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은 방대한 양의 사료와 연구 결과가 입증하듯 우리들에게 지리적으로는 멀지만 심적으로는 가까운 문명이다. 하지만, 쉽게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 접근성 때문인지 오히려 그 내막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구하기도 쉽고 이름도 잘 알고 있지만 손이 잘 가지 않는 고전 문학처럼) 때문에 이번 Part에서는 이집트의 전반적인 배경지식(지리, 사회, 문화)을 먼저 논하고 다음 Part에서 초기왕조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한다.
이집트의 초기왕조 이전에 존재했던 신석기 문화와 나카다 문화(이집트 선왕조에 해당) 관련 내용은 이미 정리해 놓은 글이 있으니 아래 링크를 참조해 이해의 폭을 넓히길 바란다. 더불어, 그 아래에는 이집트 문명의 연대표와 간략한 특징을 적어 놓았으니 대략적인 얼개라고 생각하면 된다.
- 이집트 초기왕조 이전: https://blog.naver.com/gb145/223094795669
<이집트 문명 연대표>
*리버풀 대학 영국의 이집트 학자 Ian haw가 2000년대에 재정립한 이집트 연대 순을 따름.
**강력한 중앙 정부가 있었던 시대는 왕국이라고 하고, 분열되거나 중앙 정부가 없었던 시대는 중간기라고 함.
- 이집트 초기왕조 이전:기원전 6,000년 ~ 3,100년 (신석기시대)
- 이집트 초기왕조[제1~2왕조]: 기원전 3,100년 ~ 2,686년 (국가의 기반 확립)
- 이집트 고왕국[제3~6왕조]: 기원전 2,686년 ~ 2,181년 (전제적 왕권의 등장, 이집트의 제도적 경제적 예술적 전통 정착)
- 이집트 제1중간기[제7~10왕조]: 기원전 2,181년 ~ 2,040년 (정치적 혼란과 해체)
- 이집트 중왕국[제11~12왕조]: 기원전 2,040년 ~ 1,783년 (분열된 이집트 재통일, 문화적 성장 및 주변국과 교류 확대)
- 이집트 제2중간기[제13~17왕조]: 기원전 1,783년 ~ 1,550년 (힉소스인의 영향력 확장과 감소)
- 이집트 신왕국[제18~20왕조]: 기원전 1,550년 ~ 1,069년 (이집트의 제국 시기)
- 이집트 제3중간기[제21~25왕조]: 기원전 1,069년 ~ 664년 (리비아-이집트계 소왕국들과 도시들의 군웅할거)
- 이집트 말기왕조[제26~31왕조]: 기원전 664년 ~ 332년 (페르시아;아케메네스제국에 의한 지배, 27 & 31왕조)
- 알렉산드로스 제국[헬레니즘]: 기원전 332년 ~ 323년 (알렉산더의 이집트 정복)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헬레니즘]: 기원전 305년 ~ 30년 (알렉산더의 휘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 -> 이후 로마 제국의 속국)
이집트의 지리적 환경
{쑨룽지, 신세계사1, 흐름출판, 2020, 272~275p}
이집트와 다른 문명들 간의 차이를 꼽자면 인공적 관개 수로의 유무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과 달리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의 자연적 범람으로 농경을 유지했기 때문에 초기에 관개 농법이 발달하지 않았다. (몇 세기마다 찾아오는 건조한 환경 시에는 관개 농법 시도) 물론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유역에도 홍수는 존재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의 홍수는 상대적으로 갑자기 많은 양이 쏟아지는 형태기 때문에 수위 예측이 어렵다. 반면에, 나일강은 그 수위를 예측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연례적인 홍수가 일어났고 이를 통해 범람에 대한 예측이 가능했다.
나일강은 현재의 에티오피아 고지대와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에서부터 시작하여 6650km를 흘러 지중해에 닿는다. 백나일(빅토리아 호수 발원)은 나일강 유량의 16% 정도를 공급하고 청나일(에티오피아고원)은 유량의 84%를 공급한다. 따라서 나일강의 범람은 전적으로 청나일강의 유량에 달려 있는데 매년 여름 에티오피아고원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비가 흘러내려서 나일강 유역에 홍수를 만든다. 이집트인들은 이 시기를 아켓(Akhet, 6월中~10월中)이라 했으며 우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우기 때 퇴적물들이 홍수가 덮은 땅 위에 가라앉고 물이 어느 정도 빠지게 되면 농부들은 진흙 위에 파종을 실시한다. (페레트 Peret = 파종시기, 10월中~2월中) 토양에 물이 충분하기에 곡식들은 늦여름과 가을에 물공급 없이 자랄 수 있다. 추수기인 쉐무(Shemu, 2월中~6월中)에 추수를 하고 나면 땅은 강렬한 태양빛에 의해 마르고 갈라지는데 이 흙 속으로 공기가 들어가 토질의 염류화를 막는다. 그리고 다시 아켓이 돌아와 토양은 건강한 상태로 새로운 작물을 심을 준비를 한다. 이 때문에 이집트 문명의 작물 생산성은 다른 문명들보다 높은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된다. 이집트인들에게 매번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나일강이 소중한 만큼 이들은 나일강을 잘 예측할 수 있어야 했고 그 때문에 주기에 민감했다.
대부분의 문명이 밤하늘의 달을 기준으로 한 음력을 사용하였으나, 음력을 사용하면 해마다 쌓이는 오차로 인해(11일) 결국엔 계절이 맞지 않게 되어 이집트는 태양력을 사용했다. 달의 주기는 29.53일이지만 30일로 치부하고 12개의 주기를 설정했으며 남는 5일은 주요 신의 생일로 삼았다. 이집트는 태양의 나라이고 그들의 왕은 태양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달의 신은 그 영향력이 줄어든다.
이집트로 들어서는 입구는 셈족들의 달의 신 '신Sin'의 땅이라는 뜻의 시나이(Sinai) 반도이다. 반대로 유목민인 셈족은 달의 신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달의 주기에 따라 살아갔다. (그러기에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는 달을 포함한 것이 많다)
[토막 상식] 달 주기와 태양 주기의 차이: 달이 순수하게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데 필요한 기간은 27.32일이다.(항성월) 하지만 지구도 태양 주위를 공전하기 때문에 보름달이 지고 다시 보름달이 되는데 걸리는 기간은 29.53일이다. (삭망월)
삭망월을 기준으로 12달이 지나면 29.53 X 12 = 354일이라서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1년의 기간인(태양력) 365.24일보다 11일 모자라게 된다. 이러한 삭망월을 기준으로 하는 음력은 그대로 쓰면 1년에 약 11일씩 3년에 약 한 달, 9년이면 한 계절이 어긋나서 달력으로는 봄이지만 실제 계절은 아직 겨울인 경우가 생긴다. 예로부터 이러한 일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략 3년에 한 번 윤달을 끼워서 음력 날짜와 계절이 잘 맞도록 조정을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쓰고 있는 태음태양력이다. |
이집트는 강수량이 1년에 0~100mm 정도이며, 평균 기온은 삼각주의 경우 15~20℃이고 삼각주 이남은 20~25℃ 정도 된다. 이렇게 높은 온도와 작은 강수량 때문에 나일강 유역을 제외하고 이집트는 건조한 사막 기후이다. (사막 기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https://blog.naver.com/gb145/223071689815 참조) 그러나 사막에 내리는 비들이 전부 증발되는 것은 아니다. 빗물은 모래를 침투하여 지하수 대수층에 고이게 된다. (지하수 층은 수천~수만 년에 걸쳐서 형성) 일부 지표면이 낮은 지역이(토양과 투수층이 얇은) 사막의 침식작용에 의해 지속적으로 깎여서 지하수가 있는 대수층까지 깎이게 되면 지하수가 용출되는데, 이것이 고여서 모이면 오아시스가 된다.
