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 초기왕조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앞선 part에서 언급한 젬데트 나스르 시기는 우루크 시대의 영향력이 줄어듦에 따라 생겨난 주변 지역의 부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종류의 변화는 비단 젬데트 나스르 지역뿐만이 아니었다. 기존의 우루크 영향력은 수 세기 동안 유지됐을 정도로 넓은 지역에 걸친 현상이었기에, 우루크의 공백은 저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다양한 문화들이 새롭게 생겨나는 계기가 된다. 우루크 영향력의 빈자리는 아래와 같이 채워진다.
- 현재 남서부 이란의 초기 엘람
- 메소포타미아 중남부의 젬데트 나스르 시기
- 메소포타미아 중남부의 수메르 초기왕조
-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우루크-니네베 5기
- 시리아&팔레스타인&아나톨리아의 초기 청동기 시대
후에 다시 다루겠지만 서로서로가 인접한 이러한 문화들은 이집트 문명 - 레반트 - 아나톨리아 - 메소포타미아 문명 북부 - 메소포타미아 문명 남부 - 이란고원 - 인더스 문명에 이르는 긴 띄를 이루면서 서로에게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위에 언급한 문화들 중 이번 part는 수메르 초기왕조에 대해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며, 나머지 문화들은 일단 이름만 언급하고 나중에 설명이 필요하다면 배경지식의 형식으로 다루겠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연대표>
- 수메르: 기원전 4,100년 ~ 2,004년
- 우루크 시대: 기원전 4,100년 ~ 3,100년
- 젬데트 나스르: 기원전 3,100년 ~ 2,900년
- 수메르 초기왕조: 기원전 2,900년 ~ 2335년
- 아카드 제국에 의한 지배: 기원전 2,334년 ~ 2,154년
- 우르 제3왕조: 기원전 2,112년 ~ 2,004년
- 아카드: 기원전 2,334년 ~ 2,154년
- 아시리아: 기원전 2,025년 ~ 609년
- 고아시리아(Old Assyria): 기원전 2,025 ~ 1,354년
- 중아시리아(Middle Assyria): 기원전 1,353 ~ 912년
- 신아시리아(Neo Assyria): 기원전 911년 ~ 609년
- 바빌로니아: 기원전 1,894년 ~ 539년
- 고바빌로니아: 기원전 1,894년 ~ 1,595년
- 중바빌로니아: 기원전 1,595년 ~ 1,158년
- 신바빌로니아: 기원전 626년 ~ 539년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기원전 550년 ~ 330년
수메르 문명: 초기왕조(Early Dynastic Period) - 기원전 2,900 ~ 2,350년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43~146p}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37, 100~105p}
{출처: Lecture_6_ppt_Jemdet_Nasr_protoliterate, Gregory Mumford, 2022}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Early_Dynastic_Period_(Mesopotamia)}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 민음사, 2019, 146~147p}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수메르의 왕조를 알 수 있는 이유는 기원전 2150~2000년(우르 3왕조에 해당) 점토판에 수메르 설형 문자로 기록된 '수메르 왕명표' 덕분이다. 수메르 왕명표는 조선왕조실록처럼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룬 것은 아니며, 이름과 재위 기간 그리고 일종의 칭호 같은 것이 적혀있었다. 특이한 점은 대홍수라는 사건을(기원전 2900년으로 추정) 전후로 전설적인 왕조와 실질적인 왕조(키쉬 제1왕조)가 나뉜다.
