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고왕국에 해당하는 왕조는 총 4개 (제3왕조 ~ 제6왕조)이다. 각 왕조를 역임했던 모든 왕들에 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제1~2왕조보다도 기록이 없는 왕들도 있기에(단적인 예로 제3왕조는 그 창시자인 조세르를 제외하고 나머지 왕들은 행적이 불분명함), 이번 Part에서는 각 왕조의 주요한 왕들의 행적을 기술하는 것으로 갈음하려 한다. 분량을 고려해서 제3~4왕조를 먼저 다루고 나머지 왕조와 제1중간기를 다음 part에 이어서 설명하겠다.
아래에는 이집트 문명의 연대표와 간략한 특징을 적어 놓았으니 대략적인 얼개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집트 문명 연대표>
*리버풀 대학 영국의 이집트 학자 Ian haw가 2000년대에 재정립한 이집트 연대 순을 따름.
**강력한 중앙 정부가 있었던 시대는 왕국이라고 하고, 분열되거나 중앙 정부가 없었던 시대는 중간기라고 함.
- 이집트 초기왕조 이전:기원전 6,000년 ~ 3,100년 (신석기시대)
- 이집트 초기왕조[제1~2왕조]: 기원전 3,100년 ~ 2,686년 (국가의 기반 확립)
- 이집트 고왕국[제3~6왕조]: 기원전 2,686년 ~ 2,181년 (전제적 왕권의 등장, 이집트의 제도적 경제적 예술적 전통 정착)
- 이집트 제1중간기[제7~10왕조]: 기원전 2,181년 ~ 2,140년 (정치적 혼란과 해체)
- 이집트 중왕국[제11~12왕조]: 기원전 2,040년 ~ 1,783년 (분열된 이집트 재통일, 문화적 성장 및 주변국과 교류 확대)
- 이집트 제2중간기[제13~17왕조]: 기원전 1,783년 ~ 1,550년 (힉소스인의 영향력 확장과 감소)
- 이집트 신왕국[제18~20왕조]: 기원전 1,550년 ~ 1,069년 (이집트의 제국 시기)
- 이집트 제3중간기[제21~25왕조]: 기원전 1,069년 ~ 664년 (리비아-이집트계 소왕국들과 도시들의 군웅할거)
- 이집트 말기왕조[제26~31왕조]: 기원전 664년 ~ 332년 (페르시아;아케메네스제국에 의한 지배, 27 & 31왕조)
- 알렉산드로스 제국[헬레니즘]: 기원전 332년 ~ 323년 (알렉산더의 이집트 정복)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헬레니즘]: 기원전 305년 ~ 30년 (알렉산더의 휘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 -> 이후 로마 제국의 속국)
고왕국(Old kingdom) - 기원전 2,686 ~ 2,181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99~207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165~171p}
{출처: Lecture 11:Dynasty 3: Step Pyramids © Notes & images compiled by Gregory Mumford 2023}
{출처: Lecture 13:Dyn.4: Historical+ background © Notes & images compiled by Gregory Mumford 2023}
이집트 고왕국의 시작은 제3왕조의 출현으로 특징지어진다. 최근의 학자들은 문화와 관습을 고려했을 시 제3왕조까지는 초기왕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으니 참고로만 알아두시라. 초기왕조가 국가의 틀을 잡은 시기라면, 고왕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으로 번영했던 이집트가 그 권력의 남용으로 점점 쇠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기이다. 고왕국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별칭이 있는데, 피라미드의 시대 'Age of the Pyramid'라고 불린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건축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왕국 시기부터는 왕이 신과 동일시 취급되는데(제1~2왕조 때는 왕을 호루스 신의 추종자 정도로 생각),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피라미드이다. 초기왕조 때 건축된 왕의 무덤들은 진흙벽돌과 석판, 레반트 지역에서 수입한 목재를 이용해서 만들었다. 하지만, 고왕국부터는 무덤 전체를 돌로 만들어 영원히 지속되게 만들었다. 무덤은 왕의 영혼이 내세로 여행을 떠나는 장소가 아니라 왕이 지속해서 살아가는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집트의 왕권은 막강했고, 상대적인 국력도 주변지역에 비해 월등했다.