이집트는 총 5개의 오아시스를 갖고 있으며, 위치는 아래 그림에 표시해놨다.
- 시와(Siwa Oasis)
- 바하리야(Bahariya Oasis)
- 파라프라(Farafra Oasis)
- 카르가(Kharga Oasis)
- 다클라(Dakhleh Oasis)
이집트의 지배형태
{출처: https://www.worldhistory.biz/ancient-history.html}
나일강을 따라 촌락과 읍락들이 자리 잡았는데, 이러한 촌락이 여러 개 모여 하나의 지방행정 단위인 노모스(Nomos, 주)를 이뤘다. (노모스의 지배적 촌락의 신이 그 지방을 대표하는 신이 됨) 이집트 전역은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통상 상이집트에 22개, 하이집트에 20개의 노모스가 존재했으며, 행정구역인 노모스를 통치하는 지역의 총독은 노마르크(Nomarch, 주지사)라고 불렀다. 주지사(노마르크)의 아래에는 그를 보좌하는 하급 지방관리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도시들을 관리하는 시장 격의 관리들이 있었다. 노마르크는 초기왕조 이전에는 각 지역별 부족장이었고, 왕조 이후에는 그 부족장들의 후손이 노마르크가 된다. 노마르크는 지역의 총독, 재판관, 제사장 역할을 했고 각 마을이나 도시에는 노마르크에게 보고를 하는 장로회가 있었다.
왕 다음으로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은 고관(비지어, Vizier)이었다. 때때로 두 명의 고관이 있었는데, 하나는 상이집트, 다른 하나는 하이집트에 있었다. 고관은 왕을 대신해 주는 목소리였으며 일반적으로 군주의 친척이거나 매우 가까운 사람이었다. 고관은 정부의 관료제를 관리하고 왕의 명령에 따라 책임을 위임했다. 고왕국 시대에는 고관들이 건축 프로젝트와 기타 업무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후대로 갈수록 고관들의 경계심이 약해지고, 사제들과 노마르크의 권력이 상승하면서 중앙 정부가 쇠퇴하게 되는 계기가 됨)
이집트의 지배 형태에 비추어 보자면, 나르메르의 상&하이집트 통일은 노모스를 다스리는 노마르크들 간의 경쟁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승리한 나르메르는 이집트를 하나의 집중된 권력이 다스리는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한 기초과정을 끝낸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특이한 지형적 조건상 나일강 유역의 집단을 통일하면 외부의 위협은 자연환경이 막아주었다. 하지만, 정교한 의사전달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나일강변을 따라 퍼진 촌락과 읍락을 통합하는 과정은 초기왕조 내내 400년간 지속되었고, 신뢰할 수 있는 가족과 친척들을 노마르크로 임명함으로써 충성과 통치 네트워크를 유지한다.
초기왕조 때 이집트의 왕은 신의 명령에 따라 통치하는 신권 군주제였다. 인간과 신 사이의 중개자인 왕이 펼치는 정책들은 신의 뜻을 대표해야 했으며 (후에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함), 이스페트(혼돈)에 맞서 마아트(질서)를 지켰다. 정부의 운용 방식은 수 세기에 걸쳐 조금씩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이집트 제1왕조 시기에 설정되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뒤에 다루겠다.
사회 전체 인구의 80%는 농민과 노예가 차지했고 그 위로 장인과 전문가(중왕국 이후), 군인, 공직자, 귀족, 사제, 고관이 존재하는 피라미드 구조였다. 부유한 집안은 가장 가난한 가족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식사, 의복, 소유, 생활 방식, 즐거움 및 편의를 누렸으나 가장 가난한 이집트인들도 고대 세계의 다른 지역 농민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이점을 누렸다. (다른 고대 문명에 비해 이집트는 비옥했고 번영했기 때문)
이집트의 대략적인 지배 형태가 어떤지 살펴보았으니 각 계급별 특징을 살펴보자. 이집트 사회는 계급별 특징을 통해 자세히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지배계급
<왕실>
사회 계층 꼭대기에는 이집트의 왕이 있었다. 그들은 국가의 정신적, 물질적 안녕을 책임졌다. 이집트의 왕은 후대에 호루스 신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취급받으며 이스페트(혼돈)에 맞서 마아트(Ma'at, 이집트 사회를 이끄는 원칙이며 균형, 올바름, 질서, 정의, 진실, 조화, 선한 행동, 현상 유지를 의미)의 원칙을 지켰다. 대제사장이자 다산의 상징인 왕은 땅의 번영, 농작물의 번영, 해마다 나일강의 적당한 범람, 매일의 일출과 일몰을 책임졌다. 군사 지도자로서 그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고 적과 침략자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했다.
왕이 말한 모든 것은 법이 되었다. 이집트에서의 정의는 “왕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고, 잘못은 “왕이 미워하는 것”이었다. 왕은 모든 토지, 자원, 동물, 농작물, 사람, 모든 금, 모든 맥주 한 병, 모든 농민 오두막의 모든 진흙 벽돌 등 모든 것(실제로는 아니더라도 상징적으로)을 소유했다.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왕이 만지는 모든 것(의복, 왕관, 보석, 도구, 음식, 샌들, 맥주잔)은 왕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남겨두었다.
페르아('큰 집'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왕궁은 왕과 그의 가족, 하렘(왕의 여인들이 묵는 장소), 친구, 정부 관료들이 거주하는 복합 단지였다. 중앙 정부와 군 사령부의 소재지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주요 신전이 있었고 이외에도 상&하이집트에 많은 보조 궁전을 유지했다. 그레이트 하우스(Great House)는 사치와 화려함, 의식의 장소였다. 방문객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이나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왕이 행한 모든 일은 엄격한 의례를 따랐다. 그는 끊임없이 관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제사장, 신하, 방문객, 호의를 구하는 자) 그는 모든 것을 최고로 즐겼다. 수많은 궁정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과 관리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직원들이 왕의 비용으로 궁정에서 살았다. 이들은 죽어서도 왕의 무덤 근처에 있는 무덤에 안장되고 호화로운 부장품(린넨, 기름, 관용 목재, 석관용 돌)과 같은 특별한 호의를 받았다. 고대 왕국에서 이러한 영예는 그들이 영생에서 왕과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극히 드문 특권이었다.
[토막 상식]
초기왕조를 연 나르메르는 멤피스에 궁전을 세워 그것을 '페르-아(p r â, perâa)'라고 불렀으며 큰 집이라는 뜻이었다. 파라오(Pharaoh)는 바로 '위대한 거처'를 뜻하는 'p r â, perâa 에서 파생되었으며 신왕국 시대 이후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됨. 출처: https://blog.naver.com/leemsan/221890580025 |
권력의 정점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개인이 갖고 있는 권력은 강화가 된다. 우리로 치면 이집트의 왕실에도 비선 실세가 존재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왕의 친구(King's Friend)는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여타 다른 직위도 많았으며 이들은 일종의 내관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왕의 하사품 관리인, 왕과의 면담을 주선하는 관리인, 왕의 예복 관리인, 왕의 연고 책임자, 왕의 가발 관리인, 왕의 침실 관리인들이 있었고 각 관리인들은 그 아래에 대규모 신하들을 두어 맡은 일들을 진두지휘한다.
왕은 아들들 중에서 상속자를 선택했는데, 대개는 본처의 아들이었다. 만약 아들이 없다면 왕은 공주와 결혼한 고관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많은 왕자들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왕위를 준비했다. (왕자 책봉이 좀 이른 경우에는 군 복무나 종교 봉사 경력도 쌓았다) 그들은 천문학, 수학, 토목, 공학, 건축, 종교 의식을 수학했다.
