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5 - 메소포타미아 문명 (수메르: 우르 제3왕조)

 

수메르인이 고토(古土)를 수복하고 다시금 활기와 번영을 되찾게 된 '우르 제3왕조' 시기를 신 수메르 시대(Neo-sumerian period) 혹은 수메르의 르네상스(Sumer renaissance)라고 묘사하기도 하지만, 후대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을 때 이 시기는 수메르인들의 내리막길에 존재했던 잠깐의 부흥기였다. 표음문자로서 쐐기문자는 통용되었지만 언어로써 수메르어를 사용하는 비율이 낮아지고 아카드 제국의 거대했던 영향력의 여파로 인해 단어와 이름들은 이미 아카드식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심지어 왕명도 아카드식 이름이었음) 엘리트 관료들을 아카드인으로 채우고 아카드어 사용을 강제했던 효과가 후대에도 지속됐던 것이다. 또한, 작물 생산량도 토양 염류화로 인해 초기왕조대에 비해 3분의 1수준으로 줄어든다. 그렇게 수메르 지역은 점진적으로 힘이 약해져 간다. 지도자의 안정적인 통치로 잠시 부흥하더라도, 농경 문명의 기반인 농사가 흔들린다는 것은 더 이상 제국 수준의 인구 유지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보통 이러한 시기의 끝은 외세의 침략으로 귀결되는데, 이것 또한 역사의 수많은 흥망성쇠 스토리 중 하나이니 그리 놀라울 것은 없다.

 

본격적으로 약 100년간의 수메르 부흥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 끝은 어땠는지 살펴보자.

우르 제3왕조 지구라트, 출처: Original image by Mohawk Games. Uploaded by Leyla Johnson

<메소포타미아 문명 연대표>

  • 수메르: 기원전 4,100년 ~ 2,004년

- 우루크 시대: 기원전 4,100년 ~ 3,100년

- 젬데트 나스르: 기원전 3,100년 ~ 2,900년

- 수메르 초기왕조: 기원전 2,900년 ~ 2335년

- 아카드 제국에 의한 지배: 기원전 2,334년 ~ 2,154년

- 우르 제3왕조: 기원전 2,112년 ~ 2,004년

  • 아카드: 기원전 2,334년 ~ 2,154년
  • 아시리아: 기원전 2,025년 ~ 609년

-고아시리아(Old Assyria): 기원전 2,025 ~ 1,354년

-중아시리아(Middle Assyria): 기원전 1,353 ~ 912년 

-신아시리아(Neo Assyria): 기원전 911년 ~ 609년

  • 고바빌로니아: 기원전 1,894년 ~ 539년

- 고바빌로니아: 기원전 1,894년 ~ 1,595년

- 중바빌로니아: 기원전 1,595년 ~ 1,158년

- 신바빌로니아: 기원전 626년 ~ 539년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기원전 550년 ~ 330년

 

수메르 문명: 우르 제3왕조(Third Dynasty of Ur) - 기원전 2,112 ~ 2,004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61~163p}

{김산해, 최초의 역사 수메르, 휴머니스트, 2021, 341~402p}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160~177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183~211p}

{출처: Lecture_8_ppt_Sargon & Akkadian Empire through Ur III period, Gregory Mumford, 2022}

 

Part4의 마지막 부분에서 설명했듯이 우르 제3왕조의 출현 전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는 우루크와 라가쉬가 구티족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라가쉬는 구데아의 통치하에 잠시 부상했다가 내리막을 걷고, 그러한 라가쉬가 주춤하는 사이 우루크에는 우투-헤갈(Utu-hegal)이라는 왕이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 잡는데, 그때 당시 구티족의 왕이었던 티리간(Tirigan)을 제압하고 니푸르 이북으로 몰아낸다. (구티족이 전멸한 것은 아님) 동시에 우르는 우루크의 속국이 되는데 우투-헤갈은 우르의 총독으로 우르-남무(Ur-Nammu)를 임명하고 군사도 내어준다. (우르-남무는 우투-헤갈의 동생이라는 의견도 있고, 사위라는 의견도 있음)

 

우루크의 우투-헤갈 왕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운하의 댐 공사를 하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고, 우르-남무가 반란을 일으킨 뒤 우루크로 보낸 군사들과 싸우다 전투 중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여하간 우투-헤갈이 사라지자 우르의 우르-남무 왕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맹주가 되고 우르 제3왕조를 연다. 우르 제3왕조의 각 왕들의 기록은 자세히 남아 있기에 각 왕들의 치세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나눠서 소개하겠다.

