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7 - 이집트 문명 (초기왕조: 제1~2왕조)

 

이집트 문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문명 바깥의 지역을 변두리라고 생각하는 흔한 오류를 조정하고자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어린 시절에 내가 갖고 있던 선입견이었다. 왜냐하면 세계사 책의 대부분은 기원전 3000년~1000년 우리가 흔히 주요 문명이라 부르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문명을 설명하고 일부 책은 올멕, 안데스 문명을 추가로 언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바로 다음 그리스-로마 이야기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기원전 2000년 이후 인류사의 심장과도 같은 유목 민족사 혹은 중앙유라시아사는 설명이 매우 부족) 그렇기 때문에 그때 당시의 단견으로 이러한 문명 이외의 지역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거나 인구 밀집도가 매우 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문명을 이룩한 지역의 범위 바깥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며 단지 그들의 행적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유물과 문자) 부족하기에 언급하기 어려운 것뿐 유전학적으로 전혀 다를 것이 없었고 행동 양식도 그러하다.

[토막 상식]
대신 정주 문명과의 차이점이 있었다면 그들은 끊임없이 이동하였다. (유목 & 이동 농업) 훗날 다시 다루겠지만, 이들의 이동이 있었음을 머릿속에 고려해야만이 인도-유럽어족이 어떻게 퍼져나갈 수 있었는지, 아나톨리아 반도의 히타이트가 왜 무너졌는지, 그리스의 암흑시대를 누가 야기한 것인지, 메소포타미아의 청동 기술이 어떻게 황하 문명까지 전달된 것인지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오류를 조정하려는 이유는 아래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인류는 문명에 속해서 살든지 문명 이외 지역에 거주하든지 간에 시기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부분이 매우 유사하게 아래와 같은 패턴으로 '작은 집단 -> 초기적 형태의 국가'를 만들어 나간다. (다만, 유목 민족은 아래의 패턴과 조금 다르며 이 부분은 추후에 다룰 예정)

 

<패턴>

(1) 독립적이던 예전의 추장 or 족장들을 정복과 강압(군사적 힘), 포섭과 영입, 외교를 통해 왕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체제에 통합시킴

(2)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왕과 귀족) 친족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위계 서열상 상위에(제사장, 족장, 족장의 외척) 위치하게 만든 후 피지배 계층을 향한 권력을 행사, 친족 네트워크들 끼리는 이익을 배분.

(3) 집단 내의 소모적 내부 경쟁을 피하기 위해 지배를 제도화함 (유력 지주의 땅을 빼앗아 국가의 것으로 귀속, 보호비 명목의 돈을 세금과 공물로 바꾸어 징수, 신의 뜻에 따르는 왕을 자처하고 왕이 직접 국가 의례를 관장)

(4) 시간이 흐르면서 군대, 사법, 종교의 최고 권한은 엘리트 집단이 장악하고, 효율적 통치를 위해 관료제 도입

(5) 종교와 문화가 융합하여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주민들을 최대한 더 끌어들여(정복 전쟁) 영토를 확장

 

이렇게 모두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 이유는 인간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에너지를 최대한 적게 쓰면서 생존과 번식이라는 무의식적 법칙을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은https://m.blog.naver.com/gb145/223165968860를 참조 바란다) 다만, 문명의 테두리 안에서는 유물과 문자의 도움으로 인해 이러한 패턴을 조금 더 선명하면서도 해상도 높여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때문에 역사책은 이해의 편의를 위해 문명의 이야기 더 많이 싣는다) 이집트 문명의 특장점은 여기서 발휘된다. 기록유물의 양이 상당한 이집트 문명은 위에 언급한 패턴들이 더욱 잘 드러나는 지역 중 하나이기에 다른 지역에서는 어떠했는지 대략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집트의 초기왕조에 대한 내용을 시작으로, 이집트가 어떤 패턴을 그리면서 걸어왔는지 살펴보자. (2~3개의 Part에 걸쳐서 초기왕조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000년인 이집트 제1중간기까지 살펴볼 예정) 초기왕조는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왕들에 대해 모두 다룰 예정이지만 고왕국부터는 주요 왕을 위주로 기술할 예정이다.

출처:  https://www.wallpaperflare.com/pharaoh

이집트의 초기왕조 이전에 존재했던 신석기 문화와 이집트 선왕조에 해당하는 나카다 문화 관련 내용은 이미 정리해 놓은 글이 있으니 아래 링크를 참조해 이해의 폭을 넓히길 바란다. 더불어, 그 아래에는 이집트 문명의 연대표와 간략한 특징을 적어 놓았으니 대략적인 얼개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집트 문명 연대표>

 

*리버풀 대학 영국의 이집트 학자 Ian haw가 2000년대에 재정립한 이집트 연대 순을 따름.