왕자들은 자라면서 사냥, 군 관련 시합, 스포츠 대회에 참가해 쌓았던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과시하였다. 일부 왕자들은 아버지와 함께 공동 섭정(공동 왕)으로 통치했지만 공동 섭정의 정치 참여 정도는 이집트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많은 왕자들은 군대에서 견습을 받고 군사작전에 참여했다. 어린 나이에 왕위 계승자로 책봉된 왕세자는 일반적으로 자매, 이복 자매 또는 사촌과 결혼했다. 이것은 왕족의 혈통을 “순수하게” 유지하고 오시리스 신과 그의 누이 아내인 이시스 여신에게 영예를 돌리기 위함이었다.
<왕의 여자들>
왕의 어머니와 왕의 본처는 하토르 여신과 연관되어 거의 신적인 지위를 누렸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부 여성이 왕으로서 통치하거나, 미성년 친척과 함께 공동 섭정으로 통치한 기록이 있다. 왕실의 귀부인들은 왕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호화로운 장례식, 무덤, 부장품을 갖고 있었다. 공주들은 약간의 교육을 받았으며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왕실의 여성들은 대규모 영지를 관리하고 하인들의 무리를 감독했다. 특히 제국 시대에 그들은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누렸다. 그들은 값비싼 수입 향수를 뿌리고, 최고급 포도주를 마시고, 이국적인 음식을 먹었다. 그들은 거대한 가발과 보석 컬렉션을 소유했으며, 옷 방에는 각종 소재로 만든 드레스가 즐비했다.
특히 이집트 제국 시대의 왕들은 제국의 먼 지역과 외교 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많은 하인들과 함께) 외국 땅에서 데려온 수백 명의 아내들로 구성된 하렘을(왕의 여인들이 묵는 장소) 유지했다. 궁정의 유희를 위한 가수, 무용수, 연주가들은 왕실 하렘의 단골 멤버들이었다. 하렘에 속한 여인들은 왕과 결혼한 몸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왕을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씩 왕이 간택한 하렘의 여인들이 낳은 왕자가 (정부인의 아들이 없는 상황) 왕세자가 되는 경우는 존재했다.
<귀족과 사제>
수백 명의 특권 가문이 이집트 부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부는 토지 소유권을 의미한다. (고대 세계의 부 = 토지) 호루스 신의 화신인 왕은 이집트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었고 그가 마음먹으면 친척, 친구, 즐겨 찾는 사람들에게 큰 재산을 부여했다. 왕에게 하사받거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운용하는 이들 대지주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세금은 농노에게서 징수했다. 각 노모스의 대지주들은 그 지역의 부유한 “작은 왕”으로 군림했고 이집트의 정신인 마아트에(Ma'at) 따라 불우한 사람들을 돌볼 도덕적 의무가 있었지만 법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요구되지는 않았다.
사제들은 죽은 자와 이집트의 신들을 위해 매일 종교적인 의식을 거행했다. 이러한 의식은 고대의 전통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수행됐다. 죽은 자들과 신들을 위한 의식에는 진귀한 음식과 음료, 동물(제물)이 포함되었다. 모든 신전의 중요한 의식 중 하나는 신이나 여신의 동상을 매일 닦고, 공양하고, 옷을 입히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사제들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역사를 기록하고, 죽은 자를 돌보고, 장례식을 주재하는 일도 하였다. 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고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이 시대의 신전은 지금의 종교시설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종교+공무를 보던 시설로 생각하는 편이 이해에 도움 될 것이다. 정부의 지원으로 규모가 작은 신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전은 곡물창고, 도서관, 복지센터, 학교를 운용하면서 정부가 해야 하는 일부 공공업무를 대신했다. (중세시대의 가톨릭 교회가 했던 역할과 비슷) 신전에는 또한 장인, 공예가, 서기, 정육점, 제빵사, 목동, 요리사, 경비원, 문지기, 관리인 등의 직원들이 고용되었다.
주요 신들을 모시는 대규모 신전에서는 사제들이 막대한 부를 장악했다. 예를 들어 제20왕조 람세스 2세의 치하에서는 그 번영이 절정에 달했고 테베의 아문레(Amun-Re) 신전은 65개 마을과 도시로부터 성금을 받으며 신전의 사제들은 90,000명의 농노, 수백만 평의 농지, 500,000마리의 소, 400개의 과수원, 80척의 선박, 50개의 작업장을 관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제들은 지역 신이나 여신을 모시는 작은 신전에서 일하는 시간제 근로자였다. 이집트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계층인 제사장은 의사이기도 했고, 장의사 역할도 했으며, 방부 처리공, 천문학자, 수학자, 건축가,
사서, 교사, 서기였다. 사제들은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의식적으로 순수해야 했다. 때문에, 머리와 몸을 면도하고 나트론(건조 광물)으로 입을 닦는 등의 의식적 관행을 지켜야 했다. 의식을 수행하는 동안 사제들은 표범 가죽, 가면, 관직의 지팡이, 정교한 보석을 착용했다.
여성은 사제가 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예외적으로 그들은 장례식 중 전문적인 애도자가 되어 오시리스의 죽음에 대한 여신 이시스와 네프티스의 슬픔을 재현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 여사제라고 하면 보통 신전내의 매춘부나 음악 연주가를 의미했다. 다산의 신 민(Min)의 신전에서 음악가들이 시스트럼(고대 이집트의 의식용 타악기)을 흔들거나 의식과 행렬 중에 악기 연주를 한 기록이 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자에게 제물을 바치거나 무덤에서 향을 피우는 등 가족의 장례 의식을 돌보는 일도 하였다.
<고관>
고관=비지어(vizier)는 왕의 곁에 있던 최고위직 정부 관리였다. 상하이집트에 각각 한 명씩 있었으며, 지금의 대통령제로 치면 총리+각 부처 장관+대법원장 같은 역할이었다. 그는 왕의 눈과 귀였으며, 왕의 오른팔이었고, 집행자였으며, 최고 조언자였다. 고관은 개인적으로 막대한 부와 명성, 권력을 누렸지만 막중한 책임도 같이 지고 있었다. (제18왕조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의 고관 레크미레가 새벽이 되기 전에 일어나 테베의 거리를 배회하며 민심을 살폈다)
고관은 주요 문제와 결정에 관해 매일 왕과 상의했다. 그는 왕의 일정을 계획하고, 왕실 직원을 고용하고 해고했으며,
왕의 경호원을 감독했다. 국가 기록 보관소의 관리자로서 그는 정부 문서를 검사하고 승인했으며 왕실 수장고와 곡물 창고에서 영수증을 발행하고 궁중 사절과 외교관을 파견했다. 이집트의 왕실 수장고는 대표적으로 하이집트와 상이집트에 있었는데 각각 붉은 집(Red House), 하얀 집(White house)이라고 불렀다 (백악관-White house이라는 이름이 역사상 최초로 쓰인 곳은 이집트이다)
그는 법원의 대법원장 대행으로서 토지 분쟁을 판결했다. 또한, 인구 조사를 감독하였으며 몇 달에 한 번씩 전국을 순회하여 운하, 저수지, 댐을 조사했다. 나무 벌채와 조선업을 감독하고, 국경 요새의 보급이 잘되고 안전한지 확인했다. 더불어, 방어 시설을 조성하고 국경 습격에 대한 대응 조치를 명령하였으며, 고관은 서기, 배달원, 경비병 등의 직군을 감독했다.
