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4 - 메소포타미아 문명 (아카드 제국)

 

아카드 제국 이전까지 셈족은(오늘날 아랍어와 히브리어로 대표되는 언어를 썼던 민족) 그들만의 통일 문명을 갖지 못했다. 일부 셈족이 수메르 문명권 안에 들어가서 그들과 융화됐지만,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카드 제국 이후로 서남아시아는 줄곧 셈족이 세운 국가가 패자(霸者)가 된다. 이번 Part는 아카드 제국에 대한 내용이지만, 그간의 서남아시아 역사가 너무 메소포타미아 방면에만 치우쳐 있는 것 같아서, 메소포타미아 쪽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국가 및 세력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 개괄하고 난 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

사르곤 대왕의 청동 두상, 출처: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culture/article/king-sargon-akkad

<메소포타미아 문명 연대표>

 

  • 수메르: 기원전 4,100년 ~ 2,004년

- 우루크 시대: 기원전 4,100년 ~ 3,100년

- 젬데트 나스르: 기원전 3,100년 ~ 2,900년

- 수메르 초기왕조: 기원전 2,900년 ~ 2335년

- 아카드 제국에 의한 지배: 기원전 2,334년 ~ 2,154년

- 우르 제3왕조: 기원전 2,112년 ~ 2,004년

  • 아카드: 기원전 2,334년 ~ 2,154년
  • 아시리아: 기원전 2,025년 ~ 609년

- 고아시리아(Old Assyria): 기원전 2,025 ~ 1,354년

- 중아시리아(Middle Assyria): 기원전 1,353 ~ 912년

- 신아시리아(Neo Assyria): 기원전 911년 ~ 609년 

  • 바빌로니아: 기원전 1,894년 ~ 539년

- 고바빌로니아: 기원전 1,894년 ~ 1,595년

- 중바빌로니아: 기원전 1,595년 ~ 1,158년

- 신바빌로니아: 기원전 626년 ~ 539년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기원전 550년 ~ 330년

메소포타미아 주변 권역 - 기원전 2,500년경

줄곧 메소포타미아 중부와 남부의 수메르 문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잠깐 엘람(아완)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그 당시의 서남아시아 세계를 넓게 확대해 보자. 북쪽에는 훗날 아시리아가 되는 아슈르(Ashur, 아래 지도에서는 니네베-Ninevite의 아래쪽), 북서쪽에는 에블라와 마리, 나가르라는 도시가 있었고 레반트 지역은 초기 청동기 문화, 이집트는 고왕국, 에게해에는 미노아 문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집트와 에게 문명은 추후에 따로 다룰 예정이기에 메소포타미아 문명 북서쪽의 상황만 간략히 살펴보자.

기원전 2500년 전 서남아시아 세력도

에블라(Ebla) & 마리(Mari) - 기원전 3,000 ~ 2,300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63~165p}

 

기원전 3000년 우루크의 영향력이 쇠퇴할 때쯤 메소포타미아 북서쪽에는 2개의 도시가 들어선다. 두 도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주요 교역 루트에 세워졌다. 마리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자리 잡았고, 에블라는 유프라테스에서 지중해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이들은 모두 셈어를 썼지만 문자로는 수메르 문자를 사용했는데 대부분의 문화양식도 수메르 양식에서 비롯됐다. 에블라와 마리는 셈족 계열의 아모리족(Amorite)으로 구분되며, 훗날 아카드 제국의 힘이 약해질 때 지속적으로 남진한다.

 

<에블라 - Ebla>

에블라는 현재의 레바논과 터키 남동부 지역을 포함한 17개 도시 국가 그룹을 통제했다. 또한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보리, 밀, 올리브, 무화과, 포도, 석류, 아마가 재배하였고 소, 양, 염소, 돼지를 사육하였다. 그 외에도 은과 목재가 풍부하여 제조 및 유통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옷감, 공산품, 올리브오일이 주요 수출품이었다. 금, 은, 구리, 주석, 납을 제련하고 합금하는 금속 가공뿐만 아니라 목공업도 발달하였다. 생산 능력과 지리적 위치 덕분에 에블라는 중계 무역으로 부유해졌다. 엘람, 아나톨리아, 키프로스, 수메르, 이집트 등지에서 생산된 물건들은 에블라를 통해서 서로 교환됐다.