[토막 상식]
피라미드 어원: 이집트의 독특한 무덤 양식을 피라미드(Pyramid)라고 부르지만, 이는 사각뿔 모양의 케이크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피라미스(Pyramis)에서 유래했다. 정작,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메르(MR, mer)라고 불렀다. 메르의 M은 장소를 의미하고, R은 승천하는 행위를 뜻하는데 의역하자면 '승천하는 장소'이다. |
피라미드와 같은 대규모 건축물은 당대의 통치자가 이용할 수 있던 국력의 크기를 가늠케 한다. 세계 유수의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국력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한 시기에 지어지곤 한다. 하지만, 국력은 연속적이지 않고 내부 정세, 환경적 요인, 외세의 침입 등으로 쉽게 변동될 수 있는 것이기에 소위 국력을 믿고 과감한 행동을 벌이는 통치자들은 본인의 재위 기간 동안은 나라가 무사했을지 몰라도 후대에는 항상 탈이 났다. (물론, 현재는 그런 건축물들이 관광자원으로 쓰이기에 종합적으로 마이너스는 아닐지도..) 그런 의미에서 피라미드의 시대라 불리는 고왕국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여실히 보여준다. 실제로 고왕국 기간 내 피라미드의 부피를 비교해 보면, 제4왕조 때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다가 제4왕조 후반에 다시 급격하게 그 부피가 줄어든다. 본격적으로 제3왕조부터 시작해서 고왕국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살펴보자.
제3왕조 - 기원전 2,686 ~ 2,613년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Old_Kingdom_of_Egypt/}
제3왕조는 정연한 관료제를 갖춘 왕국으로서 재탄생한 이집트를 보여준다. 이는 이 시기에 진행됐던 거대한 석조 프로젝트들로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이집트의 돌은 홍해 서쪽 산악 지역에서 잘라서 사카라까지 운반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노동력을 고려하면 왕국이 갖고 있던 국력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으며, 채석장의 일꾼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을 공수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조직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함) 이러한 건축물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농사와 병역이 면제된 건장한 남성들이 매우 많이 필요했으며, 막대한 부와 외세의 침입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가 전제돼야 했다.
<조세르 Djoser>
제3왕조의 창시자가 조세르가 아니라 사나크테(sanakht)라는 의견도 있으나, 오늘날 대부분 이집트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사나크테는 제3왕조의 후기 왕이었다고 믿고 있다. 조세르의 유년기&청소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호루스 명 네체리케트(Netjerikhet)는 "신성한 몸"을 의미하며 조세르(Djoser)는 안정을 상징하는 Djed 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제2왕조의 마지막 왕인 그의 아버지 카세켐위(Khasekhemwy)를 계승했고, 그의 어머니는 여왕 네마타프(Nimaathap)였다. 그의 아내는 헤테페르넵티(Hetephernebti)였으며 아마도 그의 이복누이였을 것이다. 일종의 근친혼이며, 이러한 유형의 결혼은 이집트 역사 내에 흔했다. 조세르는 평생 헤테페르넵티 외에는 다른 여성을 상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세르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즉시 건축 프로젝트를 의뢰한다. 건축 프로젝트가 가동됨과 동시에 조세르의 통치하에 이집트는 건축 기념물 건설, 농업 발전, 무역, 도시의 부상과 같은 나일강 문명이 급격히 발전하는 시대로 변모한다. (그전까지는 가뭄에 시달림) 제1왕조 시대보다 조세르(Djoser) 통치 기간 동안 도시의 수가 더 많아졌고 건축물도 더욱 화려해졌다. 조세르의 피라미드 단지는 제3왕조 초기 건축 디자인의 큰 발전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다. 장식은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으며 사람들에게 신의 축복과 땅의 조화를 상기시키기 위해 상징이 사용되었다.
조세르는 추가적인 국경을 확장에 성공하여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한다. 남쪽으로는 아스완의 제1급류 지점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이집트의 공식적인 남쪽 국경이 됨), 북쪽으로는 시나이반도로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가서 현지의 베두인족은 몰아냈다. 시나이반도는 터키석과 구리와 같은 귀중한 광물자원이 있던 곳이기에 이집트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입지였다. 왕의 승전보는 신의 은총이었고, 그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간다.