**강력한 중앙 정부가 있었던 시대는 왕국이라고 하고, 분열되거나 중앙 정부가 없었던 시대는 중간기라고 함.

 

  • 이집트 초기왕조 이전:기원전 6,000년 ~ 3,100년 (신석기시대) 
  • 이집트 초기왕조[제1~2왕조]: 기원전 3,100년 ~ 2,686년 (국가의 기반 확립)
  • 이집트 고왕국[제3~6왕조]: 기원전 2,686년 ~ 2,181년 (전제적 왕권의 등장, 이집트의 제도적 경제적 예술적 전통 정착) 
  • 이집트 제1중간기[제7~10왕조]: 기원전 2,181년 ~ 2,040년 (정치적 혼란과 해체) 
  • 이집트 중왕국[제11~12왕조]: 기원전 2,040년 ~ 1,783년 (분열된 이집트 재통일, 문화적 성장 및 주변국과 교류 확대) 
  • 이집트 제2중간기[제13~17왕조]: 기원전 1,783년 ~ 1,550년 (힉소스인의 영향력 확장과 감소) 
  • 이집트 신왕국[제18~20왕조]: 기원전 1,550년 ~ 1,069년 (이집트의 제국 시기)
  • 이집트 제3중간기[제21~25왕조]: 기원전 1,069년 ~ 664년 (리비아-이집트계 소왕국들과 도시들의 군웅할거)
  • 이집트 말기왕조[제26~31왕조]: 기원전 664년 ~ 332년 (페르시아;아케메네스제국에 의한 지배, 27 & 31왕조)
  • 알렉산드로스 제국[헬레니즘]: 기원전 332년 ~ 323년 (알렉산더의 이집트 정복)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헬레니즘]: 기원전 305년 ~ 30년 (알렉산더의 휘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배 -> 이후 로마 제국의 속국)

 

초기왕조(The Early Dynastic Period) - 기원전 3,100 ~ 2,686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92~199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99~109p}

{출처: Lecture 7 - Early Dynastic Egypt: Dyns.0-2 © Notes & images compiled by Gregory Mumford 2023}

 

이집트 초기왕조는 제1왕조에서 제2왕조까지를 일컫는다. 초기왕조는 추장 사회가 국가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단계였다. (선행 단계로서 강압적 군사력에 기반하여 주변 지역의 부족장과 추장을 하나의 패권 세력 아래로 복종하게 만든 것은 이미 선왕조 때 완료) 수메르 문명에서 여러 번 다뤘지만 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수만 명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종교, 중앙집권적 형태의 권력이 필요하며 여기에는 충분한 농업 생산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집트 초기왕조는 이러한 과정으로 변모해가는 중간단계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집트의 초기왕조 시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 초기왕조 기간과 겹치며 이때 해당 지역에는 키쉬 제1왕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수메르 초기왕조 참고: https://m.blog.naver.com/gb145/223201140607)

 

이집트 제0왕조(선왕조) 때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농업과 레반트 지역과의 무역(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간접적 영향)으로 발전하던 하이집트와 상이집트는 무역 상품과 교역로를 놓고 경쟁관계가 되었으며, 상하이집트의 대표 노마르크들은(이집트의 각 지역을 일컫는 노모스 Nomos를 다스리는 주지사를 노마르크 Nomarch라고 함)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공격한다. 이 전쟁의 승패는 서로 여러 번 주고받았으며, 전쟁의 승리자는 지역의 교역권과 더불어 식량과 재화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확보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간다. 결과론적으로 상이집트의 스콜피온 킹 2세는 하이집트를 거의 정복하고 그의 후임자인 나르메르(Narmer)가 상&하이집트를 통일한다.

 

<초기왕조 특징>

 

수도인 멤피스에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관료주의 정부가 곧 자리를 잡고 빠르게 성장했다. 정부는 수많은 서기, 세금 징수원, 회계사, 엔지니어, 건축가를 고용했고 전문가들은 무역, 관개, 배수, 식량 유통 및 저장을 감독했다. 모든 중요한 기록을 기록하는 일을 맡은 서기들은 그림을 기반으로 한 성가신 상형 문자에서 더 빠른 상형 문자(신관문자)로 신속하게 변환했다. 그들은 나르메르 시대에 이미 널리 사용되었던 파피루스 식물의 섬유로 만든 파피루스 시트나 두루마리에 글을 썼다. 회계사와 엔지니어는 세금 징수 대상의 재산 범위를 결정하고 작물 수확량을 계산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수학 및 측량 기술을 갖고 있었고, 오늘날 365일에 해당하는 달력이 있었다. 도량형 시스템은 무역과 세금 징수를 단순화해주었고 세금 징수에 대한 효율을 높여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고: https://m.blog.naver.com/gb145/223238394848)