 

에블라의 남동쪽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있는 마리(Mari)는 에블라의 가장 큰 상업적 경쟁자였다. 때문에 여러 번에 걸쳐 에블라와 전쟁이 있었다. 에블라는 세습 왕조 성격을 띠지는 않았다. 대신에 지역의 대표 상인을 왕으로 세우고 제한된 7년의 임기를 갖고 에블라를 통치했으며, 장로회가 의사 결정을 했다.

 

에블라는 한창 번영을 구가하다가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에 의해 한번 점령되고 나람신(사르곤의 손자)의 공격에 의해 세력이 약해진다. (이렇게 첫 번째 에블라 왕국이 무너지지만 곧이어 두 번째 에블라 왕국이 다시 세워짐)

 

<마리 - Mari>

마리는 모든 수메르 도시 국가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유프라테스강 서쪽 기슭의 텔 하리리 부지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현대 시리아 국경 바로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리의 주민들은 셈족이며 유프라테스강의 홍수를 피해 4~6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관개농업과 중계무역을 위주로 번성했다. 이들은 굽이지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운하를 파서 강을 하나로 연결한 후 항로와 관개수로로써 활용한다. 하지만 기원전 2650년 이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도시를 버린다. 100년 뒤인 2550년 새로운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운하를 재정비하고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마리는 세를 확장하여 2500년대에는 키쉬와 연합하여 라가쉬의 에안나툼에 대항에 싸우기도 하고 주변의 라이벌 국가인 에블라와 잦은 마찰이 있었다. 기원전 2420~2360년에 들어서 이블룰일(Iblul-Il)왕의 통치 때는 에블라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세가 커졌다.

 

그러한 마리도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의 공격에 의해 세력이 약해진다. (이후 여러 제국의 작은 도시로서 명맥을 이어나감)

마리의 상상도

레반트 초기 청동기 시대 (Early bronze age) - 기원전 3,300 ~ 2,100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63~165p}

 

레반트 초기 청동기 시대에 대한 고고학적 실체는 최근에야 자리 잡혔다. 레반트 지역의 초기 청동기 시대는 총 3 단계로 나눠진다.

 

<EBI - 초기 청동기 시대 1기> 기원전 3300~3000년

사회·경제적 조직 면에서 금석 병용 시대의 수준을 넘어서긴 했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 수준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은 수준이다. 이들은 광범위한 지역에 넓게 분산되어 있었고 사회의 규모도 작았다. (선토기 문화 때의 마을 크기 수준이며 최대 20헥타르 정도) 토기는 지역적으로 독특한 스타일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스타일의 토기는 그 당시 이집트의 고위층 무덤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해상무역이 활발)

 

EB I의 끝과 이어지는 EB II의 시작은 이집트의 나카다 3기 문화에서 이집트 초기 왕조로의 전환 역사와 상당히 얽혀 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문물을 레반트 지역을 통해 접했기 때문이다. 건물을 위한 벽돌을 굽는 방법, 원통 인장, 무덤 벽의 상징, 토기 디자인, 고대 이집트 종교의 기본 형태와 같은 산물은 그 자체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이다.

(이집트의 지역 사회는 무역으로 성장하고 번성했으며 이로 인해 하&상이집트의 인구는 증가하게 되고 이러한 이권 다툼 - 무역 상품과 교역료 통제 때문에 각각의 도시들이 경쟁관계의 상태에서 서로를 공격한다. --> 그러한 도시 중 티니스의 나르메르가 초기왕조의 최초 왕이 됨)