그의 명성 빛낸 또 다른 에피소드는 기근 해결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조세르 시대에 남겨진 것이 아니고 2,300년 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새겨진 비문에 남겨진 기록이다. 이집트에 7년간 기근이 발생하자 조세르는 그의 고관(비지어)이자 건축가였던 임호텝(Imhothep)과 노마르크였던 메디르(Medir)와 상의하여 아스완의 제1급류 지점 근처의 엘레판티네(Elephantine) 섬에 있던 크눔(Khnum나일강의 수원의 신) 신전의 재건축을 결정한다. (신전의 상태가 좋지 않았음) 새로운 신전이 완공되고 기근이 해결되자 조세르는 백성들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계단식 피라미드와 장례 단지>
조세르의 명에 의해 건축가이자 고관인 임호텝은 사카라에 세울 그의 묘지를 디자인하게 되는데, 임호텝은 조세르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무덤을 기존의 방식보다 더 크게 짓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기존의 방식이었던 마스타바를 여러 단(6단) 쌓아 올린다. 계단식 피라미드(Stepped Pyramid)는 그렇게 탄생한다. 그래서 제4왕조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는, 그 형태적인 측면에서 마스타바와 더 비슷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마스타바는 점토 벽돌을 이용해서 건축하지만, 계단식 피라미드는 나무(이집트의 신들에게는 신성한 의미)와 갈대(이집트의 내세인 갈대밭을 상징함)의 형상이 새겨진 돌 블록으로 만들어졌고, 건축물들은 노예가 아닌 숙련된 이집트 장인과 노동자에 의해 건설되었다. 완성되었을 때 계단식 피라미드는 높이가 62미터로 당시 당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피라미드의 바닥에는 수직 갱도를 파서 묘실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다. 조세르의 묘실은 강도를 피하고 왕의 신체와 부장품을 보호하기 위해 복도에서 떨어진 방이 있는 미로의 터널처럼 바닥 아래에 파졌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이집트 왕의 묘실은 99% 확률로 도난당했고, 무덤에서는 그의 신체 중 발만 발견되었다.
계단식 피라미드 옆에는 조세르의 영혼을 위한 장례 단지가 있었다. 160,000 제곱미터 면적에 10.5미터 높이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안에는 신전, 안뜰, 사제를 위한 거주 공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남쪽에는 왕의 갱생 축제를 위한 헤브-세드용 안뜰이 있었고, 장례 단지 주변에는 전통적인 이집트 가옥을 구성해 놓았다. 장례 단지의 석벽은 갈대 돗자리처럼 보이게 꾸몄고, 돌기둥은 갈대 더미 모양으로 만들었다. 나무모양 울타리도 돌을 깎아 만든다. 돌로 만든 갈대와 나무는 지상에 영원히 남아 조세르의 무덤을 지키기를 염원하며 세워졌다.
임호텝은 이러한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김으로써 부와 명예를 거머쥔다. 임호텝은 칭호도 여러 개 받았으며 하이집트왕의 재무 장관, 상이집트의 이인자, 궁정 행정관 겸 태양신의 종인 헬리오폴리스 대제사장으로 불렸다. 그의 사후에 이집트에서 가장 위대한 사제이자 현자로 추앙되고 의약의 신으로 신격화된다.
<조세르 이후 제3왕조의 왕들>
조세르의 장남(그의 형제일 수도 있음)인 세켐케트(Sekhemkhet)는 조세르보다 높은 7단 피라미드를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6단) 건설하려 했으나, 그가 제위 6년 만에 죽는 바람에 완성되지 못하고 기단만 건설하다가 도중에 중단된다. 그는 시나이 지역에서의 군사 작전을 포함하여 조세르의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통치에 관한 비문이 그곳에서 발견되었다.
하바(Khaba)는 제3왕조의 세 번째 왕이었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의 왕보다 앞서 사나크테가 즉위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카바 또한 7단 피라미드를 계획해서 건설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후니는 제3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그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문화 발전에 방해가 되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가 전임자들의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어갔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없다. 후니는 원래 메이둠 피라미드(Meidum Pyramid)를 건설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제4왕조의 1대 왕 스네프루(Snefru)로 확실하게 확인되었다.
[토막 상식]
이집트 제3왕조
출처: http://www.narmer.pl/dyn/03en.htm |
제4왕조 - 기원전 2,613 ~ 2,494년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Old_Kingdom_of_Egypt/}
<스네프루 Snefru>
제4왕조의 첫 번째 왕인 스네프루는 제3왕조 마지막 왕 후니의 두 번째 아내 중 한 명인 메레산크(Meresankh)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서자 출신을 희석하고 정당성을 높이고자 후니 왕의 배다른 딸인 헤테페레스(Hetepheres) 즉, 본인의 이복누이와 결혼하게 된다. (헤테페레스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훗날 쿠푸 왕임) 마네토는 스네프루가 왕실의 다른 계통 출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의 왕 목록에서 별도의 왕조로 구분하였다.
