뒤에서 조종하는 아들의 모습 또한 인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도 그렇게 즉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권력은 그 정점으로 다가갈수록 인간성과 도덕성을 무뎌지게 만든다)

 

테티의 무덤은 사카라 북동쪽에 위치하며 우나스가 했던 것처럼 본인의 무덤 안에도 피라미드 텍스트를 새겨 넣는다.

테티의 동상
테티의 피라미드

테티의 암살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우세르카레(Userkare)는 그가 남긴 흔적이 후대에 인위적으로 지워지지 않았기에 나름 정통성을 인정받았다고 보여진다. 우세르카레의 통치가 어떠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기록에는 그가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착수했다고 적혀 있으나 그 건축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우세르카레의 피라미드도 발견되지 않음)

 

만약 우세르카레가 실제로 테티를 살해한 세력에 속해 있었고, 테티의 아들인 페피 1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관계를 따져봤을 때 적어도 우세르카레의 쿠데타는 롱런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테티의 또 다른 아들 중 하나인 페피 1세(Pepi I)는 우세르카레의 뒤를 잇는다. 그는 아비도스 출신의(쿠이Khui 가문) 두 자매와 결혼한다. 이는 강력한 쿠이 가문 사람을 왕실에 편입시켜 쿠이 가문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작전이었거나 아니면 반대로 쇠퇴하는 왕실을 강력한 쿠이 가문 일족과 제휴시키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제6왕조 말기에 아비도스는 더욱 독립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페피는 쿠이 가문의 왕비를 맞이하는데 그중 한 명은 안케네스페피 1세(Ankhenespepi I)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그녀와 자매 관계인 안케네스페피 2세(Ankhenespepi II)이다. 안케네스페피 1세 사이에 낳은 아들이 메렌레 1세이다. 안케네스페피 1세와 자매 관계인 안케네스페피 2세 페피 1세와도 결혼하지만, 훗날 조카인 메렌레 1세와도 결혼한다. (막장이다)

 

페피1세는 중앙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Bubastis, Abydos, Elephantine 및 Dendara) 건축물과 기념물을 짓는다. 페피 1세의 곁에는 유능한 신하인 웨니(Weni)가 있었다. 페피 1세에 이르러 그는 판사, 장군, 고관(Vizier)를 역임했다. 그는 뛰어난 전술로 지금의 시나이반도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유목민과 여러 번 전투를 벌였으며, 군대 개혁을 단행한다. 그의 노력 덕분에 페피 1세는 국제적인 영향력을 키웠고 그때 당시의 에블라(Ebla)와 비블로스(Byblos)에서 생산된 유물들이 이집트에서 발견된다. 페피 1세의 피라미드는 사카라 남쪽 지역에 위치한다.

페피 1세의 동상
페피 1세의 피라미드

페피 1세의 아들은 메렌레 1세는(Merenre I) 재위 5년 차에 누비아의 지도자들로부터 공물을 받기 위해 이집트 남부 제1급류로(아스완) 원정을 떠난다. 근처의 지방인 엘레판티네(Elephantine)의 주지사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누비아에 대한 여러 군사 작전을 이끈다. 메렌레의 이름은 와디 함마마트(Wadi Hammamat)와 하트누브(Hatnub)의 채석장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이 두 지역에서 지속적인 채굴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본인의 피라미드를 짓기 위함) 메렌레 1세와 안케네스페피 2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페피 2세이다.

 

사카라 남부의 메렌레 1세 피라미드는 미완성으로 끝난다. 피라미드 내부에서는 1구의 미라가 발견되는데 실제로 메렌레 1세의 미라라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왕실 미라이다. (후대에 귀족이나 민간인이 미라 바꿔치기를 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음)

메렌레 1세로 추정되는 미라

메렌레 1세의 아들인 페피 2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에 그의 어머니인 안케네스페피 2세가 섭정을 맡는다. 토리노 연대기(Turin King list)에 따르면 페피 2세는 90년 넘게 통치했다고 적혀 있으면 그게 사실이면 이집트에서 가장 오랜 재위 기간을 누린 왕이 된다. 페피 2세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 중앙 정부의 점진적인 쇠퇴는 가속화된다. 왕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시행했던 그의 전임자들의 정책은 실패하였고, 이는 페피 2세가 죽은 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원인에 대해서 무능력한 페피 2세의 오랜 통치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 서남아시아의 기후는 더 이상 이집트에 축복을 내려주지 못했으며(나일강의 수위가 줄어들면서 농작물의 수확량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고, 이집트 경제의 중추인 농업이 쇠퇴한다. 경제를 바로 잡지 못한 위정자의 결말은 대부분 뻔하다), 늙고 힘없는 왕은 중앙 정부를 스스로 통치할 수 없었다. 중앙 권력의 공백은 지방 총독과 주지사의 권력을 증가시켰다. 이에 대한 방증으로 페피 2세의 피라미드와 주변 기념물은 그의 전임자들보다 훨씬 열악한 방식으로 건축되고 장식되었다.