 

예술가와 공예가들은 사물과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표준화된 비율 격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기 전에 작가는 작업 표면(예: 무덤 벽)에 미리 결정된 크기와 간격으로 수평선과 수직선의 격자를 그렸다. 묘사되는 인물의 계급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인물은 구성의 다른 인물과 관련하여 특정 크기로 만들어졌다. 또한 각 인물은 특정 방식으로 구조화되어야 했다. 사람의 키는 특정 수의 "머리 길이"와 비례했으며 , 다리와 몸통의 비율은 정해진 값이 있었다. 이러한 법칙은 초기에 확립되었으며 장인들은 그 룰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도자기와 석조 기술은 고도로 발전했다. 지붕 들보, 장선, 삼나무로 만든 커다란 문이 그 증거 중 하나인데, 이는 이집트에서 북동쪽으로 200마일 이상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있는 레바논과 지속적인 무역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참고로, 레바논의 국기에는 중간에 삼나무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이 지역의 특산품이다) 흑단과 상아 물품은 이집트 남쪽의 북중부 아프리카에 있는 누비아와의 무역이 잘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누비아에서 남쪽 경로를 통해 들어온 무역품은 누비아 자체와 수단, 적도 및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청금석 장식품은 이집트 상인들이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보석과 기타 사치품을 들여오는 장거리 무역망의 혜택을 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기왕조의 왕들 대부분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문제에(심각한 가뭄에 기인한) 직면해 거대한 능묘 조성에 전념할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지방을 조용하게 유지하겠다고 약속한 귀족들에게 영지, 가축, 귀중품을 수여했다. 이들 귀족들은 막대한 지역 권력과 명성을 누리며 왕조 시대 내내 반란의 씨앗이 된다. 왕들은 내부 분쟁을 진압하는 것 외에도 필요한 산업 자재와 그들이 갈망하는 사치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바빴다.

 

이집트 문명이 역사가 되려면 실증적 기록이 기반돼야 하는데, 역사학자들은 이집트 제1왕조 ~ 제5왕조까지는 멤피스에서 발견된 팔레르모 비석 (Palermo Stone)의 연대순 왕실 사건 기록을 주로 인용한다.

팔레르모 비석 (Palermo Stone)

또한, 기원전 3세기 신관이었던 마네토(Manetho)는 이집트의 역대 왕의 목록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았고 그 기록 속에는 이집트의 가장 첫 번째 왕인 메네스(Menes)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까지 담겨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까지 마네토가 구분해놓은 이집트의 31개 왕조를 인용해서 쓰고 있다. 다른 자료로는 토리노 연대기(Turin King list)가 있는데 신왕국의 람세스 2세때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록에는 왕의 이름, 통치 기간 등의 정보가 담겨 있다.

 

여기서 의문은 마네토의 기록상 첫 번째 인물인 메네스(Menes)가 이집트 초기왕조를 연 나르메르와 동일 인물이 맞는지에 대한 여부다. 일부에서는 제1왕조를 창시한 나르메르의 아들 호르-아하가 메네스라는 의견도 있지만, 상&하이집트를 통일한 역사적 상징성과 석판 속 상하이집트의 왕관을 쓴 인물이 나르메르를 가리키는 점을 감안해 메네스는 나르메르의 본명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출처: https://www.narmer.org/menes) *나르메르는 왕명

[토막 상식]
이집트 제0왕조
  • 스콜피온 킹 1세 (Scorpion king 1st)
  • 크로커다일 (Crocodile)
  • 이리 호르 (Iry-Hor)
  • 카 (Ka)
  • 스콜피온 킹 2세 (Scorpion king 2nd)


이집트 제1왕조
  • 나르메르 (Narmer) = 메네스(Menes)
  • 호르-아하 (Hor-Aha)
  • 제르 (Djer)
  • 제트 (Djet)
  • 메르네이트(Merneith)
  • 덴 (Den)
  • 아네지브 (Anedjib)
  • 세메르케트 (Semerkhet)
  • 카아(Qa'a)
  • 바(Ba) - 재위 기간이 짧고 불분명
  • 스네페르카(Seneferka) - 재위 기간이 짧고 불분명


출처: https://www.historyfiles.co.uk/KingListsAfrica/EgyptAncient.htm#Archaic%20Period, https://ancientegypt.fandom.com/wiki/Protodynastic_Period

 

초기왕조의 왕들이 통치한 기간은 기록의 부족으로 인해 정확한 연대 추정이 어려우니 통치 연대표기는 생략하겠다. 이집트의 왕하면 파라오를 떠올리지만 '파라오'라는 칭호 자체는 신왕국 시대 (기원전 1,550년~1,069년)부터 사용된다. 따라서, 그전까지는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겠다.