우르 3왕조 계보 (오류를 수정하자면, Shu-Sin은 Amar-Sin의 아들임)

 

<우르-남무 Ur-Nammu> 기원전 2,112 ~ 2,095년

 

우르-남무는 호전적인 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굳이 정복활동이 필요하지 않은 곳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외교술을 펼쳐 협상을 통해 지역들을 점령해 나간다. 그는 잔존해 있던 구티족을 옛 아카드 제국의 중심지(키쉬 북쪽)의 북쪽으로 더 몰아내는데 군사력과 협정을 적절히 섞는다. 구티족이 떠나간 아카드 지역 내의 분쟁(권력의 공백에는 분쟁이 있기 마련)을 평화롭게 중재하고 북서쪽 마리의 공주는 자신의 아들인 슐기(Shulgi)와 결혼시킨다. (이는 아라비아 사막의 셈족 계열 유목민인 아모리인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 아모리인들이 훗날 고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운다) 엘람과는 전쟁을 하고 엘람의 후방인 자그로스산맥의 도시들과는 동맹을 맺어 원교근공(遠交近攻)을 충실히 이행한다. (아래 지도의 분홍색 영역) 이 밖에도 우르-남무는 수메르의 맹주로서 주변 도시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 설정하기 위해 무역 증가, 부채 형성, 협상 지양, 동맹 계약, 종교 교류와 같은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한다. 이는 평화로운 상호 작용을 가능하게 했고 그 결과 양국 간 전쟁이라는 선택지는 최대한 지양하게 되었다.

 
[토막 상식]
이와 같은 모습은 세계화를 통해 각국의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많이 얽히고 교류가 많아져 자연스럽게 전쟁의 빈도가 줄어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지구촌과 비슷한 모습이다. 물론, 물리적 전쟁이 아니라 경제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적어도 민중이 국가권력 아래 총칼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은 줄어들었으니 더 낫다고 본다.

우르-남무는 이 밖에도 대내외 적으로 다양한 건설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외적으로는 수메르 내의 무역과 교통을 위한 도로를 남북으로 정비하고 8개의 운하를 새로 건설하였으며 각종 수로와 부두들을 재정비한다. 내적으로는 민심 수습을 위해 우르 주변에 성벽을 건설하였고, 달의 신 난나(수메르어로는 난나Nanna, 아카드어로는 신Sin)를 위한 신전 구역을 설정하고 신전(Ziggurat), 사제들의 숙소(Giparu), 궁전(E-nun-mah) 등을 짓는다. 난나의 신전인 지구라트는 건설의 시작이 우르-남무때지만 그의 아들인 '슐기'가 집권했을 때가 돼서야 완공된다. 우르-남무는 사르곤이 행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 하여 자신의 딸을 난나 신전의 여사제, 자신의 아들을 이난나의(우루크) 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이는 왕가와 종교 권력을 최대한 가깝게 해 정당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우르의 신전 지도
우르의 신전 전경
우르-남무 왕의 승전비
우르-남무 왕의 두상