<EBII~III- 초기 청동기 시대 2~3기> 기원전 3000~2200년

2기에 들어서는 거주하는 도시의 절대적인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적은 수만큼 한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어,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최대 25헥타르) 촘촘해졌으며 도시의 외곽은 성벽으로 둘러싸인다. 도시 내부에는 사원, 궁전, 곡물 창고 및 저수지가 마련되어 있었고 1기와 비교했을 때 모든 면에서(부지 규모 및 조직, 가구 건축, 생활양식) 한 단계씩 발전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의 도시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집권적인 형태의 권력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발달된 부족 사회(빅맨에 의한 신정사회) 정도되는 수준으로 파악된다. 미약한 수준이지만 부의 차이와 권력의 차이가 존재했기에 엘리트 계급 혹은 지배 가문이 있었고 이들은 도시 내의 공공 프로젝트 구현을 주도한다. (요새, 사원, 저수지, 곡물창고 등등) 이러한 흔적은 현재 예루살렘의 남쪽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인 텔 아라드(Tel-Arad)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기존의 토기 제작 기술이 더욱 발전하였고, 경쟁력 있던 주요 수출 품목이었으며 레반트 지역 내의 기술적 차이는 어느 정도 상향 평준화된다. 전문적인 장인 집단의 직접적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발견되는 금속 가공물과, 인장, 토기, 예술 작품을 증거로 그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레반트 지역의 요새화된 정착지(도시화)가 증가함에 따라 이집트의 고왕국이 이 지역에 끼치는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때문에 이집트 고왕국은 비블로스(Byblos)를 통해 에블라와 해상 무역을 한다. 덕분에 비블로스에서는 이집트 고왕국의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3기 때는 도시화 과정이 가속화되어 거주지가 더 커지고 엘리트 계층의 강화와 함께 부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궁전, 기념비적인 사원, 물질문화의 과시적인 요소(예: 고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대형 접시)등 사회 계층화를 보여주는 물적 증거들은 보다 더 뚜렷해진다. 하지만 레반트 전 지역에서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것은 아니고 주로 서쪽 지역에서 도시화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3기의 표지 유물로는 히르벳 케락 토기(Khirbet Kerak ware)가 있는데 이런 형태의 토기는 아나톨리아 동쪽의 트랜스캅카스 지역이 기원이기에 활발한 레반트 지역과 아나톨리아 지역의 교류 수준을 보여준다.

 

3기 이후 레반트 지역의 도시화는 역행한다. 이는 4.2ka 이벤트에 의한 서남아시아의 건조화 때문으로 해석되며 (부록 참고: https://blog.naver.com/gb145/223126809868) 대부분의 도시는 버려지고,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없기에 작은 마을 단위의 생활로 돌아간다. 이 밖에도 레반트 초기 청동기 3기 이후 쇠락에 대한 요인으로는 아모리인의 침입, 내부적인 체제 붕괴, 국제 무역의 쇠퇴, 이집트인의 침입 등이 있다.

텔 아라드(Tel-Arad)
텔 아라드에서 발견된 EBII토기
히르벳 케락 토기

아카드 제국(Akkadian Empire) - 기원전 2,334 ~ 2,154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56~160p}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akkad/}

{김산해, 최초의 역사 수메르, 휴머니스트, 2021, 294~340p, 427p}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152~159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149~182p}

{출처: 데이비드 W.앤서니, 말&바퀴&언어, 에코리브르, 2015, 591~595p}

{출처: Lecture_8_ppt_Sargon & Akkadian Empire through Ur III period, Gregory Mumford, 2022}

 

메소포타미아 중부 지역에 위치했을 것으로(시파르와 키쉬 사이 어딘가) 추정되는 도시 아카드는(히브리어로는 아가데라고 함)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훗날 아카드 제국이 구티족에 의해 멸망하면서 파괴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 아카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던 아카드 제국의 중심지였다. 아카드 제국의 존립은 기원전 2334년에서 2154년까지이지만, 기후변화와(4.2ka이벤트 서남아시아 건조화) 구티족의 침공으로 인해 제국으로서 힘은 기원전 2217년경 5대 왕 샤르칼리샤리(Shar-Kali-Sharri)때부터 서서히 잃어버리고 일개 도시 국가로 다시 돌아간 뒤 최종적으로 기원전 2154년경에 도시 아카드마저 함락된다.

 

아카드인들은 서북쪽에 있는 마리 사람들과 같이 셈족 출신이었다. 이곳은 사르곤의 통치 하에서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여 세계 최초의 다국적 국가인 제국이 되었다. 수메르 왕명표에서는 사르곤이 아카드를 건설했다고 주장하지만, 우루크의 엔-카칸차아나(En-cakanca-ana)와 루갈자게시(Lugalzaggesi)의 통치 기간 내에 아카드가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르곤은 아카드를 재건축하고 확장시켰을 것이다.