[토막 상식]
나르메르는 멤피스에 궁전을 세워 그것을 '페르-아(p r â, perâa)'라고 불렀으며 큰 집이라는 뜻이었다. 파라오(Pharaoh)는 바로 '위대한 거처'를 뜻하는 'p r â, perâa 에서 파생되었으며 신왕국 시대 이후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됨.
출처: https://blog.naver.com/leemsan/221890580025

 

제1왕조 - 기원전 3,100 ~ 2,890년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First_Dynasty_of_Egypt/}

 

<나르메르 Narmer= 메네스 Menes>

 

나르메르는 상&하이집트를 통합하고 멤피스로 수도를 옮겼다. 종교적 관습을 정착시켰고 도시 내부 정비와 신전 건설을 위한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이 때문에 나일강 유역 거주지들의 도시화가 증가하고 프타(Ptah)의 첫 번째 사원이 세워졌다. 헤로도토스의(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기록에 따르면 나르메르가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홍수로부터 멤피스를 보호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댐을 건설했다고 한다. (매년 댐을 보강했다고 함) 그는 나카다의 공주였던 네잇호텝(Neithhotep)과 결혼하여 자신의 통치를 확고히 하고 나카다의 집권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나르메르는 하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누비아와(상이집트의 남쪽, 현재 수단 쪽 나일강 상류에 위치해 있던 고대 문명) 가나안(레반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 나르메르의 죽음 이후, 네잇호텝은 자신의 권위 아래 이집트를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 주장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나르메르를 비롯한 후대의 왕들은 아비도스에 있는 왕실 무덤에 묻힌다. (제0~1왕조 왕들만) 그와 동시에 멤피스 남쪽의 도시 사카라(Saqqara)에도 무덤을 만든다.

 

이집트 왕들은 사카라와 아비도스에 각각 하나씩 총 두 개의 매장지를 보유함으로써 자신이 상&하이집트 모두의 통치자 임을 입증하려 했다. (무덤이 두 개이니 한 곳은 비어있을 수밖에 없는데, 초기 왕조 때는 아비도스에 진짜 시체가 묻힘)

미라화 기술은 있었으나 제1~3왕조까지는 왕들이 미라화되지 않았다. (실제 그러지 않았는지 확실치 않으나 제4왕조 관련 인물부터 미라가 발견됨) 제4왕조때 부터 본격적으로 시체 보존기술이 발전하였기에 이 시기부터는 미라화가 상류계층에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

[토막 상식]
멤피스: 이집트의 최초의 수도로 현재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나일강 서쪽 연안에 자리 잡은 도시였으며, 이집트의 여러 왕조를 거쳐 국제적인 도시로 거듭나지만, 후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쇠퇴한다.
누비아: 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나일강을 젖줄 삼아 번영했던 수단 북동부 & 이집트 남부(상이집트의 남쪽) 지역 이름이다. 현재는 이집트 남부의 아스완 지역이다. 이곳도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인해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이집트 문명과 비슷한 시기에 문명을 이룩한다. 이집트 제1왕조 때 이집트인들이 하누비아를 정복하면서 600년 넘게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된다. (하누비아 사람들은 상누비아쪽에 흡수됨) 이후 기원전 1700년경이 돼서야 상누비아 사람들은 하누비아 지역까지 세력을 넓힌다. 이집트어로 Nub은 금이라는 뜻이며 누비아(Nubia)는 금의 땅, 즉 금이 나는 땅을 의미한다.
가나안: 오늘날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이 위치한 레반트 지역의 상업 국가들을 일컬음. 이 길목을 지나야만 메소포타미아로 갈 수 있었음.
아비도스: 아비도스는 이시스가 난도질한 오시리스의 시체를 재조립하여 묻고, 오시리스가 부활한 곳이다.
사카라: 죽음의 신 소카르(Sokar)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소카르의 장소라는 뜻이다. 사카라는 이집트 초기에 네크로폴리스(죽은 자들의 도시) 역할을 한다.
멤피스 위치
아비도스 왕실 무덤(우), 출처:  http://www.narmer.pl/groby/qaab_en.htm
고대 이집트 도시 위치

<호르-아하 Hor-Aha>

 

나르메르의 아들인 호르-아하는 무역을 늘리고 누비아에서 아버지 대부터 이어오던 군사 확장 정책을 지속했으나 가나안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삼각주 서부의 사이스(Sais)에 사냥의 신 네이트(Neith)의 사원을 세웠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그는 주로 종교 의식과 사후 세계 개념에 관심이 많았으며 피라미드의 전신인 마스타바(Mastaba, 아랍어로 "직사각형의 벤치"를 뜻함)로 알려진 무덤 유형을 건설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나카다(Naqada)와 사카라(Saqqara)에서 발견되는 무덤 양식이 변하는 점은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이다. 이집트의 고대 무덤은 이러한 마스타바 형식이 점점 발전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라미드가 된다.