[토막 상식]
이집트의 실증적 기록 이집트 문명이 역사가 되려면 실증적 기록이 기반돼야 하는데, 역사학자들은 이집트 제1왕조 ~ 제5왕조까지는 멤피스에서 발견된 팔레르모 비석 (Palermo Stone)의 연대순 왕실 사건 기록을 주로 인용한다. 또한, 기원전 3세기 신관이었던 마네토(Manetho)는 이집트의 역대 왕의 목록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았고 그 기록 속에는 이집트의 가장 첫 번째 왕인 메네스(Menes)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까지 담겨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까지 마네토가 구분해놓은 이집트의 31개 왕조를 인용해서 쓰고 있다. 다른 자료로는 토리노 연대기(Turin King list)가 있는데 신왕국의 람세스 2세 때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록에는 왕의 이름, 통치 기간 등의 정보가 담겨 있다. |
스네프루는 대외적인 영향력을 많이 끼쳤으며 팔레르모 스톤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배, 무덤, 궁전 문을 만드는 데 필요한 고품질 삼나무 목재를 얻기 위해 레바논(비블로스)으로 원정대를 보낸다. 아마도 목재, 도자기, 포도주, 올리브유, 과일, 건포도, 동물, 사람 등의 교환과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비블로스에는 이집트의 유물들(조각상, 석기 그릇 등)이 대량 발견된다. 팔레스타인 지역(가나안)과도 비블로스를 통해 활발히 교역하였으며 이집트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특유의 빗살무늬 토기가 대량 발견된다. 간접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와는 은(Silver) 교역을 하였으며, 자그로스산맥의 동쪽에서 나는 청금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메소포타미아 문명을(우르 제1왕조가 이름을 떨치던 시기) 거쳐서 이집트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시나이반도의 시나이 산에는 스네프루와 전쟁을 벌인 베두인 부족민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이곳에서 광물을(구리, 터키, 공작석) 캐는 이집트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또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리바아(이집트의 서쪽)와 누비아(이집트의 남쪽)로 군사 원정을 보내어 많은 양의 사람과 소를 데려왔고 최대 누비아의 제2급류 근처까지 진출한다. 누비아의 경우, 이집트 초기왕조 때부터 주요 건축 공사와 질서 유지를 위한 인력(군인, 노예, 메자이)들이 보충되는 일종의 공급처였다.(반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또한, 누비아 원정은 흑단, 상아, 향, 이국적인 동물, 타조알, 표범 가죽과 같은 아프리카 제품의 무역 경로를 지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고, 와디 알라키(Wadi Allaqi, 아스완의 남부의 현재는 말라버린 강)에서 나일강까지 누비아 사막 전역에 위치한 금광과 아부심벨 서쪽의 섬록암 채석장과 같은 특정 원자재의 공급처를 통제할 수 있었다.
[토막 상식]
이집트 전역의 원자재 종류
출처: http://www.narmer.pl/dyn/03en.htm |
그의 내부 정책은 왕족과 왕실의 유지를 목표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궁정에 있던 고위 관리들과 귀족들 중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의 가족이었다. 그는 또한 귀족들이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습지 경작을 촉진하기 위해 토지 소유권을 재조정하기도 했다. 스네프루는 재임 중에 3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네프루의 피라미드>
- 메이둠 피라미드(Meidum pyramid): 이 피라미드의 건설은 제3왕조의 마지막 왕 후니(Huni)였다고 추정되어 왔으나, 후니의 이름은 메이둠 피라미드 안이나 근처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 기념물이 그를 위해 지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피라미드의 이름이 'Snefru Endures' 라는 사실과 피라미드를 둘러싼 마스타바 중 어느 것도 제4왕조 초기보다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스네프루의 여러 아들이 그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도 미루어 보아 피라미드가 제3왕조의 끝이 아니라 제4왕조 초반에 만들어졌음을 확인시켜 준다. 최근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스네프루는 재위한지 15년이 채 되기 전에 이 피라미드를 지은 뒤 그 자리를 버리고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다슈르(사카라의 남쪽에 있음)에 새로운 왕족 묘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추정된다. 확실한 것은 스네프루가 그의 통치 중 어느 시점엔가 원래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삼각뿔 형태의 피라미드로 변형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형태는 아니다. 오직 남은 것은 잔해더미 위로 솟아오른 3단 탑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기존의 계단형 피라미드에서 실제 피라미드로 변환되는 동안 추가된 외부 케이싱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전체적인 구조가 무너졌다고 가정한다.