대홍수 이전 왕조
대홍수 이전의 왕조는 다섯 도시의 여덟 왕이 241,200년 동안 통치했다고 나와 있다. 인간의 수명으로는 말도 안 되는 길이의 통치 기간이기에 당연히 가공의 전설이며 참고로만 알아두시라.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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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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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기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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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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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룰림
알랄라가르 |
28,800
36,000 |
바드티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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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멘루안나
엔멘갈안나 두무지 |
43,200
28,800 36,000 |
라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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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시파지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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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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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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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멘두르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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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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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루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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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바르투투
지우수드라(우트나피쉬팀) |
18,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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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1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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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바람의 신이자 신들의 우두머리인 엔릴이 노동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가진 인간들을 모두 없애 버리자고 주장하지만, 물의 신이자 자비로운 신인 엔키는 이러한 계획을 지상의 왕이자 제사장인 지우수드라의 꿈에 나타나 엔릴의 대홍수 계획에 대해 알려준다. 우바르투투의 아들인 지우수드라는 미리 큰 배를 준비하고 온갖 동식물 종자를 실음 그 뒤에 대홍수가 난다. 이후 대홍수가 7일 밤낮으로 계속되었으나, 방주를 만들어 피신한 지우수드라는 살아남는다. 홍수가 멈추고 태양이 나타나자 지우수드라는 문을 열고 나와서 태양신 우투(Utu)에게 소와 양을 바치며 제사를 지낸다. 하늘의 신 안(An)과 신들의 왕 엔릴이 지우수드라에게 신처럼 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고, 지우수드라는 딜문(Dilmun)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지우수드라는 수메르어로 ‘목숨이 오래 있다’는 뜻이다.
지우수드라는 아카드어로 기록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 등장하는 아트라하시스(Atrahasis)와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과 동일 인물이다. 모두 대홍수에서 신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이와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홍수 이야기는 부록에 정리: https://blog.naver.com/gb145/223193475449)
대홍수 이후 왕조
대홍수가 실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메르 왕명표의 기록상 기원전 2900년은 대홍수가 벌어진 이후 시점이다. 이 시기쯤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중부는 우루크를 포함하여 약 최소 24개의 독립적인 도시 국가가 존속해있었다. 이들 도시는 각각 그들만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을 갖고 있었고 성곽과 성탑을 갖추고 성벽으로 도시를 방어했다. (평균적으로 약 4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 이들의 공통점이라고는 문자시스템뿐이었으며 도시 국가 간에는 갈등이 필연적이었기에 각 세력 간 동맹, 전쟁 등이 잦았다. 그래서 힘의 차이가 나는 몇몇 개의 도시 국가는 다른 소규모 도시 국가에 대해 경제적, 정치적 우위에 있었고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도시 국가 키쉬의 왕은 다른 도시 국가에 대해 어느 정도 종주권이나 지배력을 갖고 있었고, 저 멀리 라가쉬(Lagash - 키쉬에서 남동쪽으로 160km 이상 떨어져 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하였다. 평균적으로 힘 있는 도시 국가의 왕은 2개 또는 3개 이상의 다른 도시 국가에 대한 직접 통치를 행사하여 소규모이긴 하지만 작은 왕국과도 같은 형태를 취했다.
때문에 초기왕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은 국가들의 연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며, 초기왕조에 나오는 왕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 패권 도시의 왕을 의미한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마치 중국 춘추시대의 춘추오패와 같은 개념 -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
여러 도시들 중 니푸르(Nippur)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였기에, 이 도시를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남부 지역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판가름하게 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니푸르가 모시는 신은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수장인 엔릴(Enlil - 바람의 신)이었는데 남부 지역의 왕들은 니푸르를 차지하면 엔릴을 모시는 사원에 새로운 신전을 건축함으로써 자신들의 권한을 주장하고 자신을 엔릴과 연계시켰으며, 본인을 수식하는 말로 '니푸르에서 엔릴에게 선택받은'이라는 호칭을 썼다.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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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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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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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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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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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신들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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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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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A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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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릴(Enl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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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초기왕조대에는 신들의 우두머리가 되고 가장 인기가 많아짐) |
니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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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키(En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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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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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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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아(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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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후르상(Ninhurs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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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신들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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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크, 아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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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닌마(Ninmah), 닌투(Nin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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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나(N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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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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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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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Sin)*, 슈엔(Su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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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투(U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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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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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파르, 라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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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마쉬(Sham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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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나(In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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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사랑, 성,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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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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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타르(Ish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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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기르수(Ningir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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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서기,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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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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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누르타(Ninu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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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무(Nam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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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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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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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지(Dumu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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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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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무즈(Tammu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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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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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시나이반도: 태양의 나라 이집트의 입구인 동쪽은 셈족의 달신인 신(sin)의 땅이라서 시나이반도라 불린다. |
<통치 구조>
1930년대 이전 학계에서는 세속의 통치자가 신전의 대리인 정도의 역할일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오늘날 받아들여지는 통설은 조금 다르다. 도시 국가의 세속 통치자는 종교적, 세속적 의무와 역할을 모두 갖고 있었고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여 신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토지는 대부분 통치자 가족의 소유였고, 신전 또한 통치자와 그 가족의 재산이었으며, 통치자는 그 땅을 본인의 추종자에게 나눠줌으로써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통치자는 신의 이름으로 도시를 수호하였고 신의 직접적 대리인으로서 신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의례는 사제들과 공동으로 치렀다. 신전의 주요 요직도 대부분 통치자 가문 사람들이 차지하였다.