 

페피 2세의 정책에도 문제가 있었다. 떨어지는 인기를 올리고자 신전에 세금 감면 정책을 펼쳤지만, 결국 왕실의 수입만 줄이는 꼴이 돼버린다. 비블로스와의 무역 관계는 나름 지속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 외국과의 무역 관계도 많이 단절된다. 페피 2세가 워낙 장수하였기에 그의 아들인 메렌레 2세(Merenre II)가 즉위했을 때 이미 백발에 노인이었다. 메렌레 2세는 1~3년 남짓 짧은 재위 기간을 보내다가 죽게 되고 그렇게 제6왕조는 막을 내린다. 메렌레 2세 이후 네예르카레(Netjerkare)라는 왕이 즉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유물이나 피라미드가 발견된 것은 없다.

아들(페피 2세)을 무릎에 앉힌 안케네스페피 2세
[토막 상식]
이집트 제6왕조
  • 테티 (Teti)
  • 우세르카레 (Userkare)
  • 페피 1세 (Pepi I)
  • 메렌레 1세 (Merenre I)
  • 페피 2세 (Pepi II)
  • 메렌레 2세 (Merenre II)
  • 네예르카레 시타(Netjerkare Siptah) --> 불분명


출처: http://www.narmer.pl/dyn/06en.htm

제1중간기 [제7~10왕조] - 기원전 2,181 ~ 2,040년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2세가 제10왕조의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점령한 시기를 제1중간기의 끝으로 본다. (=제11왕조의 시작이 중왕국의 시작은 아님, 중왕국의 시작은 제11왕조 멘투호테프 2세 시절부터임)

스핑크스 주변의 모래폭풍 (요한 야곱 프레이)

이 시기에 이집트는 4.2ka 이벤트의 영향을 받았고, 충분한 습기를 머금은 몬순이 나일강을 적셔야 했지만 건조한 바람과 함께 여름&겨울 상관없이 부족한 강우량에 시달리게 된다. 나일강이 너무 얕아져 사람이 쉽게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메마르고(일부 지역) 식량 생산이 감소하게 되었으며 고대 문헌에 따르면 뜨거운 바람이 남쪽에서 몇 주 간 지속되어 불어오는 날도 있었다고 한다. 농업의 성공을 보장해야 했던 이집트의 왕은 그 권위를 잃어버렸고, 중앙 권력의 빈자리는 각 지방의 귀족 혹은 노마르크(주지사)의 영향력으로 채워진다. 왕이 힘쓰지 못하는 이런 시기에 지역의 유지들은 정부를 대신해 침략자를 격퇴하고,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의 분배를 관리하고, 물 절약을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그렇게 이집트는 강력한 실권자들의 통치하에 수많은 작은 세력들이 난립하는 상태로 쪼개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간에 들어섰던 왕조는 큰 의미가 없다. 고왕국 말기에 근근이 지어졌던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피라미드도 제1중간기에는 더 이상 건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를 위임하고 비용을 지불할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었고 상당한 노동력을 조직할 관료제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왕권이 붕괴되었다고 서민들의 삶까지 같이 붕괴된 것은 아니다.

 

제1중간기 동안 중앙 권력의 상실은 사회 질서의 붕괴로 이어졌어야 했지만, 이집트 사회는 여전히 계층 구조를 유지하고 지방의 주지사인 노마르크가 사회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고왕국 말기에 들어서는 사회적으로 매우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개인 무덤을 소유할 수 있었는데, 그전까지는 특권층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됐던 것이 지역의 장인을 고용한 일반인들에게까지 그 기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물론 고급 재료를 쓸 수는 없어서 진흙 벽돌로 만들어진 이 무덤의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그와 관련된 석조 장례식 비석 중 많은 부분이 살아 남았다. 일부 비석에는 자신이 살았던 지역을 자랑스러워하고, 지역의 노마르크의 업적에 대한 짧은 전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제1중간기가 이집트에 재앙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지 상류층의 관점과 초기왕조부터 고왕국까지의 이집트 정부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간의 이집트 역사가 왕과 그의 업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서기가 그런 것을 기록하니), 중앙 권력의 붕괴 덕분에 지방 분권의 시대가 찾아왔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이다. 왕의 눈치를 보던 주지사나 관리들은 좀 더 개방적으로 변하여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초점은 더 이상 왕에게 있지 않고 지역 행정관과 그의 지역 주민들의 삶과 안녕에 맞춰졌다.

 

<제7~10왕조에 대한 대략적인 서사>

 