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기존에 설계했던 것 대비 피라미드의 크기가 커질 것을 예상 못 한 나머지 피라미드를 지지할 암석층의 넓이가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피라미드의 내부 기초는 바위 위에 단단히 세워진 반면, 외부의 케이싱은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모래를 그 기초로 삼아야 했고 오랜 세월이 지나 침식작용으로 이해 모래 기초 위에 세워졌던 케이싱은 무너진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인부들이 실제로 피라미드의 붕괴를 목격했다면 남겼을 도구나 장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시간이 지난 어느 시점에 무너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미완성된 신전과 기타 구조물이 메이둠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피라미드 단지가 결코 완성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며 피라미드가 아직 건설 중이었을 때 초기에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이기에 단지를 전부 완성시키기 전에는 무너진 것이 맞다고 본다. 스네프루는 자신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어서 다슈르에 새로 짓는 두 개의 피라미드는 조금 더 완성된 형태를 띠게 된다. (다슈르로 옮긴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추정됨)
- 굴절 피라미드(Bent pyramid): 이 피라미드의 위쪽 절반이 아래쪽 부분보다 낮은 각도로 지어져 매우 특징적인 굴곡을 형성하기에 굴절 피라미드라는 이름을 얻었다. 위치는 왕가의 네크로폴리스인 사카라의 남쪽에 위치한 다슈르(Dashur) 이다. 스네프루는 메이둠 피라미드를 미완성한 채 포기하고(완성 전 무너졌을 것) 새로운 디자인을 다슈르에서 시도한다. 구부러진 피라미드의 안쪽 중심부에는 경사가 약 60°인 피라미드로 시작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하지만, 이 피라미드의 설계자는 불안정한 지하 모래로 인해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피라미드의 전체적인 경사를 54°27'44"를 가진 케이싱으로 둘러싸았다. 이것이 오늘날 서 있는 굴절 피라미드의 하단부에 대한 경사다. 불행히도, 그때 당시 사용된 피라미드 건축 기술의 한계로 인해 이 각도를 유지한 채 끝까지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또한, 피라미드가 자체 무게로 인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였기에 피라미드의 경사를 건물 중간쯤에서 43°22'로 낮췄다. (4개의 경사면 중 하나는 심지어 오른쪽으로 휘어 있다) 스네프루가 마지막으로 지은 붉은 피라미드의 건설 시작은 굴절 피라미드가 완성되기 전에 착수했으며, 붉은 피라미드의 각도는 굴절 피라미드의 윗부분과 정확히 같은 43°22'의 경사를 가지고 있다. 완성된 상태에서 이 피라미드의 밑면 길이는 188m, 높이는 105m이다.
- 붉은 피라미드(Red pyramid): 다슈르의 남쪽에서 굴절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동안 직면하게 된 심각한 구조적 문제로 인해 스네프루는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또 다른 피라미드를 건설한다. (본인은 이곳에 묻힘) 겉면을 감싸고 있던 석회암 케이싱이 벗겨져서 붉은 사암이 눈에 띄기에 이름을 붉은 피라미드(Red Pyramid)라 부른다. (고대 이집트 이름은 ' The Shining One '이었다. --> 석회암 케이싱이 빛을 반사해 빛났기 때문) 입구는 피라미드의 북쪽 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피라미드의 동쪽 면에 세워진 예배당은 아마도 스네프루가 죽은 이후에 서둘러 완공되었을 것이다. 스네프루가 이 피라미드에 묻혔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지만 매장실 내부에서 발견된 인간 유해 조각이 그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대영박물관으로 보냈지만, 도중에 행방불명) 제6왕조 페피 1세(Pepi I)의 통치 기간 동안 이 피라미드는 남쪽의 굴절 피라미드(Bent Pyramid)와 함께 하나의 영지로 간주되었다.
스네프루 왕은 군사 원정과 자원의 현명한 사용을 통해 강력한 중앙 정부를 설립했고 그러한 결과물로써 3개의 피라미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이집트인들이 왕의 권위에 복종해도 큰 불만이 없을 만큼 부유했고, 평화로웠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구축해놓은 안정적이고 탄탄한 기반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인 쿠푸가 이집트의 왕으로 등극한다.
<쿠푸 Khufu>
쿠푸(Khufu)는 스네프루와 헤테페레스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쿠푸도 시나이반도의 베두인족이 터키옥 채굴을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구적인 군대를 주둔시켰다. 또한 화강암 채석장이 있던 아스완 지역을 신경 썼으며, 아부심벨 근처에서 발견된 비석과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석고 조각 일부를 통해 누비아와 팔레스타인(가나안)과의 상업적 활동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농업 혁신을 통해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자원을 투자했다. 쿠푸는 댐을 현대 헬완(Helwan) 서쪽 산에 있는 와디 게라위(Wadi Gerawi)에 건설하였고, 댐은 물 공급을 개선하여 농부와 지역 사회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업적은 기자 고원의 거대한 피라미드이다.