초기 왕조의 고관은 대개 왕의 친척이었다. 직업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세습이 가능했지만, 보통의 왕들은 뇌물의 유혹을 덜 받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을 고관으로 임명했다. 일부 고관은 건축가, 의사,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토막 상식]
가장 유명한 고관 중 하나인 임호테프는 제3왕조 왕 조세르의 고관이었다. 수많은 주제를 다뤘기 때문에 '이집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임호테프는 뛰어난 건축가였다. 그는 최초의 피라미드인 조세르의 계단형 피라미드(Djoser's Step Pyramid)를 디자인했다. 그는 돌을 이용해 대규모 건물을 지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임호텝은 의사, 수학자, 천문학자(달력을 발명한 공로를 인정받음), 마술사, 정치가, 현자로도 유명했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예술과 학문의 신 프타(Ptah)의 아들로 여겨진다. |
고관은 직접 하는 일도 많았지만 혼자서 파악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았기에 다양한 단체장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고관에게 보고하는 사람들은 고관을 보조하는 부고관, 비서장, 부서장, 작업 감독관, 노마르크, 재무 감독관, 곡물창고 감독관 등이 있었다.
이집트 정부는 다층적이고 관료적이며 운영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 덕분에 세금이 무거웠지만, 거둔 세금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지출했다. 농업, 곡물 창고, 세금, 국경, 무역, 보건, 군대, 조선, 외교, 법률 등을 담당하는 거대한 부서들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각각에는 많은 하위 부서와 지역 사무소가 있었다.
이집트를 벗어난 지역(정복된 지역)의 관리들 또한 고관에게 보고했다. 가장 강력한 지역 관리 중 한 명은 누비아 총독이었다. 그는 누비아를 정복하고 군대와 국경 요새를 감독했으며 남부 무역로를 개방했다. 그는 대규모 관료제를 지휘하고, 외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독립적으로 통치했다.
<중산층>
이집트의 중산층은 중왕국 시대쯤에 등장한다. 이들의 직업군은 장인, 상인, 서기, 군인이었다. 대부분은 같은 직업을 가진 다른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마을이나 도시에 살았다. 그들은 비공식 길드와 상인 그룹을 형성했으며, 토지를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양의 개인 재산을 소유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부유한 고객과 의뢰인에게 의존했지만, 일반 농민처럼 부유한 지주의 재산에 묶여있지 않았다.
서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이집트의 다양한 농업 경제와 관료적 정부에 필수적이었다. (이집트인 중 2~5%만이 읽고 쓸 수 있었다) 정부 관계자가 곡물 창고를 검사하고, 세금 징수를 집행하고, 형사 재판을 실시하고, 새 신전을 짓고, 댐이나 운하의 수리를 감독하고, 건축 프로젝트를 감독하는 등의 일을 할 때 서기는 그 모든 것을 기록했다.
서기는 업무를 위해 자주 여행을 했다. 이들의 장비는 오늘날 출장에 쓰이는 노트북 및 서류 가방처럼 작고 가벼우며 휴대성이 뛰어나야 했다. 서기들은 맞춤 제작 상자에 도구를 담아 가지고 다녔고, 빨간색과 검은색 잉크가 담긴 작은 팔레트(수채화 상자와 같은), 잉크용 바인더와 물을 담는 작은 항아리, 잉크를 갈기 위한 절구와 막자, 원시 안료 덩어리, 여분의 펜과 파피루스, 밧줄로 만든 붓을 갖고 다녔다.
서기들은 신관문자를 이용해 파피루스에 글을 썼다. 서기라는 직업은 항상 수요가 많았고 항상 바빴다. 서기는 이집트를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했으며 서기 업무 경력이 있으면 다른 직업으로도 옮기는데 유리했다. 서기는 왕실, 고관의 비서, 전문 길드 또는 귀족의 재산관리인, 건축 현장 관리인, 신전의 종교 서적 복사, 서기 교육관 등이 가능했다. 엔지니어, 건축가, 천문학자, 수학자, 의사 등 이집트의 전문직 종사자들은 서기 출신이 많았다.
서기는 거의 항상 남자였고, 이 직업은 세대를 거쳐 대물림이 가능했지만 똑똑한 농부의 아들도 서기가 될 수 있는 신분 상승의 길은 존재했다. 서기는 일반적으로 세금을 내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와 신전으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힘든 노동을 하지 않았다.
서기는 그 명성과 지위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젊은이들의 롤 모델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러한 높은 지위에는 책임이 따랐다. 서기에 대한 대중의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에 좋은 성격을 함양하고 직업의 명성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때문에, 서기가 아닌 부유한 남자들은 종종 자신을 서기로 묘사하는 조각상을 만들 정도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신분을 높이는 방법이 서기가 되는 것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방법은 군대에 가는 것이었다.
중왕국 이전에 이집트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군대는 필요시에 징집되었으며, 각 노모스(주)는 할당된 양에 따라 병력을 파견했다. 군 지도자들은 군사 전문가가 아닌 시민군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신왕국부터는 군 복무가 수익성 있는 직업이 되었다. 전문 장교들은 면세 대상이었고 재산, 가축, 농노, 금, 의식용 무기, 은퇴 후 안정적 직업을 보상으로 받았다.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는 4개 사단으로 구성된 2개의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여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에 영구적으로 주둔했다. 군대에는 보병, 정찰병, 전차병, 해병대, 궁수가 포함되었다. 군인들은 특권을 누리고 번영하는 계급이었다. 평시에는 군인 공동체에서 살았으며,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토지, 가축, 농노를 보상으로 받았는데, 가족 중 적어도 한 명이 현역으로 남아 있는 한 이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군 경력은 가난한 청년이 지위와 부를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 중 하나였다. 일반 병사들은 전투에서 약탈한(소, 무기, 패배한 민족에게서 빼앗은 기타 전리품) 물품을 공유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은 군사 원정을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꺼려 했다. 이집트인들은 현세와 내세를 둘 다 중요시했다. 그들은 만약에 본인이 이집트 밖에서 죽게 되면 시신이 적절하게 미라화되거나 매장되지 않고, 장례식에서 적절한 기도와 주문이 낭독되지 않음으로써(심지어 장례식을 치르더라도) 영생의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제국이(이집트 신왕국) 정점에 달했을 때에도 군대의 대부분은 용병(고용 군인)과 누비아 출신의 군대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이집트 말기왕조 때에는 서남아시아인과(레반트 지역 가나안 사람) 그리스인이 많이 배치되었다. 노예와 외국인 포로들은 종종 군대에 입대하여 자유를 얻었다.
또 다른 중산층인 이집트 장인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었지만 개인적인 예술 표현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조각상, 그림, 조각품에는 특정한 종교적, 의식적 목적이 있었다. 초기의 예술은 주로 죽은 자(특히 왕)와 신을 섬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점차 이집트가 번영하면서 장인들이 개발하고 개선한 기술은 실생활에 필요하면서도 아름답고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장인은 작업장에 속해서 일을 했다.
그들의 작품은 왕과 죽은 자들, 신들과 여신들의 영광을 위해 바쳐졌다. 그들은 기술적 우수성과 자부심을 보여줄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솜씨가 좋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엄격한 관례와 전통을 따라야 했기에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장인들은 수년간 다른 장인의 작업장에서 견습생을 지냈다. 대부분의 장인들은 읽고 쓰는 방법을 몰랐고, 그들은 서기나 사제가 제공한 설계도와 스케치를 복사해서 그들의 견습생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했다.
장인들은 본인들의 수요가 있는 지역 근처에 모여서 살았다. 예를 들어 테베 근처 데이르 엘 메디나에는 왕들의 계곡 조성을 위해 일하는 장인과 상인들이 가족과 함께 거주했고, 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장인들은 상당한 독립성과 자치권을 누렸다. 그들은 아침에 4시간 일하고 점심과 낮잠을 자고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4시간을 일했다. 그들은 10일(이집트 주)마다 하루의 휴식을 누렸다. 그들은 축제와 종교적인 명절 때는 휴가를 낼 수 있었다.