 

사르곤(Sargon)이라는 이름은 태어날 때 부여받은 이름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선택한 왕좌 이름으로써, "합법적인 통치자(Sharrum-kin)"라는 의미에서 기원한다. 이름이 합법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왕위 계승 과정에 합법성이 결여됐음을 보여준다. (왕위 찬탈)

 

아카드 제국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도시국가들의 연맹을 넘어선 최초의 정치적 통일 국가이자 제국 탄생

(2) 후대 통치자들에게 있어 제국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기준 모델이 됨

(3) 1~2천 년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수메르인들에게 있던 주도권을 북부의 셈족에게로 넘어가게 함

 

하지만, 이전 part에서 언급했듯이 수메르 왕명표는 의도적인 편집이 들어갔고 그 목적은 아카드인(셈족)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를 통해 아카드인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사르곤을 우상화하여 정복에 정당성을 부여하였으며, 후대에 우르 제3왕조 이후 아카드인이 계승하는 이씬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 때문에, 앞으로 언급할 아카드 제국에 대한 내용은 이 점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의도대로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임)

아카드 제국의 지배 영역,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image/15457/the-akkadian-empire-c-2334---2218-bce/

<아카드 제국의 설립 과정>

우루크의 루갈자게시가 이름을 떨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호령하던 시절, 사르곤은 키쉬의 왕인 우르-자바바(Ur-Zababa)의 시종장이었다. 왕에게 술잔을 드리는 직업인 시종장은 단순한 집사를 넘어서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시종장은 왕이 먹는 음식을 맛보고, 왕의 인장을 지니고 다니면서 대신 승인을 내렸으며, 왕의 접견을 통제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사르곤은 반란을 일으켜 우르-자바바를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우르-자바바 사후 키쉬의 모든 영토가 사르곤의 휘하로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사르곤은 남아 있던 키쉬의 왕을(루갈자게시의 영향을 받는 키쉬의 왕조의 왕) 정복하고 키쉬의 전 지역을 손에 넣는다.

 

그렇게 힘을 키운 사르곤은 남진하여 수메르 지역의 패자인 루갈자게시와 우루크에서 전쟁을 벌인다. 원자재가 부족한 남쪽 지역의 수메르와 달리 사르곤은 목재의 공급처를 확보하였고, 이 전까지의 메소포타미아 전쟁에서 흔치 않았던 활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수메르는 엘리트 지배층과 가난한 민중과의 간극이 커져 국력이 쇠약해져 있었고, 민족의 연합이 아닌 느슨한 도시 연맹 체제였기에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전쟁은 사르곤의 승리였고, 전쟁에서 패배한 루갈자게시는 사르곤에게 사로잡혀 쇠사슬에 목이 감긴 채 니푸르까지 끌려간다. 사르곤은 포로로 잡힌 루갈자게시에게 본인(루갈자게시)의 패배를 기념하는 비석이 건설되는 것을 지켜보게 한 후 그를 처형하였고, 그의 목은 엔릴 신전의 대문 기둥에 걸린다. 사르곤은 연이어 우르, 라가쉬를 정복하고 루갈자게시의 출신 도시인 움마 정복에 성공한다. 이후 아카드(위치가 어디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음, 수메르 북부의 어느 평원으로 추정, 지금의 바그다드 근처)를 도읍으로 정한 사르곤은 아카드 제국을 세운다. 이곳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서로 가장 가까이 위치할 수 있는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통해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사르곤의 승전비 파편
루갈자게시로 추정되는 포로, 출처: 루브르 박물관
사르곤이 정복한 영역 초기

<아카드 제국의 발전 과정>

사르곤은 지배력을 넓히는 수단으로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정복한 도시의 통치자들은 유지한 채 그들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서 그 자리를 아카드인으로 채웠다. 또한, 기록물 작성에 있어서는 아카드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한다. (문자 체계로는 표음문자인 쐐기문자를 여전히 사용, 쐐기문자가 표기해 주는 언어를 수메르어가 아닌 아카드어가 되도록 했다는 의미) 넓은 영역의 땅을 지배하기 위해 상비군을 두었으며, 수메르의 종교를 그대로 존중하고 이난나(Inanna)를 아카드의 주신인 이슈타르(Ishtar)로 삼았다. 사르곤은 그의 딸인 엔헤두안나(Enheduanna)를 달의 여신인 난나(Nanna)를 숭배하는 여제사장으로 앉혀서(우르에 앉힘) 왕가와 종교 권력을 최대한 가깝게 해 정당성을 계속해서 높이는 노력을 한다. 수메르보다 나은 관료제와 행정조직, 세금 징수 제도를 유지하였고, 제국 내에서 통용됐던 도량형을 표준화한다. 궁정에는 각 지역의 유력 가문들 대표를 불러들여 인질로 삼고 도시들을 본인의 손아귀 안에서 관리한다.