쿠푸의 통치 기간 동안 멤피스는 이집트의 수도로 남아 있었지만, 그는 기자에 만들어 놓은 궁전에 거주하면서 대피라미드 공사를 직접 감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국정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가족들에게 최대한의 권력을 부여했는데, 재위 기간 동안 내분을 겪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마 잘 운영됐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헤로도토스 입장에서 쿠푸의 역사는 2100년 정도 차이 날 정도로 먼 과거의 역사임) 쿠푸에 대해 백성들에게 거대한 구조물을 건설하도록 강요하며 괴롭혔던 폭군으로 묘사하였지만, 이 기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매우 부족하다.(하지만, 문자는 관료들의 수단이었기에 백성들이 무엇을 남길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대부분 왕들의 임기 순서를 잘못 배열했던 역사학자이기에 이런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헤로도토스 자체도 수 세기 동안 이집트에서 떠돌던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어불성설까지는 아닐 것이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수천 명의 노예가 20년 동안 일했다는 헤로도토스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지만(일단 노예가 아니었음), 2~2.5톤에 달하는 화강암과 방해석 덩이를 옮기고 놓는 것과 같은 노동을 매년 4개월 동안 (나일강이 범람하는 기간 동안) 농부들이 건설을 수행했을 테니 급여를 받고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쿠푸와 그의 아들 카프레의 피라미드를 기점으로 그런 거대한 피라미드는 이집트에 다시는 나타나지 못한다. 한낱 인간의 덧없는 죽음을 화려하게 꾸미고자 수십만의 고생을 제물로 삼았으니 그에 대한 저주는 수백, 수천 년을 이어졌으리라.
<기자의 대피라미드 - Great Pyramid of Giza>
다슈르에는 아버지인 스네프루의 피라미드가 있었고 쿠푸는 그보다 북쪽인 기자(Giza)에 피라미드 건설을 명령한다. 1889년 프랑스의 에펠 타워가 완공되기 전까지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인공적으로 만든 건축물 중 가장 큰 높이를 자랑했다.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하여, 높이 146미터, 바닥 길이 230미터이고, 피라미드를 건축하는데 쓰인 평균 2톤짜리 돌 블록의 개수는 230만 개나 된다. 이러한 피라미드를 설계하고 건축까지 한 것은 쿠푸의 조카이자 고관(비지어)인 헤미우누(Hemiunu)였으며 헤미우누의 아버지인 네페르마트(Nefermaat, 쿠푸의 이복형)는 스네프루의 아래에서 피라미드 건축 프로젝트를 맡은 고관이었기에 이러한 경험이 아들에게 전달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3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경험) 붉은 피라미드를 건설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대피라미드의 경사도는 51°52'으로 반듯하게 지어진다. (붉은 피라미드보다는 가파름) 대피라미드 앞 3개의 작은 피라미드들은 여왕의 피라미드로써 그의 어머니인 헤테페레스를 비롯해, 부인인 메레티테스 여왕, 헤누센 여왕이 이곳에 묻혔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직 없다. 자재, 운송, 노동, 임금지불 및 기타 작업 등에 대한 의사결정, 정보 교환 등의 정보가 담긴 서면 영수증, 편지, 일기 항목, 궁전을 오가는 공식 보고서 모두를 살펴봐도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기존에 알고 있던 여러 가설들은(측면의 경사로를 쌓아 만들었다는 가설, 내부의 경사로를 이용해 만들었다는 가설, 수력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가설) 가설이 불가능한 이유들에 대한 반박을 제대로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대피라미드의 건설 방법에 대한 비밀을 푸는 것은 아직 인류가 풀어야 하는 숙제 중 하나이다.