전 세계 최초의 법전은 라가쉬의 우르카기나가 만든 법전이지만 실물이 전해지지 않아 최초의 성문법전 타이틀은 가져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법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유물에 인용되거나 적혀있는 것들로 유추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루카기나는 민중을 고리대금, 굶주림, 도둑질, 살인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자유'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로부터 약 250년 뒤, 우르-남무의 법전은 최초의 성문법전으로 총 57개의 조항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증거를 통해 밝혀낸 32개의 조항은 아래와 같다. (우르-남무의 집권 때에 만들어졌거나, 혹은 그의 아들인 슐기때에 완성됐을 것) 이와 같은 법전의 존재는 인간 유전자 내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기본적 도덕률이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 진화를 이뤄왔다는 것에 대한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초기적인 법들은 통치자가 민중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을 한 것이고 '법을 이용한 지배 - rule by law'에 지나지 않았기에, 훗날 통치자마저도 법의 지배를 받는 '법치주의 - rule of law'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법의 상태 & 인치(人治)보다는 낫기에 한 단계 진보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후대의 인간들은 '법을 이용한 지배 상태'와 '무법에 기반한 인치人治의 상태'를 오랜 기간 동안 왔다 갔다 한다. 진정한 법치주의 개념은 17세기 존 로크의 '시민정부론'에서 언급되며, 이후 공화국이 우후죽순 설립되는 시기에 기본 이념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21세기 현재는 법에 대한 존중에 앞서 인간에 대한 존중, 정의에 대한 존중을 우선시 하는 사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있다.)

 

기원전 2095년 우르-남무는 북쪽에 잔존해 있던 구티족과 전투를 벌이다 부상을 당해 전사한다.

[토막 상식]
우르-남무의 법전:
1.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면, 그 자를 죽인다.
2. 사람이 절도를 저지르면, 그 자를 죽인다.
3. 사람이 납치를 저지르면, 그 자를 감금하고 15 셰켈의 은을 물어야 한다.
4. 노예가 다른 노예와 결혼하고, 그리고 그 노예가 자유로워진다면 집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5. 노예가 다른 자유민과 결혼한다면, 그 노예는 가장 먼저 낳은 자식을 제 주인에게 바쳐야 한다.
6. 사람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다른 사람의 처녀 아내와 사통한다면, 그 사통한 남자를 죽인다.
7. 사람의 아내가 다른 사람을 원하여 잠자리를 함께 하면, 그 여자를 죽여도 된다. 허나 남자는 풀어준다.
8. 사람이 강압을 받아 다른 사람의 여자 노예와 잠자리를 함께 하면, 그 남자는 5 셰켈의 은을 물어야 한다.
9. 사람이 첫 아내와 이혼한다면, 남자는 여자에게 1미나의 은을 물어야 한다.
10. 만일 이혼할 아내가 이미 이전에 한번 이혼을 당했던 여자라면, 남자는 여자에게 반 미나의 은만 물어도 된다.
11. 만일 남자가 과부와 그 어떠한 결혼 계약도 없이 정을 통했을지라도, 그 어떠한 은도 물지 않아도 된다.
13. 사람이 주술을 벌인 혐의로 고발되었다면, 물로 정화시험을 치러야 한다. 만일 무고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를 고발한 자는 3 셰켈의 은을 물어야 한다.
14.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간음한 죄로 고발했다면, 그리고 강의 시련을 통해 아내의 무고가 입증되었다면 그녀를 고발한 사람은 은 3분의 1 미나를 갚아야 한다.
15. 예비사위가 예비장인의 집에 들어갔다면, 하지만 예비장인이 예비사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의 딸을 주었다면, 예비장인은 기존 예비사위에게 예비사위가 가져왔던 지참금의 2배를 되돌려주어야 한다.
16. 만일 (...)한다면, 그는 2 셰켈의 은을 재어 주어야 한다.
17. 만일 노예가 도시 경계 밖으로 도망쳤다면, 그리고 어떤 자가 노예를 잡아 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면, 주인은 잡아준 자에게 2 셰켈의 은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18.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쳐서 빠지게 하였으면, 반 미나의 은을 재어 주어야 한다.
19.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발을 잘랐다면, 10 셰켈의 은을 물어야 한다.
20. 사람이 난투 중에 몽둥이로 다른 사람의 갈비뼈를 부러뜨렸다면, 그는 1미나의 은을 물어야 한다.
21. 사람이 청동 칼로 다른 사람의 코를 잘랐다면, 그는 3분의 2미나의 은을 물어야 한다.
22.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빨을 쳐 빠지게 하였다면, 그는 2 셰켈의 은을 물어야 한다.
24, 만일 (...)한다면, 그가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10 셰켈의 은을 물어야 한다. 만일 그가 노예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그가 소유한 다른 것으로 대신 물어야 한다.
25. 사람의 여종이 제 여주인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무례하게 군다면, 소금 1리터로 그녀의 입을 씻도록 한다.
26. 만일 여종이 제 여주인의 권위를 빌어 행동하는 자를 때린다면, (...)한다
28. 사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위증한 것이 밝혀진다면, 그는 15 셰켈의 은을 물어야 한다.
29.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이 선서를 철회한 경우에는, 소송가액의 범위 내에서 변제를 해야 한다.
30. 만일 사람이 남의 땅을 몰래 경작하다가 고발당한다면, 그는 토지의 소유권을 거부당하고 경작물을 빼앗긴다.
31. 만일 사람이 물길을 터서 남의 밭에 홍수를 내어버렸다면, 그는 물에 잠긴 토지 1이쿠 당 3 쿠르의 보리를 물어야 한다.
32. 만일 사람이 소작 목적으로 토지를 빌려주었는데, 토지를 빌린 자가 농사를 짓지 않아 황폐하게 되었다면 그는 지주에게 1 이쿠 당 3 쿠르의 보리를 물어야 한다.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A%B0%EB%A5%B4%EB%82%A8%EB%AC%B4%20%EB%B2%95%EC%A0%84
우르-남무의 법전