 

고대의 이집트 무덤 변천 과정, 출처:  http://mahru.co.kr/Archi/21367

이집트인들의 개념 속에 인간은 불안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었고 이집트의 왕은 그러한 혼돈(이스페트, Isfet)을 정리하고 질서(마아트, Ma'at)를 세울 의무가 있는 창조자의 화신이다. 그래서 왕들이 죽으면 창조자에게 되돌아간다고 믿었다. 때문에 왕들의 무덤에 심혈을 기울였고 왕은 영원 불사의 존재이기에 그의 부인과 가신들은 그와 함께 순장되었다. (이 관습은 기원전 2700년이 돼서야 없어짐)

 

호르-아하의 업적을 기록한 팔레르모 비석에는 인신공양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그는 해부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종의 의사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무릎을 꿇은 인물이 보이고 그 뒤에는 권위 있는 인물이 있다. 죄수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인물 앞에 있는데, 손이 묶인 채 칼에 찔린다. 혈액을 수집하기 위해 그릇이 그들 사이에 있다.) 이 시대의 왕들은 아직 추장의 색깔을 벗지 못하였기에 부족의 제사장, 의술을 행하는 의사의 역할도 겸했다. 호르-아하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비도스의 왕실 무덤에 묻혔다. (사카라에는 가짜 묘)

 

<제르 Djer>

 

제르는 호르-아하의 첩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궁전 건축과 군사 확장에 관심을 가졌고, 누비아와 가나안에서의 군사 작전을 통해 건축 프로젝트에 사용할 자원을 탈했다. 제르의 원정으로 인해 하누비아에서 살던 원주민은 자취를 감추고 유민들은 상누비아에 흡수된다. 제르의 기록을 담은 팔레르모 비석에는 그가 레바논 지역의 목재(삼나무) 수입, 영토 확장, 두 명의 여왕의 죽음, 궁전 건축 등 몇 가지 정치적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제르의 아내는 헤르네이트(Herneith)이다.

 

아비도스에 있는 제르의 무덤은 12x13m 크기인데, 제1왕조 무덤 중 가장 크다. 무덤은 여러 개의 작은방을 가지고 있었던 이전의 전통에서 벗어나 하나의 큰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같이 순장된 신하들의 수만 300명이었다. 아비도스(Abydos)에 있는 제르의 무덤은 나중에 오시리스의 매장지로 간주되어 특히 신왕국 시대 이후에는 숭배의 중심지이자 순례지가 된다.

[토막 상식]
왕의 군사 작전: 이집트의 왕은 모든 군사 작전을 직접 가지 않았다. 고왕국 시기의 비문을 통해 드러난 점에 의하면, 실제 전투는 아마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고 나서, 왕 대신 싸운 이들은 그 지역의 무덤이나 바위 벽면에 자신들이 거둔 승리를 새겨 후세에 전할 자격을 얻었다.
출처: 한스요아힘 게르케,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600이전, 민음사, 2023, 354p

<제트 Djet>

 

마네토의 기록에 의하면 제트의 통치 때 이집트에 기근이 있었고 코초메라고 불리는 피라미드가 세워졌다고 한다. 레반트 지역의 초기 청동기 시대 2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제트의 통치 시기에 발견되는데 이는 레반트 지역과의 활발한 교역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제트의 통치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며, 그의 아들인 덴(Den)이 너무 어린 나이라 그의 어머니인 메르네이트(Merneith)가 섭정을 맡았으니 아마도 젊은 나이에 사망한 듯하다. (메르네이트가 제르의 딸인지, 제트의 부인인지는 확실치 않음 -> 덴의 어머니가 메르네이트라는 기록만 있음)

 

<메르네이트 Merneith>

 

덴의 어머니인 메르네이트는 덴이 아직 어렸을 때 섭정으로서 이집트를 통치했다. 마네토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그녀를 언급하지 않지만 아비도스(Abydos)에 있는 그녀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은 그녀가 이집트의 여왕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녀의 영향력은 아들의 통치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비록 그녀가 스스로 통치하지는 않더라도 그녀는 확실히 왕좌에 대한 권력을 행사했다. (어린 아들의 뒤에서 섭정 역할을 하면서 권좌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은 그렇게 생소한 모습이 아니다. 앞으로 펼쳐질 약 5천 년간의 인류 역사 내내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덴 Den>

 

덴이 어렸을 때는 그의 어머니인 메르네이트가 섭정을 맡았다. 덴은 제1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된다. 그는 화려한 신전 건축물을 남겼으며, 더 나아가 국가 경제를 개선하고, 군사 정복을 통해 영토 확장 및 통치의 안정화를 이룩했다. 덴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왕관이 합쳐진 모양의 왕관을(더블 크라운) 쓴 것으로 묘사된 최초의 통치자이다.