제7~8왕조는 멤피스에 근거를 두었고 그 지역을 통치했지만 그 지역 밖으로 벗어나서는 통제권이 거의 없었다. 그 외의 이집트 다양한 지역은 기본적으로 자치였다. 마네토의 기록에 의하면 제7왕조는 70명의 왕으로 구성되어 70일 동안 다스렸다고 쓰여 있으나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아마도 이는 제사장, 서기관, 고위 관료, 왕자 등 국가의 엘리트 70명이 모여 70명의 통치자로 구성된 의회를 구성하고 나라를 통치했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다. 보편적으로 제7~8왕조는 약 21~35년간 지속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2,181~2,160년) 나일강 삼각주는 베두인족의 잦은 침입으로 골머리를 썩는다. 힘이 약한 중앙정부는 각 지역 노마르크(주지사)의 지원에 의존했으며, 그들에게 전례 없는 특권을 주거나 결혼을 통해 관계를 다졌다. 이 시기의 왕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역사적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고왕국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피라미드와 마스타바 건설을 통해 이집트의 역사를 돌 속에 보존할 수 있었으나, 제1중간기 시기에는 그러한 활동이 전무했다. 제8왕조의 마지막 시기에는 유력 가문인 이나시아(Ihnasya) 가문이 이집트 국정을 좌지우지한다. 이나시아 가문의 케티 1세(Khety I)는 그들의 주력 무대였던 헤라클레오폴리스(Herakleopolis)로 수도를 옮기며 제9왕조를 연다. (삼각주 지역은 베두인족의 공격에 많이 시달려 손쓰기 어려운 상황)

 

그렇게 제9~10왕조는 이전 왕조와 달리 파이윰 호수 남쪽에 위치한 헤라클레오폴리스(Herakleopolis)에 자리를 잡는다. (기원전 2,160~2,040년) 하지만, 수도를 헤라클레오폴리스로 옮기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은 왕권 강화 측면에서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나시아 가문의 제9왕조와 제10왕조 통치자들은(밝혀진 이름과 통치 기간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정리가 불가) 스스로를 이집트의 진정한 왕이라고 선언했지만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이들 세력은 하이집트의 삼각주 일부와 헤라클레오폴리스가 있는 중부 이집트 일부를 통치했다. 업적으로는 주변 민족의 지속적 침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벌여 일시적인 평화를 얻어냈고, 삼각주에서 베두인족을 몰아냈고(일시적으로), 동부 국경을 강화하고, 관개 시스템을 개선하였다. (나일강의 수량이 풍부할 때는 관개 시스템이 필요 없었지만, 나일강의 수량이 적어지면서 고왕국 말기부터 관개 시스템을 도입함)

멤피스와 헤라클레오폴리스 위치

이나시아의 제10왕조가 헤라클레오폴리스에 자리 잡은 시기를 대략 기원전 2,100년으로 보는데, 그보다 34년 전인 기원전 2,134년경 옛 나카다 지역 근처인 테베(Thebes)에는 이나시아 가문에 대항하는 세력이 등장한다.(그래서 제10왕조와 제11왕조는 거의 동시대에 존재한 왕조다) 테베 지역의 노마르크 후손인 인테프 2세(Intef II)는 헤라클레오폴리스의 권위에 도전하여 아비도스를 점령한다. 이후, 인테프의 후손들은 테베에서 권력과 부를 쌓으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이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기반을 확보했다. 쌓아놓은 기반을 활용해 끊임없이 하이집트를 노린 테베는(초기왕조의 나르메르처럼 상이집트가 하이집트에 대한 정복을 꾀함) 티니스마저 함락시킨다.

 

테베에는 걸출한 왕인 멘투호테프 2세(Mentuhotep II)가 즉위를 하게 되는데, 그는 아슈트(Asyut)를 넘어 헤라클레오폴리스 근처의 도시까지 점령한다. 최종적으로는 헬라클레오폴리스까지 손에 넣게 된 멘투호테프 2세는 이집트의 중왕국을 열게 되고 테베는 중왕국의 수도가 된다. (이집트는 중왕국부터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제작된다)

 

마무리

본인이 제1중간기 당시 이집트에 살던 민중이라고 상상해 보자. 자신이 살던 지역의 주지사가 왕실의 눈치만 보다가, 이제는 눈치 보지 않고 그 지역의 안녕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없는 살림이지만 지역 주민들의 힘을 모아 열심히 살아나가는 모습을 본다면 상황은 오히려 더 나아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이집트 제1중간기는 그렇게 다가온다. (외세의 침략에는 취약하지만, 이집트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있기에 논외로 치고)

 

그 어떤 지역이든 그곳에 살고 있는 집단은 일정 규모를 넘어서면 분열과 통합이 마치 시소처럼 반복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분열된 시기 내에는 집단의 통합을 위한 새싹이 자라나며(자원 확보, 영토 확장, 정치적 변화 등), 통합이 된 시기 내에는 역으로 집단 내 분열을 일으킬 요소들이 축적된다.(기후변화, 방탕한 제정 지출, 전쟁, 정치적 변화 등)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선조들이 남긴 유산과 지식들을 발판 삼아 인류는 진보해 나간다. 이집트의 분열기 이후 다시 통합기가 찾아오는데 이 시기의 역사는 기원전 2,000~1,000년기에 해당하므로 추후에 이어서 다루겠다.

 

다음 Part는 새롭게 주제를 바꿔 인더스 문명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참조한 서적>

  • 고대 문명의 이해(브라이언 M.페이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03.16.)
  •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1(수잔 와이즈 바우어, 이론과실천, 2007.10.01.)

서남아시아의 기원전 2,600 ~ 2,100년 세력 변화 지도

<기원전 2600년>

<기원전 2500년>

<기원전 2400년>

 

<기원전 2300년>

<기원전 2200년>

<기원전 21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