 

<슐기 Shulgi> 기원전 2,094 ~ 2,047년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Shulgi_of_Ur/}

 

어린 나이에 즉위한 슐기는 즉위 후 20년간은 내치를 다지는데 집중한다. 이미 그의 아버지가 닦아놓은 훌륭한 유산이 있었기에 슐기는 이를 바탕으로 수메르의 문화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서기 학교를 직접 다닌 경험이 있었기에 글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다. 그래서 슐기 왕은 서기 학교 커리큘럼을 광범위하게 개혁하여 수메르 전체에 걸쳐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며, 본인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찬양 시를 직접 쓰기도 했다. (또한, 뛰어난 음악가로서 음악 연주의 발전을 장려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왕의 업적에는 과장이 들어가 있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슐기의 업적은 더더욱이 그렇다. 슐기는 분명 수메르를 번영으로 이끌게끔 통치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통치의 세부 사항과 관련된 문서의 대부분은 슐기의 찬양 시(A Praise Poem of Shulgi)를 포함하여 그가 기록하도록 명령한 문서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대리해 수메르와 아카드의 도시들을 통치할 총독을 배치하였고, 이들은 그 도시의 지배층 가문 출신들이었다.

 

고대에는 민심을 다잡기 위한 방법으로서 신전을 새로 짓거나 개보수하고 수호신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각 도시의 수호신은(일종의 종교) 혈연관계로 이어지지 않은 수많은 민중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르-우루크-니푸르의 신전을 재정비하거나 필요시에는 건설하였으며, 중심 세도시(우르, 우루크, 니푸르) 이외에 추가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정복 혹은 협정) 다른 도시들에는 신전을 추가로 건설하여 내치를 다진다.

 

중심 세도시를 잇는 도로는 보수하고 필요시에는 다시 깔았다. 더불어 무역상과 여행자가 여정을 하는 동안 멈추고, 쉬고, 먹고, 마실 수 있도록 길가마다(10km마다) 여관을 설립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여관 기록이며 여관 옆에는 과수원을 조성해 식량조달을 했다고 한다. 슐기는 슬하에 31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우르-남무가 그랬던 것처럼 각 도시의 제사장으로 임명하거나, 정략결혼에 동원한다.

 

왕국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그는 특정 군사 목적을 위해 특수 부대를 구성한 상비군을 창설했다. 보병은 더 이상 단순한 '보병'이 아니라 현장에서 특정 전술, 대형, 목적에 특화된 조직으로써, 징집병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전문성을 갖출 수 있었다. 슐기는 국경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상비군을 북부의 구티족에게 보내 그들을 몰아냈다. 군대를 위한 자금은 사원과 사원 단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전례 없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충당하였다. (이러한 세금을 바라Bala라고 하는데 수메르어로 순환이라는 뜻임) 이러한 과세정책으로 인해 사제들 사이에서 인기가 떨어졌을 수도 있지만 일반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생산성 없는 집단이 허비하는 국부를 국력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돌려 나라 내부의 자원이 선순환 되게끔 하였다. 또한 각지에서 지방세의 일환으로(지방세는 군 마다 Gun mada라고 부름) 가축들을 행정 중심 도시(푸즈리쉬-다간 Puzrish- Dagan)에 보냈고, 그곳에서는 가축이 필요한 곳에 재분배하거나 관리들의 봉급으로 사용하거나 가축에게서 얻는 산물을 이용해 2차 가공하여 생산물을 만들었다. (1년간 대략 소 28,000마리, 양 350,000마리) 예를 들자면, 행정 중심 도시에 들어온 수많은 양털을 이용하여 섬유 생산 전문 단지를 운영하였고 이곳에는 대략 6000명 정도의 종사자가 있었다.