 

통치 기간도 꽤 길어서 적어도 41년 이상 통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덴왕이 헤브-세드(Heb-Sed) 제전을 축하하는 그림이 여러 차례 발견되기 때문이다. 헤브-세드(혹은 세드 페스티벌 Sed festival)라 불리는 제전은 상하이집트의 통일을 기념하는 축제로 왕이 즉위한지 30년째 되는 해부터 시작해서 3년마다 열리는 축제이다. 이 축제를 축하하는 덴왕의 그림이 여럿 발견되는 것을 기반으로 이 왕의 제위 기간을 추정하였다.

 

그의 업적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죽은 자의 서(Book of the Dead)라고 불리는 후기 장례 매뉴얼과 신왕국의 파피루스 안에서 발견된 의학 지식들은 덴이 통치했던 시기의 유산들이다. 또한, 그의 전임자의 통치 기간 동안 위험할 정도로 강력해졌던 고위 관리들의 권력을 제한하였다. 이러한 중앙집권화는 언제나 성공적인 왕실 통치의 열쇠였다.

 

군사적으로는 지금의 레반트 지역(지금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 초기 청동기 2기 문화 사람들)과 시나이반도(베두인)에 원정을 떠나 영토를 넓혔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사원 단지와 정교한 무덤이 건설되었고 주변 지역과의 무역이 번성했다.

 

그의 무덤은 사카라와 아비도스 양쪽에 모두 존재하지만 아비도스에 있는 것이 진짜라고 판명되며, 화강암을 활용한 최초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지금까지 아비도스에 건설된 무덤 중 가장 크기가 크고 인상적인 무덤 중 하나이며, 아스완 지역의 화강암과 동부 지역에서(레반트) 얻은 나무로 만든 구조물은 그가 통치 기간 동안 이룩한 이집트의 부와 번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덴의 더블 크라운,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image/4449/den/
헤브-세드 제전을 축하하는 덴왕의 모습 , 왕은 단 위에 올라가 있으며 손에 홀을 쥐고 더블 크라운을 쓰고 있다.

<아네지브 Anedjib>

 

덴의 통치와 달리 아네지브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심지어 덴이 아네지브의 아버지인지 아니면 아네지브가 덴의 사위인지조차 확실치 않으며 그저 이러한 두 가지 설이 있다고 알고 있으면 된다. 아네지브는 하이집트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이 때문에 많이 시달렸던 것 같다. 한때는 아네지브의 후계자인 세메르케트(Semerkhet)가 아네지브가 갖고 있던 이집트의 왕좌를 찬탈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었으나 이 가설은 세메르케트의 합법적인 통치와 그의 무덤을 기록한 팔레르모 비석의 발견으로 인해 신빙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아비도스에 있는 아네지브의 무덤은 상대적으로 작고 부장품의 규모도 초라하다.

아네지브의 무덤

<세메르케트 Semerkhet>

 

아네지브와 베트레스(Betrest)여왕의 아들인 세메르케트도 아네지브와 마찬가지로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일부에서는 이 시기에 이집트에 역병이 돌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팔레르모 스톤에 그나마 남아 있는 정보로는 2년마다 과세하는 소 숫자 세기(Cattle count or shemsu-hor, 자세한 내용은 https://m.blog.naver.com/gb145/223238394848의 정부 운용 방식 참고)를 진행했고, 그의 무덤 건설을 직접 진두지휘했으며(아네지브보다는 크기가 큼), 레반트 지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도자기를 수입했다고 나온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레반트 지역의 도자기

<카아 Qa'a>

 

카아는 제1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통치자로 여겨진다. 그의 통치하에 헤브-세드가 두 번 열렸으니 적어도 33년 이상 왕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메르케트의 친척 혹은 아들로 추정된다. 팔레르모 스톤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카아는 기념비적 신전을 건설하였고(왕들 대부분 이러한 업적을 갖고 있음), 지역 축제를 주최하였으며, 레반트 지역으로부터 목재를 대규모 수입했다. (무덤 & 신전 건설에 쓰기 위함) 그의 통치 말년에는 나일강의 심각한 가뭄이 지속되어 작물 생산량이 급감하였고, 이로 인해 정치적 격변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카아도 다른 제1왕조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아비도스에 묻혔고, 26명의 신하를 순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풍습은 제1왕조가 마지막이며 그 이후 왕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카아의 사후 그의 아들들은 (각각 바(Ba), 스네페르카(Seneferka) ) 왕좌를 놓고 계승을 위한 전쟁을 벌였다. 그들의 갈등은 호텝세켐위(Hotepsekhemwy)로 알려진 또 다른 왕자에 의해 해결되었다. 호텝세켐위는 두 왕자들과의 권력싸움에서 이겼고 이어서 제2 왕조를 세운다.