휴가 때는 근처 절벽에 자신과 가족의 무덤을 자유롭게 만들고 장식했다. 그들은 급여는 밀과 보리였고, 정부는 생선, 야채, 기름, 버터, 소금, 숯, 와인, 맥주 등의 식량을 공급했다. 빨래를 하고, 물을 길어오고, 곡식을 갈고, 고기를 잡는 일을 하는 하인들을 아래에 두고 살았으며 추가적으로 요리사, 정육점, 밧줄 제작자, 직공, 바구니 제작자를 고용할 수 있었다.
<농노, 노예, 메자이>
이집트 농민들은 지주의 땅에 묶인 농노였다. 농노는 자신의 땅과 가축을 소유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유한 것이 거의 없었고, 그들이 생산한 모든 것에는 막대한 세금이 부과되었다. 대부분은 들판에 인접한 마을의 작은 진흙 벽돌집에서 살았다. 각 마을에는 일상적인 문제와 사소한 분쟁을 처리하는 장로회가 있었다. (장로회는 노마르크-주지사에게 지역 문제를 보고한다)
농민의 삶은 지속적이고 힘든 육체노동의 연속이었다. 지금의 농부보다는 다양한 일을 했으며 굳이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작물을 심고, 돌보고, 수확, 지주의 소 떼와 양 떼 관리, 양봉, 물동이를 옮겨 밭에 물 주기, 매년 홍수가 물러난 후 지역 공무원들을 도와 들판 경계를 설정, 운하를 파고 청소, 제방과 댐을 수리, 도로를 건설하고 수리 등 지역 프로젝트의 정기적인 임무)
힘든 노동 끝에 여가 시간에는 자신의 밭에서 일하고 가축을 돌볼 수 있었다. 홍수가 일어나는 아켓(Akhet, 6월中~10월中)시기에 들판은 물에 잠겼기에 대부분의 농민들은 할 일이 없었다. 정부는 이런 유휴 노동을 이용했다. 왕릉 건설, 사원 건설 및 확장, 석재 절단 및 운반, 작업 광산 또는 군사 작전을 위해 시민 노동력 혹은 시민군으로 징집했다. 징집된 사람들은 머리를 삭발하고 가족들에게 짧은 작별 인사를 한 후 작업 현장으로 향하는 배에 탔다. 그들은 배정된 작업에 투입되었고, 홍수가 끝나면 그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갔다. 징집된 사람들에게는 곡식이나 물품이 급여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강제 노동이었지만 노예 제도는 아니었다. 작업은 종종 잔인할 정도로 힘들고 위험했지만, 징집된 사람들을 위한 음식과 숙소 대우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 징집을 기피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였으며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한 문서에는 채찍질 200대와 상처 5개에 대한 처벌이 명시되어 있다. 만약에 징집병이 탈영하면 그의 가족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투옥되거나 인질로 잡혀 있을 수 있었다. 일부 재력이 있는 농민들은 징집에 대항해 종종 대체 인력을 고용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승인되지는 않더라도 용인되는 관행이었다.
징집 노동은 인기가 없었지만 많은 농민들은 그들의 경험을 모험으로 여겼다. 늘 무미건조한 삶이었지만 마을 너머의 세계를 개척하고 시대의 위대한 작품에 참여하는 기회가 됐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징집인은 정부 관리의 주목을 받아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집트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35세나 40세를 넘기지 못했다. 어린이 5명 중 3~4명은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지 못했으며, 다섯 번째 생일을 무사하게 맞이한 아이들이 35~40세까지 살았다.
이집트에서 '노예'와 '시민' 사이의 경계는 모호했다. 노예가 다른 사람의 완전한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부유한 사람의 개인 노예가 농민보다 더 나은 경우가 많았으며, 노예는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심지어 하인을 가질 수도 있었다. 노예는 자유를 살 수도 있었고, 주인의 한마디로 해방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이집트 노예는 특히 당시 세계 다른 곳의 노예와 비교할 때 합리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 (먹을 것, 숙소, 의복, 기름, 날씨 안 좋을 때 근무시간 단축 등)
대부분의 노예는 레반트나 누비아 출신의 전쟁 포로였다. 그들은 이집트의 정서상 불결하다고 간주되어 사원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이집트의 장례 의식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죽고 나면 시체는 악어에 먹이기 위해 강에 던져졌다. 하지만, 이집트 말기왕조에는 노예였던 사람과 노예의 후손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들이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메자이(Medjay or Medjai)는 이집트의 경찰, 경비병, 군인으로 고용된 누비아 출신의 사막 방랑자들이었다. 메자이는 용감한 경비원이자 잔인한 법 집행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탈세자, 징병 기피자 등의 범죄자와 이집트 전역의 궁전, 사원, 무덤을 지켰다. 그러나 메자이들도 왕릉을 약탈하는 도굴꾼들의 기세는 꺾을 수 없었다. (왕릉의 수도 많고 도굴꾼은 더 많았기 때문)
이집트의 문자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Egyptian_Hieroglyphs/}
이집트의 그림 문자인 상형문자는 거의 35세기 동안 종교 문헌과 기념물의 비문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대 문자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상형문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몇 가지 설득력 있는 가설 중 하나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의사소통 개념에 익숙했던 나일강 서쪽 사막의 선사시대 수렵 공동체가 쓰던 기호들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암각화 증거가 존재) 이 암각화에 묘사된 그림 중 일부는 이집트의 초기왕조 이전 문화의 도자기 그릇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원시 상형문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형문자(hieroglyphs)의 시초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나 사건과 같은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기호, 그림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문자의 문제점은 그것이 포함하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와 사원, 양을 직관적으로 그려서 그림으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여자가 신전을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나온 것인지, 양을 제물로 쓴 것인지 아니면 신전에서 구입한 것인지) 그래서 상형문자는 다양한 의미 전달을 위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발전한다.
[토막 상식]
로고그램: 그림 형상이 어떤 단어와 연결되어 있음 (그 형태가 얼추 그 단어의 뜻과 비슷하게 생김) 픽토그램: 그림 형상이 굳이 어떤 단어와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뜻은 알 수 있음 (독극물 표시 같은 것) 표음문자: 그림 형상이 하나의 음절과 연결되어 있음 표의문자: 그림 형상이 하나의 뜻과 연결되어 있음 (그 형태가 얼추 그 뜻과 비슷하게 생기지 않음, 예를 들면 한자) |
<로고그램 or 픽토그램 예시>
<표음문자 예시>
상형문자의 글쓰기 방향은 좌에서 우, 우에서 좌 모두 가능하며 수직 열로도 작성이 가능하다. 문장의 시작 방향은 동물과 사람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라보는 방향의 맨 끝에서 문장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이 사용하는 기호의 수는 알파벳 체계에 비해 훨씬 많았으며, 처음에는 천 개가 넘는 상형문자가 사용되었지만 나중에 중왕국 때에는 (기원전 2,125 ~ 1,773년) 약 750개로 줄어든다. 이러한 상형문자들은 주로 기념물과 사원의 문자로 사용되었고, 아름답게 직사각형으로 묶인 상형문자는 기념비적인 비문의 웅장함을 자아내었다. 휴대용 기록 매체인 파피루스에도 상형문자가 자주 쓰였으며 파피루스는 제1왕조(기원전 3,100 ~ 2,890년)때 등장한다.
하지만, 서기들에게 상형문자는 상당히 노동 집약적이었기 때문에 이집트 신왕국 (기원전 1,550년~1,069년)때에 들어서는 hieratic이라는 이집트 신관문자가 개발되고 널리 쓰인다.