 

슐기는 국가 달력을 도입하고 시간 표시를 표준화하여 나라 전체가 같은 방식의 날짜와 시간을 인식하도록 하여, 각 지역의 날짜와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계산하던 기존 방식을 대체했다. 그는 또한 시장에서의 공정한 무역을 보장하기 위해 농업 개혁을 실시하고 도량형을 표준화했다.

슐기의 조각상, 출처: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324831
슐기의 조각상, 출처: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324831

슐기 왕은 즉위한지 20년이 지나고 수메르 내부에 안정화가 찾아온 후 그는 영토 확장과 정복에 대한 야망을 내뿜는다. 이 시기부터 슐기는 그 자신을 '신'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한다. 슐기는 기세를 몰아 '데르Der'라는 도시를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메르 북동쪽에 존재했던 옛 아카드 도시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그곳의 주민들은 노예로 만들고, 가축과 물자는 강탈한다. 그렇게 슐기는 아래의 분홍 지도와 같은 영역을 갖게 된다.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 수메르는 아모리인(Amorites)으로 알려진 유목민 부족의 침입으로 인해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슐기는 아모리인들을 막기 위해 자신의 왕국 동쪽 국경을 따라 155마일(250km) 길이의 성벽을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거대한 장벽이 아니라 일련의 방어 시설과 군사 시설이였다. (아래 지도의 빨간 점선) 하지만, 이러한 시설에 방어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기에는 너무 길었고, 성벽의 양쪽 끝은 막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침략자들은 성벽 주위를 우회하는 것만으로도 우르를 침입할 수 있었다. (성벽은 슈-신때 완공된 것으로 보임)

 

슐기가 왕위를 평화적으로 그의 아들인 아마르-신(Amar-Sin)에게 물려준 것인지 아니면 살해당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슐기를 이어서 아마르-신이 집권한다. 하지만 슐기가 꽤나 장수했기에 그는 너무 늙은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고 별다른 특이점 없었고, 그의 아들인 슈-신(Shu-Sin)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슈-신은 지속적인 아모리인의 칩입을 막다가 단명하였고,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 이유는 알 수 없다. 슈-신의 아들인 입비-신(Ibbi-Sin)이 즉위한다.

[토막 상식]
아모리인: 구약성서 속 아모리인들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은 목축 유목민들을 마르투(Martu), 아카드어로는 아무루(Amurru, 서쪽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슐기의 방벽은 정주 농경 문명이 유목민에 대항해 쌓은 최초의 방벽이며 중국의 만리장성보다 2000년 앞섰다. 이들의 공격이 잦았던 시기에 레반트 지역은 EB 3기(초기 청동기 시대 3기)도 버려진다. 일부 학자들은 레반트 지역의 공동화 현상을 아모리인의 침입과 연관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반대 의견도 있으며 다른 요인으로는 내부적인 체제 붕괴, 국제 무역의 쇠퇴, 이집트인의 침입 등이 있다) 유목민인 아모리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가축화된 낙타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이전이다. 그래서 완전한 유목생활(온전히 스텝 초원에서 삶을 영위)은 불가했고 농경사회의 경계쯤에서 계절 곡물을 재배하고 유목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농경 문명보다 당연히 기동성이 좋았고, 강수량 변화에 더욱 민감했기에 작황이 안 좋은 시기에는 호전적이었다.
우르 제3왕조 영역 (시기에 대한 정보는 무시),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image/15308/third-dynasty-of-ur-c2050---1950-bce/