대피라미드에 대한 설명과 그때 당시의 모습을 간접 체험하기에는 아래 유튜브의 영상을 참고하면 좋다. -->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jyRdhYiILe0)
쿠푸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제데프레(Djedefre)가 즉위한다. 그가 어떻게 즉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자신은 리비아 출신의 여왕으로부터 태어났기에 정통성이 부족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헤테페레스 2세와 결혼하고, 본인의 이복형제인 케와브(Kewab, 메레티테스 여왕이 낳은 아들)를 살해하고 즉위했다는 설이 있다. 역사적 실체가 어떻든 그는 매우 짧은 재위 기간을 영위했고, 본인의 피라미드는 기자의 북쪽인 아부 라와시(Abu Rawash)에 미완성된 채 버려졌다. (쿠푸의 여러 딸 중 하나인 카메르넵티 1세는 훗날 카프레와 결혼 --> 근친혼)
<카프레 Khafre>
제데프레 이후 쿠푸왕과 헤누센 여왕 사이의 아들인 카프레가 즉위한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태양숭배를 중요시했다. 국제적으로는 누비아로 원정대를 보내(현재 이집트의 토시카 호수, Toshka lake) 피라미드와 신전 건설에 필요한 섬록암과 편마암을 공수하였으며, 비블로스와 활발한 교역을 펼쳤고 에블라에서 만든 방해석 꽃병도 발견된다. 지중해의 동쪽에 있는 키프로스 섬에서는 카프레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인장이 발견되기도 하며, 크레타 섬에는 카프레의 이름이 적힌 석조 용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집트 문헌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의 정책과 정부 모델을 따라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정책과 법률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업적은 기자의 2번째 피라미드와 그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이다. 그러나 쿠푸와 카프레가 어떠한 통치를 하였던, 이집트는 2개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완성함으로써 국력을 탕진한다. 헤로도토스는 전임자인 쿠푸와 마찬가지로 카프레도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 학정(虐政)을 펼쳤다고 기록한다.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로 이집트의 한계를 몸소 시험한 두 왕을 기점으로 이집트는 끝없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카프레의 피라미드 - Pyramid of Khafre>
카프레는 자신의 아버지가 묻힌 곳 근처에 본인의 무덤을 세우기로 한다. 카프레의 피라미드는 쿠푸의 피라미드보다 실제 높이는 낮지만, 고원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멀리서 보면 가장 커 보이는 피라미드이다. 카프레의 피라미드 높이는 143.5m로 아버지의 것보다 3m 정도 낮으며, 외부의 케이싱은 수 세기에 걸쳐 뜯겨나가 맨 위쪽에 일부만 남아 있다. (아버지 쿠푸의 피라미드는 위쪽에도 케이싱이 거의 없음) 내부 구조는 아버지의 피라미드보다 덜 복잡하다. 피라미드 앞에는 장례용 신전(Mortuary temple)이 있었으며 카프레의 동상은 이곳에서 출토됐다.
카프레의 피라미드에 대한 설명과 그때 당시의 모습을 간접 체험하기에는 아래 유튜브의 영상을 참고하면 좋다. -->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eG56RKEQZYg)
<스핑크스 - Sphinx>
스핑크스는 카프레의 피라미드로 가는 진입로 앞에 계곡 신전(Valley temple)과 같이 배치되어 있다. 카프레는 자신을 호루스 (이전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과 연관시켰고(그래서 카프레의 동상을 보면 목덜미를 호루스가 날개로 감싸고 있음), 스핑크스는 하르마케트('수평선의 호루스') 신으로서 왕의 이미지로 간주되었고 신성한 구역의 수호자 역할을 하였다. 스핑크스의 얼굴은 케프레 본인의 얼굴에서 따왔다고 여겨진다. 지질학적 연구에 따르면 카프레의 계곡 신전을 건설하는 데 사용된 돌들은 스핑크스 몸체의 윗부분과 동일한 돌로 판명되며, 기존에 있던 거대한 바위에서 스핑크스를 조각함과 동시에 신전 건설을 위한 돌로 채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프레가 사망하고 나서 제데프레의(Djedefre)의 아들인 바카(Baka)가 섭정으로서 이집트를 통치하지만 얼마 못가 카프레의 아들인 멘카우레가 즉위한다. 그 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바카 본인의 피라미드는 기자 고원에서 얼마 멀지 않은 자위트엘아리안(Zawyet el Aryan)에 카프레의 피라미드와 비슷한 크기로 건설하려 했으나 미완성으로 버려진다.