신관문자(Hieratic)는 처음 종교 문서에 사용되었지만 이후에는 경영학, 주문서, 개인 및 비즈니스 편지, 유언장 및 법원 기록과 같은 법적 문서와 같은 다른 영역에서도 사용되었다.
하이집트의 삼각주 지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민중문자(Demotic)는 기원전 700년경 대부분의 글쓰기에 사용되었으며, 상형 문자는 계속해서 돌에 새겨진 기념비적인 문자의 문자가 된다. 민중문자는 이집트 말기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내내 주로 쓰인다. 그러다가 그리스&로마 문화가 점점 주류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기원후 2세기에 이르러 기독교는 전통적인 이집트 숭배의 일부를 대체하기 시작하고, 기독교화된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언어 발전의 마지막 단계인 콥트 문자(그리스 문자체 알파벳의 파생물)를 개발하여 그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데 사용한다.
이집트의 신과 종교 그리고 사후세계
{출처: MrPsMythopedia, https://www.wransom.co.uk/wp-content/uploads/2020/06/Ancient-Egyptian-Gods-Information-Print-Out.pdf}
이집트의 종교는 특히 다른 고대 민족에 비해 매우 관대하다. 보편적인 진리도, 고정된 종교적 교리도 없었다. 이집트인은 오히려 종교를 마법처럼 대했다. 이집트 종교는 "수천 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복잡한 모자이크"라고 부른다. 왕과 대제사장들은 세상을 원활하게 운영하고 우주의 마아트(ma'at)를 유지하는 중요한 일을 했다. 그들이 하는 매일의 의식을 통해 해가 뜨고, 홍수가 예정대로 일어나고, 농작물이 자랐다. 일반적인 가정의 종교는 어린이와 가축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였고, 가정을 보호하고, 다산을 보장하는 등 소소한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종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지상에서의 삶을 영원한 여행의 한 부분으로 보았고, 죽음 이후에도 그 여행을 계속하려면 지속할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야 했다. 고대 이집트인에 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은 무덤, 신전, 미라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들은 죽음에 집착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축제, 음악, 색상, 장식, 맥주, 와인, 과자 등 좋은 삶의 요소를 사랑했다.
여하간, 이집트인들은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행동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과 우주의 작동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했고 마아트(Ma'at, 이집트 사회를 이끄는 원칙이며 균형, 올바름, 질서, 정의, 진실, 조화, 선한 행동, 현상 유지를 의미)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의지해야 했는데, 이는 조화로운 존재를 통해 인간에게 가장 큰 즐거움과 행복을 제공하고 신들이 자신의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신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이집트인들은 2,000개가 넘는 신과 여신을 숭배했는데, 대부분은 한 지역이나 마을에서만 알려진 작은 지역 신이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도시가 점점 중요해지면서 그 도시의 신과 여신도 덩달아 중요해졌다. 그렇게 수천 가지의 신들 중 주요한 신들이 추려진다. 이집트의 신화에 대한 내용은 시중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으니, 대표적인 신의 이름과 그들이 무엇을 관장하는지는 정도만 아래를 참고하면 되겠다.
<이집트인의 사후세계>
영생의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심장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시체를 미라화할 때 대부분의 내부 장기를 꺼내어 카노푸스 단지에 넣었지만, 심장만큼은 죽은 자의 몸에 그대로 두고 그 위에 풍뎅이(스카라브)형상 물건(부적)을 올려두었다. 이는 심장의 중요성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이 죽게 되면 심판을 위해 오시리스의 앞에 서게 된다고 믿었다. 심판의 저울 한쪽에는 망자의 심장을 올려두고 반대편에는 마아트의 깃털을 올려둔다. 만일 그 사람이 마아트(ma'at)의 선한 삶을 살았다면 그의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그의 영혼은 영생을 얻게 되며, 그렇지 않다면 무시무시한 괴물(일부는 악어, 일부는 하마, 일부는 사자)가 즉시 그를 잡아먹어서 영원히 죽게 된다.
영혼이 이 단계를 통과하면 그다음으로는 지하 세계를 통과하는 여행을 하게 된다. 이때 여행을 가로막는 문지기와 괴물들을 통과하기 위해 그는 죽은 자의 서에 나오는 주문을 외워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무덤에는 주문의 사본(부자들은 그림 두루마리, 가난한 사람들은 파피루스 조각)이 무덤에 같이 안치되었다.
이집트인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 중 대부분은 무덤에서 나온 정보들이다. 무덤 안에는 그림, 벽화, 일상에 대한 조각, 무덤 주인과 그의 가족 구성원 정보, 동물의 동상, 음식과 음료, 가정용품 및 소모품 등이 있었다. 집과 농장, 부엌, 양조장, 작업장, 밭 등을 상세히 조각한 목재 모형을 통해 우리는 2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들의 삶을 여과 없이 볼 수 있다. 산 자의 집이 죽은 자의 집에서 재현되었다.
왕조 이전 시대부터 이집트인들은 영생하려면 육체를 보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무덤이 크고 화려해짐에 따라 부장품으로 의복, 가구, 보석, 토기, 무기, 음식 등 다양함 물품이 같이 매장되었다. 주인 없는 값비싼 물건이 땅에 묻힌다는 사실 때문에 이집트인들의 무덤은 항상 도굴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집트의 미라는 뜨겁고 건조한 사막 환경에 묻힌 시체가 자연적으로 영구 보존이 가능한 상태로 변한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시체를 마스타바나(초기 무덤 형식) 피라미드 같은 선선한 공간에 두게 되면 시체가 부패하니 인공적으로 시체를 영구 보존이 가능하게 끔 만든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라이다. 이렇게 만든 미라는 나무관으로 둘러싼 다음 맨 마지막에 돌 석관에 넣어서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성을 들였어도 많은 시체들의 부패화 과정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고, 부패가 진행되기도 전에 무덤 도굴꾼들에 의해 시체가 찢겨져나가는 것이 대다수였다. 미라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큰 위협은 도굴꾼이었다.
도굴꾼 입장에서 보면 시체와 함께 묻힌 보석, 금, 아마포들은 노다지였다. 먼저 파는 사람이 임자였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많은 무덤이 매장된 지 며칠 만에 약탈당했다. (거의 모든 무덤이 약탈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집트인들은 도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단단한 규암으로 방을 만들고 수 톤에 달하는 암석판을 위에 얹었고, 가짜 문, 함정 문, 미로, 막다른 통로, 가짜 방, 속임수 문, 숨겨진 통로, 막다른 계단, 거대한 돌 블록, 잔해로 뒤덮인 통로, 벽에 새긴 저주, 메자이 경비병 등을 시도했다. 하지만 도굴꾼의 욕망 앞에서는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손쉽게 털린다.
거대한 피라미드들 마저 털리는 것을 목도한 고왕국의 이집트 왕들은 단단한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에 미라를 두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테베 서쪽 절벽에 왕들의 계곡이라는 집단 무덤이 생기지만, 도굴꾼들은 어려움 없이 그곳을 도굴한다. (대부분 도굴됐지만 우연히 도굴되지 않아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 제18왕조) 도굴은 무덤의 주인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화나는 일이었지만(영생이 불가하니), 재화가 의미 없이 지하에서 썩을뻔했던 것을 현세로 다시 올려 재순환 되게 만든 것은 의외의 수확이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일반 사람들의 무덤은 약탈자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훔칠 만한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조상처럼 갈대가 늘어선 단순한 모래 구덩이에 묻혔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시신이 값비싸게 미라화된 왕들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
이집트의 생활상
이집트가 성장하고 번영함에 따라 나일강변의 정착지 중 일부는 신전, 상인, 장인 및 노동자를 위한 구역이 있는 마을과 도시로 번성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촌 지역과 마을에 살았다. 기껏해야 인구의 5%가 도시 거주자였다.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성벽이나 요새화된 도시는 이집트에서는 드물었다. 도시와 마을은 덥고 건조하며 먼지가 많았고 사람과 동물로 가득했다. 거리는 비좁았고, 파리와 무는 곤충들이 떼를 지어 윙윙거렸다.