 

이러한 힘과 권력으로 사르곤은 아래로는 딜문(바레인), 마간(오만), 멜루하(인더스 문명의 영향력 아래 있던 도시들을 아카드어로 멜루하라고 함, 인더스 문명권에는 70개 이상의 도시가 발굴됨)와 긴밀한 교역을 펼치고(군사적 우위에 의한 강제력이 있었음), 엘람과 마르하쉬를 군사적으로 정복하였다. 위로는 마리, 에블라,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쪽까지 영향력을 펼친다. (북서쪽 원정은 완벽히 이 지역을 정복했다기보다는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삥뜯기 원정) 동에서 서쪽으로 긴 띄를 이룬 영향력으로 인해 각 원산지에서 나오는 물자를 이용할 수 있었다. (나무, 석재, 구리, 보석, 청금석 등)

[토막 상식]
서남아시아의 말: 기원전 3300년경 흑해 북부에서 가축화된 말은 아카드 제국 시기에 아나톨리아 동부 그리고 엘람(이란 서부)을 통해서 들어온다. 이때부터 아카드의 인장과 부조에 말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들은 말을 산(山)당나귀라고 불렀다.
사르곤이 정복한 영역 말기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영원하지 않기에 사르곤의 말년에는 주변지역의 도시들이 여러 번 반란을 일으킨다. 또한 4.2ka 이벤트로 일컬어지는 대규모 가뭄이 시작되어 기근이 자주 발생한다. (4.2ka 이벤트 설명: https://blog.naver.com/gb145/223126809868) 주변 도시가 일으킨 몇 번의 봉기는 잘 막았지만 어떤 봉기는 힘에 겨웠고 막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55~56년간 재임한 사르곤이 노쇠하여 죽자(사르곤의 나이가 70살이 넘었을 때) 그의 아들인 리무쉬(Rimush)가 즉위한다. 하지만, 지역적 반란은 리무쉬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된다.

아카드 왕들의 재임기간

리무쉬는 8년간의 짧은 재임 기간 내내 지역 반란을 막아냈다. 아답, 자발라, 우르, 라가쉬, 카잘루, 바락슘, 자하라, 엘람, 구핀, 멜루하 등의 반란을 모두 제압하고 봉기에 가담한 군주는 죽였으며 백성들은 포로 혹은 노예로 삼고 도시의 성벽은 모두 부쉈다. 그러던 리무쉬는 그의 형 혹은 쌍둥이 형제로 추정되는 마니쉬투슈(Manishtushu)에 의해 살해당한다.

 

대각선의 형태로 지중해부터 걸프만까지 영향력을 끼치던 아카드 제국은 마니쉬투슈대에 이르러 북방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북서쪽의 에블라가 무역을 기반으로 다시금 세를 키워서 지중해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았고, 산악지대의 호전적 민족인 후리족과 구티족이 북쪽과 북동쪽을 막아서 북부의 자원은 이용이 불가능해진다. 때문에 마니쉬투슈는 자원이 풍부한 남부의 마간을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가는 길목에 엘람지역의 안샨과 쉬리훔을 정복한 후, 마간과의 전쟁을 통해(아카드를 대적하기 위해 마간 지역의 32명의 왕이 연합하였지만 마니쉬투슈에게 패배함) 은과 섬록암을 확보한다. 하지만, 마니쉬투슈가 남부지역을 정복했다는 기록은 과장이라는 의견도 많다. 실제로 그는 거래 조건을 무력을 통해서 조금 더 유리하게 만들었을 뿐, 이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상호 긴밀한 무역 관계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수메르 왕명표는 아카드 제국에 유리하게 쓰여 있으며, 이러한 남부지역 확장에 대해서 마니쉬투슈의 역사를 기록한 어떤 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닌, 절대적 사실입니다!' 과연 맞을까?)