<멘카우레 Menkaure>
바카에 이어서 즉위한 멘카우레는 카프레와 카메르넵티(Khamernebti) 1세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었다. 대외적으로 멘카우레의 이름은 레바논, 키프로스 섬, 북서부 아나톨리아,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 밖 멘카우레의 업적은 기자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 외에는 남겨진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 문헌상의 멘카우레에 대한 평가는 선대의 왕들(쿠푸, 카프레)보다는 평가가 좋았다. 멘카우레도 마찬가지로 그의 피라미드를 기자에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민중의 불평불만을 고려해 피라미드의 크기를 결정하였다. 멘카우레는 본인의 여동생인 카메르넵티 2세와 결혼하고 아들을(쿠엔레) 낳는데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쿠푸 왕가의 근친혼이 3~4대에 이르는 이 시기는 열성 유전에 의한 동형접합 때문에 유전적으로 취약한 자식들이 나오는 시기라 오래 살지 못했다고 판단됨)
[토막 상식]
근친혼: 고대~근대까지 왕실의 대를 잇기 위해 행하는 근친결혼은 초기에는 문제가 발현되지 않지만, 후대에 발현돼서 문제를 일으켰다. 근친혼에 의한 유전병은 열성 유전에 의한 동형접합 때문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발현되려면 3~4대 이상 지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쿠푸 왕가의 3~4대를 포함한 이집트의 왕가, 합스부르크 왕가는 동형 접합에 의한 열성 유전병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가계도이다. 근친혼은 외부 권력의 유입을 막고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확실한 수단이었으나,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다. |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 Pyramid of Menkaure>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와 단지는 쿠푸와 카프레의 것에 비해 크기(높이 65m, 바닥 길이 108m)와 규모가 작으며 이는 이집트 고왕국의 국력이 쇠락했음을 의미한다. (기자 고원의 암석 지대 대부분을 쿠푸와 카프레가 썼기에, 멘카우레가 쓸만한 암석 지대가 많이 남지 않기도 했다) 이집트의 국력이 쇠락하는 것은 멘카우레 본인도 잘 알고 있었으니 본인의 무덤 규모도 획기적으로 줄여버린다. 본인이 속으로 규모를 늘리고 싶었어도 여론이 좋지 않아 백성들의 희생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할 수 없었을 것이다. 멘카우레는 본인의 피라미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그래서 그의 피라미드는 멘카우레의 아들인 셰프세스카프(Shepseskaf)가 완성한다. 셰프세스카프는 멘카우레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다.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에 대한 설명과 그때 당시의 모습을 간접 체험하기에는 아래 유튜브의 영상을 참고하면 좋다. -->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SG5V8SFK-Ik)
멘카우레의 첫 번째 아들인 쿠엔레(Khuenre)는 (카메르넵티 2세와 결혼하고 낳은 아들) 어린 나이에 요절하기에, 멘카우레의 다른 아들인 셰프세스카프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셰프세스카프도 4년간의 짧은 재위 기간을 영위했으며 본인의 무덤은 피라미드 형식으로 짓지 않았고, 사카라에 마스타바 형식으로 짓는다. 사카라로의 복귀는 기자의 쿠푸와 카프레의 억압적인 정치에 대한 거리 두기로 해석되지만 실제로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유효한 증거는 없다.
마네토의 왕 목록을 인용하자면, 짧은 생을 산 셰프세스카프를 이어서 제데프타(Djedefptah)가 왕위를 잇는다. 하지만 제데프타의 존재의 증거 자체가 모호하기에 허구라는 의견도 있다. 그가 셰프세스카프의 아들인지, 아니면 셰프세스카프의 딸인 부네페르(Bunefer)와 결혼한 다른 가문 출신의 사람인지는 불명확하지만, 확실한 것은 제데프타도 매우 짧은 시간만 재위하고 제5왕조의 초대 왕인 우세르카프(Userkaf)에게 이집트 왕위가 넘어간다.
[토막 상식]
이집트 제4왕조
출처: http://www.narmer.pl/dyn/04en.htm |
마무리
보통의 고대 국가라면 나라가 부강할 때 보통 군대를 양성하고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며, 주변 지역의 위협이 될만한 나라들과 전쟁하느라 바빴겠지만 이집트는 지리적인 특성상 내부 기강만 잡으면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축적된 국력은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로 나타난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식량과 건축자재의 수송, 석재를 채굴하고 현장으로 운반, 숙련된 기술자와 노동자를 운용하는 행정조직이 현대 못지않게 갖춰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약 100년간 전체 국력의 4분의 1을 건설 프로젝트에 투입하게 되면 그 어떠한 왕국도 버티지 못한다. 우리는 고왕국 시기의 왕들이 비정상적으로 투자한 국력 덕분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써 피라미드를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에 담긴 백성들의 고혈(膏血)과 한낱 인간이 내리는 정치적 결정의 수준을 통해 인치(人治)의 한계가 같이 비쳐서 안타깝다.
다음 Part는 이집트 고왕국의 후반부인 제5~6왕조와 함께 제1중간기에 대해 다뤄보겠다.
<참조한 서적>
- 고대 문명의 이해(브라이언 M.페이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03.16.)
-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1(수잔 와이즈 바우어, 이론과실천, 2007.10.01.)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262471226
서남아시아의 기원전 2,600 ~ 2,500년 세력 변화 지도
<기원전 2600년>
<기원전 2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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