<입비-신 Ibbi-Sin> 기원전 2,028 ~ 2,004년

 

우르 제3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입비-신은 제국 전체에 번지는 반란과 급속히 쇠퇴하는 국력을 목도한다. 정치적 힘이 느슨했던 옛 아카드 지역의 반란을 필두로, 엘람 지역의 수사, 행정 중심 도시이자 물류 재분배 도시였던 푸즈리쉬-다간 Puzrish- Dagan, 우루크, 에쉬눈나, 씨무르, 라가쉬 등의 도시들이 더 이상 공식 문서에 입비-신의 재위 연도를 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재위 4년 만에 일어난다. 불안한 입비-신은 자신의 딸을 자그로스의 지방 도시 왕과 결혼시키고, 주요 도시의 성벽을 보수한다. 하지만, 이는 세발의 피였으며 이후로 움마, 기르수, 니푸르도 더 이상 입비-신의 재위 연도를 쓰지 않고 자국 통치자의 재위 연도를 씀으로써 독립 의지를 천명한다. (기르수와 라가쉬는 곡창지대였는데 이 지역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해짐)

 

지방 도시들의 독립을 향한 움직임은 단순 지배력의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러한 도시들이 바치던 세금에(곡물과 가축) 의존했던 제국의 존립은 위태로웠고, 물자가 들어오지 않자 경제난이 벌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황도 좋지 않은 데다가 토양 염류화로 인해 생산효율도 감소하여 각종 곡물 가격이 폭등한다.

 

우르는 기근에 고통받았고 입비-신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어 지방을 통솔하는 군 사령관들에게 많은 자율권을 준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의 매 왕조 말기마다 자주 보이니 참고) 그중 한 명이었던 셈족 출신의 이쉬비-에라(Ishbi-Erra)는 입비-신의 명을 받고 우르의 북서쪽에 있는 이신(Isin)이라는 도시에 파견을 가게 되는데, 그 목적은 식량을 구해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비-신 왕을 배신하였고 '아모리족의(=마르투족) 공격을 방어하는데 치중하느라 명을 수행할 수 없다'라는 핑계를 댄다. 이쉬비-에라는 스스로 이신왕조의 왕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그 지역을 200년간 다스리게 된다.

 

이쉬비-에라에게 배신당한 입비-신은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북쪽의 이신 왕조와 동쪽의 엘람 왕조 사이에 낀 상태가 돼버린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권력의 공백 상태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엘람은 자그로스산맥의 도시들을 연합하여 수메르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진군하지만, 이쉬비-에라 또한 아래 영토가 탐이 나기에 이들을 막아선다.

 

하지만 2년 뒤 그들이 다시 연합하여 우르를 침공했을 때, 이쉬비-에라는 그들을 막아서지 않았고 엘람 연합은 우르를 정복하였고, 입비-신은 엘람의 안샨으로 포로로 끌려간 뒤 죽임을 당한다. 때는 기원전 2004년이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cient_Near_East_2000BC.svg

마무리

그렇게 2000년에 걸친 수메르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수메르인들이 2000년간 살았던 지역은 엘람인들에 정복되고 파괴되지만 곧 이신-라르사 시대가(The Isin-Larsa period) 들어서고 대략 200년간의 지배 끝에 아모리인이 세운 바빌로니아에 의해 점령당한다. 수메르인이 이룩한 문명의 빛은 이후 셈족들의 대제국에 의해 더 발전된 형태로 퍼져나간다.

 

다음 Part는 이집트 문명에 대해 다뤄보겠다.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226509123
 

 

<참조한 서적>

  • 고대 문명의 이해(브라이언 M.페이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03.16.)
  • 수메르 문명과 역사(주동주, 종합출판범우, 2022.11.30)
  •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1(수잔 와이즈 바우어, 이론과실천, 2007.10.01.)
  • 신세계사1(쑨룽지, 흐름출판, 2020.01.20.)
  • 최초의 역사 수메르(김산해, 휴머니스트, 2021.12.27.)

 

서남아시아의 기원전 2,100 ~ 2,000년 세력 변화 지도

 

<기원전 2100년>

<기원전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