츌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cient_Near_East_2200BC.svg
서남아시아 천연자원 지도

<아카드 제국의 전성기>

 

마니쉬투슈의 아들인 나람신(Naram-Sin)이 즉위하자 수메르의 여러 도시들은 다시 한번 독립을 위해 아카드에 대항한다. 북부는 키쉬의 왕 이푸르 키쉬(Iphur-Kish)를 주축으로 북부의 각종 도시들(쿠타, 티와, 씨파르, 에레쉬, 보르씨파 등)이 연합하여 나람신과 전쟁을 벌였고 결국 패배하여 각 나라의 군주들과 지휘관&군인들은 포로로 잡히고 유프라테스강에 수장된다. 남부는 우루크의 왕 아마르 기리드(Amar-girid)를 주축으로 남부의 각종 도시들(우르, 라가쉬, 움마, 아답, 슈루팍, 이씬, 니푸르 등)이 연합하여 나람신과 전쟁을 벌였으나 마찬가지로 패배한다.

 

북부와 남부의 반란을 잠재운 나람신은 북서부의 강력한 세력인 에블라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나서고(원정 중간에 마주한 도시 국가 마리의 왕궁은 불태워 버림) 정복에 성공한다. (하지만, 정치적 지배가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음) 그 기세를 이어서 북쪽의 후리족과 수바르투(Subartu, 후에 아시리아가 될 지역을 아카드어로 수바르투라고 함) 지역을 정복하고 동쪽으로는 호시탐탐 반란의 기회를 노리던 엘람을 진압한다. 엘람의 북쪽 자그로스산맥에서 세력을 넓힌 룰루비를 정복한 후 걸프만의 마간을 다시 정복하여 섬록암을 안정적으로 확보한다. 그의 권력 규모는 텔 브라크에 있는 여러 기념비적 건물들에 묘사되어 있다. 대제국에 걸맞은 영토를 확보한 나람신도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며 영광을 누렸으나 죽음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고, 노쇠한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샤르칼리샤리(Shar-Kali-Sharri)가 즉위한다.

나람신의 세력지도
나람신의 룰루비 승전비

<아카드 제국의 쇠퇴>

 

구심점이자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던 나람신이 사라지고, 5대 왕인 샤르칼리샤리(Shar-Kali-Sharri)가 즉위하자 아카드의 국력은 지속적으로 약해진다. 서쪽은 마르투, 동쪽은 엘람과 자하라, 북쪽은 구티, 남쪽은 라가쉬가 지속적으로 아카드를 공격하였고 샤르칼리샤리는 방어에 치중했다. 그러던 와중 샤르칼리샤리는 암살당한다. 자그로스산맥의 호전적 민족인 구티족은 기세를 몰아서 엘람과 아카드 제국을 전복시킨다. (기원전 2193년) 아카드 제국은 해체되었고 일개 도시로 남게 된 아카드는 이후 무정부 상태에서 4명의(이르기기, 이미, 나누움, 이룰루)인물들 간에 권력 다툼이 있었고 6대 왕 두두, 7대 왕 슈투룰이 기울어진 아카드의 명맥만 유지하다가 기원전 2154년 구티족의 최종 공격에 의해 남아 있던 도시마저 사라진다.

 

자그로스 산악지대에 살던 구티족은 문명인이 아니었고, 문자, 명문, 조각상, 건물 그 어떤 것도 후대에 남기지 않았다. 그저 기존에 있던 문명을 종식시켰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세우지 않았다. 도시 아카드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하였기에 오늘날에도 아카드의 위치는 불분명할 정도로 호전적인 구티족은 메소포타미아 중부에 눌러 앉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까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우루크와 라가쉬는 구티족의 압박을 잘 견뎌내며 수메르의 온전한 독립을 위해 행동에 나선다.

[토막 상식]
기원전 2200년 서남아시아 기후: 4.2ka 이벤트에 의해 건조화가 진행된다. 이로 인해 이집트의 고왕국이 무너지고, 레반트 지역의 도시들은 촌락의 형태로 돌아가며, 북부 메소포타미아에는 버려지는 도시들이 속출한다. 북부의 산악지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기에 호전적인(구티족 - 동쪽, 아모리족 - 서쪽) 민족들이 남진하여 취약한 아카드 제국을 무너트린다. 다만,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상대적으로 가뭄에 견딜만한 여건이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막 상식]
더 자세한 아카드 왕조에 대한 내용은 https://www.historyfiles.co.uk/KingListsMiddEast/MesopotamiaAkkad.htm 사이트에서 참고 바란다.