카아의 비석, 출처:  https://www.penn.museum/collections/object_images.php?irn=258694

제2왕조 - 기원전 2,890 ~ 2,686년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Second_Dynasty_of_Egypt/}

 

이집트 제2왕조는 제1왕조를 종식시킨 혼란 속에서 일어섰고 전체적으로 봉기로 얼룩졌다. 이 기간의 대부분은 출처가 혼란스럽고 심지어 통치자의 날짜도 신뢰할 수 없는데, 이는 제2왕조가 되면서 낮아진 나일강의 수위(제1왕조 대비 91cm 정도 더 낮아짐)를 토대로 예상되는 혼란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집트 왕조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농경과 왕권을 유지했는데, 이러한 나일강의 축복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왕은 당연히 힘이 빠질 수밖에 없고 이는 지역 곳곳의 반란으로 귀결됐을 것이다.

 

제2왕조 시대에는 특히 누비아에서 문화 발전과 군사 확장이 계속되었지만,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간의 전쟁으로 인해 많은 통치자가 점령당한 것으로 보이며 국가는 이 기간 동안 분열되기도 했다.

 

제2왕조는 제1왕조의 '중앙 정부 설립'과 제3왕조의 '이집트 문화 통합' 사이의 가교 역할 정도로 보면 된다.

 

<호텝세켐위 Hotepsekhmenwy>

 

호텝세켐위는 국가가 불안정한 시기일 때 왕위에 올랐다. 그동안 제1왕조 대에 이룩한 것이 있었기에 왕국을 유지하는 것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영토 확장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집트의 왕가는 북부의 하이집트 지역과(특히, 부바스티스Bubastis 지역) 강한 유대 관계를 구축했고 일평생을 내부 불안을 잠재우는데 쏟았다. 이집트의 가뭄은 하이집트의 상이집트 통제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상이집트 지역의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레반트 지역에서는 꾸준히 토기들을 수입한다.

 

하이집트와의 신경전 때문인지 호텝세켐위부터는 선대 왕조가 묻히던 아비도스를(상이집트에 위치) 버리고 하이집트의 네크로폴리스인 사카라에 매장된다.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은 복도로 연결되어 매장 실로 이어지는 일련의 지하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순장의 흔적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사카라에 있는 호텝세켐위의 무덤
아비도스와 사카라의 무덤 상상도

<라네브 Raneb or 네브라 Nebra>

 

라네브는 호텝세켐위의 형제였을 것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는지 아니면 순조롭게 왕위를 넘겨받았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는 기존의 본명이었던 네브(Neb)에 태양신 라(Ra)의 이름을 추가하여 자신과 왕의 칭호를 신들과 직접 연결한 최초의 이집트 통치자이다. 호텝세켐위가 다져놓은 상하이집트의 관계 덕분에 잠깐의 평화가 있었고, 라네브는 운 좋게 그 시기에 이집트를 통치한다.

 

여신 바스테트는 (Bastet, 고양이 또는 고양이 머리를 가진 여성으로 묘사되는 신) 그의 통치 기간에 하이집트의 부바스티스 지역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집트 전역에서 바스테트에 대한 인기는 남녀 모두에게 높았다. 라네브는 사카라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나 발견된 무덤은 없다.

이집트의 고양이 신 바스테트(Bastet),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image/5342/the-gayer-anderson-cat/

<니네체르 Nynetjer>

 

니네체르의 이름은 이집트 전역에서 발견되며 심지어 누비아의 암석 비문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누비아에 대한 군사 원정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역사상 어려운 시기를 통치하였고, 이집트를 두 개의 별도 영역으로 분할하여 그의 두 아들에게 혹은 두 명의 후계자에게 맡기기로 결정한다. 니네체르는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종교 의식을 치렀으며 많은 신전들을 건설한다. 니네체르와 관련된 대부분의 활동은 멤피스 근처에서 일어났으며,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 이집트에는 다시 상당한 내부 긴장이 있었고 아마도 내전도 일어났을 것이다. (도시가 파괴됐다는 기록이 있음) 역사학자들은 니네체르 이후로 이집트는 다시 두 세력으로 나눠졌다고 본다.