통치자는 신전을 유지하려면 상당 수준의 자원을(인적&물적) 투자해야 했지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신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기에 신전의 이름으로 대규모 땅을 관리하였고 직접적으로 농부들을 고용해서 소작하거나 노예를 통해 경작하였다. 여기서 나온 식량들로 신전을 부양했다. 신전 내 관리들에게도 지위 고하에 따라 일정량의 땅이 주어졌고 이러한 땅들은 점차 세습의 성격을 띠게 된다.
초기왕조의 후기쯤 되면 일부 도시는 종교적, 세속적 역할을 분리해서 왕은 세속적인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종교 지도자는 종교적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렇게 왕은 민중을 다스렸고, 대제사장은 그 도시의 신을 돌보았으며, 하급 사제들은 신전 구역을 돌보고 사람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었다. 궁은 왕의(루갈) 막강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고, 이러한 궁에서 판사 역할(사건에 대한 판결), 신전 관리, 전쟁 지휘, 원로회와 청년회와의 회의 등을 수행했다.
물론, 도시 국가 유적지에서 왕궁과 신전이 분리되어 발굴되는 경우가 위와 같은 경우이며 그렇지 않은 도시 국가도 있었다. 이러한 국가들은 왕이 종교지도자의 역할을 끝까지 겸임한 것으로 보인다.
도시 국가의 통치자는 보통 아래와 같이 3 종류로 나뉘었다.
(1) 엔(En) = 도시 국가 상태에서 지도자 호칭 - 군주(무리의 주인, Lord)
(2) 엔시(Ensi) = 사제를 겸한 초기 도시들의 지도자 - 총독 혹은 지사(Governor)
(3) 루갈(Lugal) = 각 도시 국가들의 패권 세력의 지도자 - 왕(King)
통치자를 제외한 나머지 계층을 좀 더 세분화해서 구분하자면 최상위에 있는 왕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는 여왕, 신의 사제, 군대, 행정/관료, 상인 및 장인 계급(숙련노동자)의 계층 구조가 존재했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비숙련 노동자(노동자)와 노예가 있었다. 노동자들은 왕, 왕비, 신전의 행정관이 분배한 식량을 통해 급여를 받았는데 대개 보리, 양모, 기름으로 구성되었다. 수입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밭에서 경작을 하고, 강가에서는 낚시를 하였다. 근로자의 성별과 지위에 따라 양곡을 지급하는 방식이 달라서 남성 근로자가 여성 근로자의 2배를 정기적으로 받고, 감독관은 부하 근로자보다 더 많이 받았고, 전문 기술자가 비숙련 근로자보다 더 많은 양곡을 받는 식이었다.