이집트인들은 발생한 쓰레기를 대문 앞에 버리거나, 운하를 이용하여 쓰레기를 운반한 후 아무 골목이나 임시 구덩이에 던지거나, 빈 공간 쪽에 쌓아두었다. 내리쬐는 태양으로 인해 뜨거워진 쓰레기 더미는 유해한 해충이 들끓는 공간이 되어 이집트 내의 해충을 재생산했다.
이러한 도시 현상은 중왕국 시대에 고양이를 길들이게 되면서 많이 개선되었다. 고양이는 골목, 쓰레기장, 집, 곡물창고에서 설치류와 기타 해충을 죽여주었고 덕분에 이집트인의 건강 개선과 함께 곡식들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주택 및 건물>
대부분의 집과 마을은 홍수를 피하고 침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지대에 세워졌다. 일부 저지대 주거지는 댐과 둔덕(흙으로 만든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점검과 유지 관리가 필요했다. 건물을 짓기 위한 재료 중 하나인 좋은 품질의 목재는 레반트 지역에서 수입하였고, 석재는 풍부하지만 건축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고 노동 집약적이었다. 그래서 석회암, 화강암, 거대한 나무와 같은 값비싸고 내성이 뛰어난 재료는 묘지와 신전을 짓는데 대부분이 쓰인다.
농부의 오두막에서 왕궁에 이르기까지 생활을 위한 집과 기타 건물은 진흙 벽돌로 지어졌다. 진흙 벽돌은 나일강의 점토와 잘게 썬 짚과 모래를 섞어 반죽을 말리고 모양 틀에 넣고 햇볕에 말려서 만든다. 벽돌의 크기와 모양은 표준화되어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가마에서 벽돌을 굽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햇볕을 이용한 건조는 손쉽고 효율적이며 강력하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값도 싸고 어떤 구조물에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가마는 굳이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흙 벽돌 건물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된다.
소작농이나 노동자의 집 안에는 몇 개의 작은방만 있었다. 이집트의 집 모양은 더운 기후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였으며, 여러 개의 방이 안뜰을 둘러싸고 있었다. 집의 평평한 지붕은 더운 밤에 바람이 잘 통하는 야외 수면 장소가 되어주었다. 진흙 벽돌로 된 두꺼운 벽에 위쪽에 높게 설치된 작은 창문은 열이 빠져나가는 구멍 역할을 했고, 일부 주택에는 냉각된 북풍을 집 안으로 유입시키는 작은 삼각형 지붕 구조(“바람 타워”라고 함)가 있었다. 이는 20세기까지 이집트 주택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의복>
이집트는 365일 더웠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 모두 가능한 한 적게 입었다. 남자들은 무릎까지 걸치는 리넨 로인클로스를 입었다. 여성들은 리넨 원피스를 입었다.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부적이나 부적(종종 베스 신을 묘사함)만을 착용하고 알몸으로 뛰어다녔다. 많은 남자들이 머리를 밀었는데, 덥고 건조하며 먼지가 많고 벌레가 들끓는 땅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는 여성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머리 모양을 내기 위해 식물 재료를 혼합해 밀랍으로 단단하게 만든 가발을 착용했다. 가발은 다양한 스타일로 나왔으며, 일부에는 머리띠, 땋은 머리, 리본 및 보석 장식품이 포함되었다. 아이들은 "청춘의 옆머리"(호루스 자물쇠라고도 함)로 알려진 머리를 제외하고는 머리를 삭발했다. 이 옆머리를 자르는 것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였다. 이집트인들은 대부분 맨발로 다녔고, 제국시대 때는 왕족과 엘리트들이 파피루스 샌들, 가죽 신발 또는 가죽 슬리퍼 정도는 신었다.
<가축>
왕조 이전 시대에 정착민들은 나일 계곡을 돌아다니는 야생 소, 황소, 가젤, 오릭스, 염소를 정착지로 들였다. 동물들은 우유, 가죽, 고기,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사육했고, 거위, 오리, 두루미, 비둘기를 사육하고 식용으로 살찌웠다. 이집트인들은 가축을 개량하기 위해 선택적 번식을 실시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들도 개와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소중히 여겼다. 고대에도 개들이 사유 재산을 지키는데 유용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점차 훌륭한 개 애호가가 되는데 현대 살루키와 매우 흡사한 반려동물을 사육했다.
중왕국 시대쯤에 나일강 계곡에 서식하던 고양이는 원래 설치류를 죽이고 식량을 보호하는 능력으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간택되었고 이내 가정용 애완동물로 고양이를 키우게 된다. 그들은 쥐, 뱀을 잡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제공했다. 이집트 미술에서 고양이는 대개 여자와 함께 등장한다.
힉소스가 말을 도입한 후, 이집트인들은 유명한 말 사육자와 마차꾼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 위에 타지는 않았다. 그들은 말의 척추가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기에 약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집트의 사회
<농업>
이집트의 농업 경제는 분지 경작이라는 기술을 기반으로 구축되었는데, 매년 봄이 되면 나일강은 안정적으로 범람하여 폭이 1마일까지(1.6km) 넓어졌다. 나일강은 물러나면서 비옥한 진흙과 흙을 남겼고, 농부들은 정부 관리들이 농경지를 재조사하는 것을 도왔고 파괴된 댐과 둑을 신속하게 재구축하였다. 이 수리를 끝내야 식목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흠뻑 젖은 들판에는 쟁기질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지만, 필요한 경우에 농부들은 두 사람 또는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로 흙을 갈았다. 그런 다음 곡괭이를 들고 밭을 헤집어 큰 흙덩어리를 부수고, 흙이 준비되면 여성들은 바구니에 담긴 씨앗을 손으로 고랑에 뿌렸다. (농부들은 에머밀과 스펠트밀 이렇게 두 종류의 밀을 재배했다) 그런 다음 양 떼가 밭을 걸어 다니며 씨앗을 묻었다. 모내기 후에는 도랑과 수로를 이용해 밭에 물을 주었다. 또한 잡초를 제거하고 새와 쥐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3개월이 지나면 곡물을 수확했는데, 날이 구부러진 낫을 사용하였다. 곡식단은 다발로 모아서 당나귀에 실려 마을의 타작마당으로 운반되었다.
식물 줄기는 가축을 위한 짚으로 사용되었고, 곡물이 든 씨앗 머리는 타작을 했다. 소와 사람이 곡식 위를 걸어 다니며 껍질을 분리했다. 그런 다음 농부는 큰 포크 모양의 도구를 사용하여 곡물을 공중으로 던지면 바람이 왕겨를 날려 버렸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그것을 수집하였다. 껍질과 줄기는 진흙 벽돌을 만들기 위해 남겨 두었다. 모은 곡식은 계량하여 자루에 담아 곡식창고에 저장하고 세금 징수 역할을 하는 세리를 기다렸다.
이집트인들은 곡물을 갈아서 대부분 밀가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일부 곡물은 맥주를 양조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맥주는 박테리아에 오염된 물보다 더 안전했기 때문에 더 선호되었다.
<무기>
이집트인들은 다른 문명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호전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전투 장비는 대부분 사냥용 무기를 개조한 것이었다. 군인들은 활, 창, 투창, 단검을 사용하고 동물 가죽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다녔다. 이집트 군대의 상당수는 외국 용병들로 채워졌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 무기와 방어구를 사용하였다.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인들은 황소 다리 모양의 굽은 시미터인 코페시(Khopesh) 검으로 유명했다.