헤브-세드 축제에 참여한 니네체르의 조각상

웨네그부터 누브네페르까지는 이집트의 분열 시기에 정체가 모호한 왕 들이다.

 

<웨네그 Weneg>

 

니네체르의 후계자로서 웨네그가 왕위를 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설사 웨네그가 왕이었다고 치더라도 아주 좁은 범위에 국한해서 통치가 이루어졌다. 아마도 수도인 멤피스 지역에 국한되어 왕권을 행사한 듯싶다. (웨네그의 이름은 사카라에서만 발견됨) 통치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전무하며, 웨네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세네즈 Senedj>

 

마네토(Manetho)의 이집트 역대 왕 목록에는 세네즈가 니네체르의 2번째 후계자라고 나와 있다. 웨네그와 마찬가지로 통치 범위가 멤피스에 국한되었을 것이며,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사카라에서 세네즈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누브네페르 Nubnefer>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발견되는 왕의 이름인 누브네페르는 통치 시기가 어느 왕 사이였는지 가늠이 안되지만, 웨네그와 세네즈와 마찬가지로 사카라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통치 범위가 멤피스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세트-페립센 Seth-peribsen> =? <세케미브 Sekhemib>

 

나르메르를 시작으로, 그간의 왕들의 이름에는 호루스(Horus)라는 명칭이 왕의 칭호처럼 이름 앞단에 붙었으나, 페립센(Peribsen)은 세트(Seth)라는 신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 앞단에 배치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신화 속 세트는 그의 형제인 오시리스를 죽인 동생이고, 호루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오시리스를 죽인 삼촌인 세트를 정적으로 여겼기에, 세트라는 이름을 왕명에 붙인다는 것이 조금 이상할 수 있지만, 이 시기의 세트는 그러한 부정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세트 페립센의 본명이 원래는 세케미브(Sekhemib)였다는 의견도 있으며, 기존의 이름에서 세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개인적, 종교적, 혹은 정치적)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학자는 세케미브와 페립센이 동일인이 아니라 페립센의 후계자라는 의견도 내비친다) 아마도, 페립센의 이름이 발견되는 상이집트의 주요 숭배 대상인 세트를 이름에 붙여서 하이집트의 주요 신인 호루스를 견제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페립센의 무덤은 다른 제2왕조들과는 다르게 아비도스에서 발견된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의 통치 하에 이집트의 무역, 경제, 종교 활동, 예술 분야가 번성하여 꽤나 훌륭한 왕으로 간주된다. 페립센은 이집트의 관료제를 재조직하고 읽고 쓰는 능력과 종교 활동을 장려했다.

 

페립센의 이름이 적힌 비석, 상단에 세트를 의미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카세켐위 Kasekhemwy>

 

카세켐위는 제2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페립센(Peribsen)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고, 전투에서 그를 물리친 라이벌이었을 수도 있다. 그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한 이론에 따르면 카세켐위는 페립센에게서 승리하고 합법적인 후계자로 왕위에 오른 후에 상하이집트를 다시 중앙 집권적 통치하에 두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통치 중간에 그의 이름을 호루스 세트 카세켐위 Horus Seth Khasekhemwi로 변경한다) 만약 이미 페립센(Peribsen)이 통일된 상하이집트를 통치했다면, 카세켐위(Khasekhemwy)는 그의 아들일 확률이 높다. (반대의 경우에는 찬탈자) 카세켐위는 하이집트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쪽 지역의 공주인 네마타프(Nemathap)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카세켐위의 무덤은 페립센과 마찬가지로 아비도스에 묻힌다.

 

그는 이집트 전역에 수많은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는 현대에도 히에라콘폴리스와 아비도스에서 볼 수 있다. 카세켐위와 네마타프 사이에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3왕조의 창시자인 조세르(Djoser)가 된다.

이집트 제2왕조의 마지막 왕 - 카세켐위( Khasekhemwy)

마무리

이집트의 초기왕조는 하나의 국가를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다. 농경 문명의 왕권은 안정적 작물 생산에 기반하여 나오기 때문에 작황이 좋지 않을 때는 분열이 있다가, 작황이 좋을 때는 다시 결합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가뭄은 현대의 의미로 보면 경기 불황과 같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는 무능력한 지도자가 선출되며, 전쟁이 잦아지고 패권에 대한 조정이 일어난다.

 

다음 Part는 이집트 고왕국에 대해 다뤄보겠다.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248417872

 

<참조한 서적>

 

  • 고대 문명의 이해(브라이언 M.페이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03.16.)
  •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1(수잔 와이즈 바우어, 이론과실천, 2007.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