<고고학적 유물에 따른 연대 구분>
{쑨룽지, 신세계사1, 흐름출판, 2020, 242p}
초기왕조의 시대적 구분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들로 하기도 하고 주요 왕조로 구분하기도 한다. 아래는 유물의 변화에 따른 구분이다. 이번 Part에서는 왕조에 따른 연대 구분만 다룰 예정이기에 자세한 내용은 https://www.worldhistory.org/Early_Dynastic_Period_(Mesopotamia)/ 사이트를 참고 바란다. 수메르 왕명표와 고고학적 층차를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고고학적 의미에서 초기왕조 제1~2기는 남아 있는 역사적 유물의 양도 적고 불분명한 것이 많아서 수메르 왕명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초기 왕조 제2기 때 작성된 점토판은(문헌) 대부분 해독할 수 없으며, 후기쯤 되어야 왕명표에 존재하는 이름들이 조금씩 나타난다. 초기왕조 제3기는 우르 제1왕조의 시기와 겹치며 특징으로는 설형문자가 표음문자로 변했기에 이 시기에 나온 문서들은 해독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1) 초기왕조 제1기 - 기원전 2,900 ~ 2,800년
(2) 초기왕조 제2기 - 기원전 2,800 ~ 2,600년
(3) 초기왕조 제3기 - 기원전 2,600 ~ 2,350년
[토막 상식]
농경 기술의 변화: 메소포타미아의 우바이드 초창기 시기에 진흙 낫을 사용한 것은 제작이 용이한 데다 주변의 원료가 풍부했던 것도 한몫한다. 그러다 기원전 3000년 이후로 진흙 낫은 부싯돌 날이 사용된다. 쟁기도 발전되어 간단한 작대기로 토양을 긁는 수준에서 벗어나 목재로 쟁기를 만들어 더 깊이 이랑 모양을 내었다. (사람의 힘으로 끌었음) 쟁기를 끄는 데 있어 동물의 힘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후의 일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당나귀를 사용하여 쟁기를 끌었고 더 큰 힘으로 이랑의 모양을 내었기에 파종과 잡초 제거가 더 수월해진다. 출처: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 1, 민음사, 2019, 180p |
<주요 왕조에 따른 연대 구분>
키쉬 제1왕조 - 기원전 2,900 ~ 2,600년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106~109p}
수메르 왕명표에 의하면 대홍수 이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종주국 지위는 도시 국가인 키쉬가 가져간다. (키쉬는 현재 이라크 중부 바빌주의 텔 알우하이미르 Tell Al-Uhaymir 지역으로 간주되며 그 뜻은 "붉은 언덕"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동안은 키쉬의 왕(Lugal of Kish)이라는 뜻 자체가 수메르의 왕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옛날에는 이곳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이 접근하는 곳이어서 키쉬를 통제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류의 다른 도시의 관개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키쉬에는 총 23명의 왕이 있는데 이들의 통치 기간은 현실성이 없기에 (짧게는 140년 길게는 1200년간 통치) 일부만 언급하겠다. 이쯤부터 왕의 이름 중 절반은 셈족의 이름을 갖고 있다. 다른 도시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북쪽에 위치했던 키쉬는 다양한 민족들이 융합된 수메르인들조차 유목민들이 사는 땅으로 부르던 곳이었다. 이곳은 셈족의 유입이 더 거샜고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토막 상식]
더 자세한 키쉬 왕조에 대한 내용은 https://www.historyfiles.co.uk/KingListsMiddEast/MesopotamiaKish.htm 사이트에서 참고 바란다. |
키쉬의 22대 왕이었던 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도 믿기 어려운 통치 기간(900년)을 갖고 있긴 하지만, 시기는 대략 기원전 2600년으로 추정된다. (그는 동쪽의 엘람 땅을 정복했다고 나오지만, 역사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가 나오진 않았다.) 엔메바라게시는 고고학적으로 존재가 확인된 최초의 왕이며, 수메르 왕명표뿐만 아니라 투투브라는 도시에서 왕의 비문도 발견된다. 그가 니푸르에 최초의 엔릴 신전을 건설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적극적인 영토 확장 혹은 영향력 확장을 통해 북쪽의 키쉬와 남부의 다른 도시국가들을 통합할 만큼의 강력한 힘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맥락에서 엔릴 신전 건설은 민족 통합의 구심점으로 쓰기 위한 용도로 볼 수 있음)
엔메바라게시의 아들인 아가(Agga)왕은 키쉬 제1왕조의 마지막 왕인데 우루크의 왕조로부터 받은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다. 그때 당시 맞붙었던 우루크의 왕은 유명한 서사시의 주인공인 길가메시(Gilgamesh)이다. (길가메시는 우루크 제1왕조의 5대 왕) 키쉬는 길가메시와의 전쟁을 승리하기는 하지만, 바로 후에 우르의 왕 메산네파다가 일으킨 전쟁에서 패배한다. (물론, 키쉬는 그 이후 기원전 15세기까지 일반적인 도시로서 존속한다)