이집트의 전투 양상은 힉소스인의 침입 전후로 바뀐다. 기존의 이집트인과 다르게 힉소스는(시리아~팔레스타인에 거주했던 셈족이며, 제2중간기에 이집트를 침략함) 말과 전차를 도입했다. 그들의 전차는 운전수와 궁수 또는 창을 던지는 사람을 태운 차량이었고, 대부분의 전투에서는 전차가 대규모로 배치되었다.
<수학>
이집트인들은 숫자를 조작하는 데 매우 능숙했으며 서기, 장인, 세금 징수원, 건설 감독자 및 군 장교가 업무상 직면하는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수학을 사용했다. 기본적인 덧셈, 뺄셈의 개념을 갖고 있었으며 곱셈과 나눗셈은 각각 덧셈을 반복하고, 뺄셈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10진법을 사용하고 분수를 사용했지만 분자에는 1만 사용했다. 0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단위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회계, 장부, 측량, 토지 측량이 정밀성을 요하는 이집트의 사회 구조상 이러한 수학의 발달은 필연적이었다. 예를 들어 회계를 했던 서기관은 재산의 경계를 결정하기 위해 토지 면적을 정확히 구할 알아야 했고 이러한 기준으로 작물 수확량을 계산하였다. 또한 건설 감독관은 건설 프로젝트를 위한 노동력과 자재를 추정하고, 인구를 기준으로 지역의 식품 및 기타 상품에 대한 소비율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계산을 기준으로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건물이 들어서야 할 레이아웃을 만드는 데 매우 능숙했다. 물론 이런 것을 머리로만 할 수는 없기에 도구도 썼는데 건물 단지를 설계하기 위해 그들은 원시 경위석을 사용했고, 각도를 측정하는 측량기도 썼다. 이러한 실용적인 수학 기술을 사용하여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 오벨리스크 및 거대한 조각상을 운반하고 세울 수 있었다.
<천문학>
이집트인들도 실용적인 천문학자였으며 주로 건물의 방향을 정하고 시간을 측정하는 데 별을 사용했다. 쿠푸가 대피라미드를 건설했을 때 이집트의 천문학은 전성기였다. 이집트의 별자리 지침서에는 악어, 황소 다리(현대의 큰 곰자리), 지팡이를 쥐고 있는 오시리스(현대의 오리온) 등 5개의 별자리가 나와 있다. 이집트 천문학자들은 천체를 "지치지 않는 별"(행성), "불멸의 별"(항상 지평선 위에 보이는 별 ), "파괴할 수 없는 별"(고정 별)으로 나누었다. 그들은 목성, 토성, 화성, 금성, 그리고 아마도 수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었다. 각 시간의 지속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양했다. 그들은 해시계, 그림자 시계, 물시계를 사용하여 그림자를 측정하거나 물을 떨어뜨려 시간을 표시했다.
<의학>
이집트의 의사들이 갖고 있던 지식과 기술은 매우 뛰어나서 후대의 그리스인, 로마인, 페르시아인, 아랍인들은 이집트의 의료 행위를 존경하고 차용했다. 의사들은 농장과 건설 현장에서 흔히 발생하는 뻣뻣함, 염좌, 압상, 골절, 상처, 화상, 피부 질환 등의 문제를 치료했다.(외과에 해당하는) 그들은 부목, 붕대, 찜질을 사용했고, 톱, 칼, 드릴, 갈고리, 겸자를 이용해 절단과 간단한 수술을 시행했다. 외과 의사를 위한 일종의 사례집인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는(기원전 1600년경) 머리와 가슴의 부상과 장애를 치료 가능한 사례, 치료 불가능한 사례, "불확실한" 사례로 분류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인체의 내부 작용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신념체계에 있는데, 기본적으로 죽은 자의 몸은 신성한 것이므로 연구하거나 해부해서는 안 됐다. 이집트인의 미라와 해골을 보면 이집트인들이 많은 질병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발견된 이집트인의 대부분의 치아가 썩어있었다. (사람 뼈 중 가장 오래 남아있을 수 있는 뼈이기에 발견된 절대적인 숫자가 많기도 함) 이는 이집트인이 숫돌에서 나온 모래와 모래로 가득 찬 빵의 섭취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이 때문에 치아의 법랑질이 마모되어 뿌리가 노출되고 그 때문에 농양과 심한 통증을 유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과적인 시술들을(골절을 맞추고 상처를 꿰매는 등의 간단한 치료법) 제외하고는 인체 내부의 작용에 대한 무지 때문에 해결 불가한 것들은 부적을 이용해 치료하려 했다.
이집트의 제사장들이 의사를 겸했었기에 이들은 질병을 악마나 유령의 탓으로 여겼다. 따라서 때로는, 일종의 주문을 외우면서 물약을 바르는 처방도 있었다. 물약에는 잎, 허브, 과일 주스, 대추야자 및 무화과, 꿀, 탄닌산, 수지, 피마자유, 모유, 동물 지방 및 혈액, 동물 모피, 뱀 기름 및 거위 기름의 혼합물 등이 있었다.
<정부 운용 방식>
이집트는 말기왕조까지(페르시아에 의한 지배) 현금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경제는 물물교환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이집트에서 세금을 부과할 때 고려하는 것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갖고 있는 가축의 수량이 (Cattle count라고 불림) 얼마나 되냐 였고, 나머지 하나는 연간 나일강의 범람 정도였다. 이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해서 2년마다 과세를 하였으며 이러한 이벤트를 셈수-호르라고 불렀다. (Shemsu-hor) 제2왕조부터는 셈수-호르(호루스의 추종자)시기에 왕과 그의 수행원들이 이집트 전역을 돌면서 나라의 경영을 위한 개인의 부를 평가하고, 인구를 조사했으며 세금 부과에 대한 결정을 하였다.
왕은 셈수-호르 행사를 통해 국민의 삶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될 수 있었고, 관리들은 국가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면밀히 관찰하고 정책을 시행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부수적으로 왕은 노마르크(주지사)의 신뢰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주지사(노마르크)들은 각 주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세수의 총량을 왕에게 보고하였고 왕은 노마르크가 보고한 양이 실제로 맞는지 각 노모스를 방문하여 직접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이다. (기름, 맥주, 도자기, 가축 및 기타 모든 종류의 상품에 세금이 부과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곡물에 대한 세금이었다)
이렇게 거둬들인 곡물은 이집트 인구를 먹여살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무역에도 필수적이었다. 이집트에 부족한 자원은 무엇이든 곡물 판매를 통해 구입할 수 있었고, 이집트에는 대개 풍부한 작물을 생산하는 비옥한 토지가 있었기 때문에 곡물은 정부 운영에 가장 중요했다. 그들은 곡물을 무역에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흉년에 사람들을 먹이고 불행을 겪을 수 있는 지역 사회에 분배하기 위해 잉여분을 저장했다. 고대 이집트 정부는 세금과 징병을 통해 식량, 원자재, 공산품,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충족했다. 점점 세금 징수 시스템이 수월하게 운용되고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상당한 비용과 효율적인 노동력이 필요한 건축 프로젝트(피라미드 같은 기념물)들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마무리
이집트의 역사를 시계열로 살펴보기 전에 배경지식을 (지리, 사회, 문화) 살펴보는 것을 강력하게 권한다. 한 집단의 역사가 뿜는 다채로운 색깔은 그 구성원을 둘러싼 지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보아야 더 빛이나기 때문이다.
다음 part에서는 이집트 초기왕조에 대해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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