 

<초기왕조부터 아카드 제국 말기까지 이어진 고질병과 그로 인한 부수효과>

 

서남아시아의 건조화는 많이 다뤘기에, 이 부분은 차치하고 후기 메소포타미아의 구조적 문제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수메르인들의 계급화와 권력의 탄생이 낳은 산물 중 하나는 압도적 국민 대다수가 소수의 비생산층을 부양하기 위해 식량생산을 했다는 점이다. 생산의 근간은 토지였고 이 토지의 소유주는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던 엘리트층이었다. (통치자, 관료, 문인, 사제, 군인 등) 생산에 가담하지 않는 엘리트층의 봉급은 땅이었고 직접 경작하거나, 임대료를 받고 소작을 주었다. 그리고 소작농은 백날 일해도 지주가 될 수 없었다. 이러한 벽으로 인해 세습화된 땅들에서 임차인, 소작인, 노예가 계속 양산되었고 확대 증가되었다. (품삯은 보리 혹은 은으로 받았다고 한다) 운이 좋지 않아 흉작이 들면 가족 전체가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가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통치자가 빚을 탕감해 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사회 내 불평등 수준이 심각해 장기적으로 효과를 주진 못했다. 돌이킬 수 없는 불평등 재생산 구조는 국력을 약하게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외세의 침략 및 환경 변화에 상당히 취약해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반대급부로 메소포타미아에는 독특한 문화가 발달한다. 농부로서는 삶의 한계가 명확하기에 비교적 자유도가 높고 진취적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전문직종과 상인 집단들이 그 예이다. 금, 구리, 은세공사를 비롯하여 목수, 상아 세공, 석재 세공, 밧줄 제작, 직물 및 제혁 업자 등 다양한 형태의 종사자가 각종 물품을 만들었다. 또한 외국과의 무역은 궁 및 신전에서 관리를 하지 않았기에 전문적인 상인 집단이 광범위한 교역망을 구축하여 무역을 수행한다. (훗날 이러한 상인 집단이 왔다갔다 하는 교역소-Trade posts를 카룸-Karum이라고 부른다) 무역에는 주로 은이 쓰이며, 은화는 딱히 없었지만 은고리가 일종의 화폐 역할을 한다.

 

수메르 문명: 라가쉬의 재건 - 기원전 2,144 ~ 2,124년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akkad/}

{김산해, 최초의 역사 수메르, 휴머니스트, 2021, 341~352p}

 

우르 제3왕조의 출현 전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는 우루크와 라가쉬가 구티족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라가쉬의 제2왕조는 기원전 2230년경부터 이어져 왔고 기원전 2164년경 그때 당시 왕인 라가쉬의 우르 바바(Ur-Baba)는 구티족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기르수를 수도로 삼고 라가쉬의 재건을 위해 힘쓴다. 그의 딸인 닌알라는 구데아(Gudea)라는 인물과 결혼하는데, 우르 바바가 세상을 떠나자 사위인 구데아가 라가쉬의 왕을 역임한다. 그는 기르수 내에 15개 이상의 신전을 건설하였고, 나라의 수호신인 닌기르수를 중심으로 21명의 수메르 신들을 기렸다. (신전 건축에는 많은 원자재가 들어가기에 인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구데아는 평화를 추구했으며 엘람과 안샨을 정벌했던 기록을 제외하고는 주변국들과 무력 충돌은 지양하고 외교술로 라가쉬의 지위를 끌어올린다. 구데아는 짧고도 긴 20년의 재위를 끝으로 사망하고 그의 사후 라가쉬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구데아의 동상

마무리

 

라가쉬의 내리막과 동시에 우루크의 걸출한 왕이 출현해 구티족 왕을 몰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다시 수메르인의 무대가 된다. 사르곤이 광활한 영토를 정복한 이후 벌였던 행동들을 보면 근대의 식민지배 정책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다음 Part에서는 우르 제3왕조에 대해서 이어나갈 예정이다.

 

<참조한 서적>

  • 고대 문명의 이해(브라이언 M.페이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03.16.)
  • 수메르 문명과 역사(주동주, 종합출판범우, 2022.11.30)
  •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1(수잔 와이즈 바우어, 이론과실천, 2007.10.01.)
  • 신세계사1(쑨룽지, 흐름출판, 2020.01.20.)
  • 최초의 역사 수메르(김산해, 휴머니스트, 2021.12.27.)
  • 말,바퀴,언어(데이비드 W. 앤서니, 에코리브르, 2015.11.20.)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218424046
 
 

서남아시아의 기원전 2,300 ~ 2,100년 세력 변화 지도

 

<기원전 2300년>

<기원전 2200년>

<기원전 21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