우루크 제1왕조 - 기원전 2,700 ~ 2,600년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111~115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89~97p}
우루크 제1왕조는 총 12명의 왕이 존재했다. 1대 왕인 메스키악가쉐르는 기원전 2800년 우루크를 통치한다. 그 당시 지역의 맹주는 키쉬가 갖고 있었기에 지역 내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무역로를 확장한다. 그러려면 더욱 강한 전쟁용 무기가 필요했고, 결국 구리보다 강한 청동을 만들 수 있어야 했다. 기본적으로 원자재가 부족한 우루크는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강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키쉬가 잡고 있었기에 남쪽의 마간(현재의 오만)과 구리(Copper)를 거래했고(곡물과 양털, 기름을 주고 구리를 바꿔옴), 더 나아가 아라비아해 넘어 멜루하(인더스 계곡)와도 면직물 거래를 하였다. 구리와 비소를 섞어 청동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주석을 섞은 것에 비해 강도도 약하고 연마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비소의 독성 때문에 기술자들이 사망에 이르러서 주석(Tin)이 반드시 필요했다. 메스키악가쉐르는 아마도 카스피해 아래쪽 엘부르즈산맥에서 주석을 구했을 것이다. (물물거래 혹은 강압적 힘에 의해)
[토막 상식]
메소포타미아의 금속 사용 역사: 기원전 5500~3000년까지는 구리를 사용하는 동기시대였다. 구리 광석의 주변에 연료(숯이나 나뭇가지)를 배치하고 가열한 뒤 식히게 되면 맨 밑바닥에 구리가 남는데, 이렇게 채취한 구리를 재가열하여 거푸집에 넣고 모양을 낸다. 기원전 3000년 이후부터는 메소포타미아 남부가 청동기 시대로 접어든다. (기원전 2900년은 청동기 뿐만 아니라 납, 은, 주석, 금 등이 모두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기) 단순 구리는 특성상 고체 상태에서도 상당히 무르기 때문에 무기로 쓸 수 없지만, 구리에 주석 혹은 비소를 10% 섞으면 청동을 만들 수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청동은 1:9 비율의 주석과 구리이다) 청동은 상대적으로 구리보다 강도가 높았고 날을 훨씬 날카롭게 만들 수 있었다. 구리광석의 생산지와 주석의 생산지가 멀리 떨어져 있던 탔에 청동의 보급은 1000년에 걸쳐서 일어난다. (이집트의 경우 기원전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 기원전 2000년 무렵에는 양가죽 풀무가 개발되어 불의 온도를 더욱 상승시킬 수 있었다. 불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좀 더 흔한 광물인 구리 황화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주석의 첨가 비율을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이 덕분에 청동 제품을 갖가지 용도로 다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철의 경우 인류는 이미 수천 년간 사용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안료로써 사용하였다. 황색 및 적색 오커, 공작석(녹색) 등은 모두 철 산화물이 포함된 광물이다. 이러한 안료들은 신체 장식 및 의례 목적으로 사용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 니켈(Ni) 5∼10%가 함유된 운철을 사용하여 만든 철기가 출현한다. 지각의 철은 대부분 수십 억 년의 세월을 거치며 대기 중의 산소로 산화된 철광석의 형태로 존재하므로 이를 환원시키는 제련 과정이 필수적이지만, 우주는 공기가 없으므로 운석 속의 철 또한 거의 산화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며 대기권을 통과하며 일어나는 강력한 기압의 압력과 고열의 열로 인해 자연스럽게 환원 과정이 일어나므로 별도의 제련이 필요하지 않다. 때문에 철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는 운철이 양질의 철을 얻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었다. 출처: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 1, 민음사, 2019, 182p' & 위키피디아 |
[토막 상식]
더 자세한 우루크 왕조에 대한 내용은 https://www.historyfiles.co.uk/KingListsMiddEast/MesopotamiaUruk.htm 사이트에서 참고 바란다. |
5대 왕으로 길가메시라는 젊은 왕이 즉위한다. 당시는 키쉬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22대 왕이었던 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가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길가메시는 키쉬와의 결전에 앞서 우루크의 성벽을 요새화하였고 그 이후 군대를 동원하여 키쉬와 전쟁을 한다. 하지만, 엔메바라게시가 재위하던 시절 길가메시가 벌인 키쉬 정복전쟁은 실패한다. (자세한 이유는 잘 모름) 엔메바라게시 사후에 그의 아들인 아가(Aga)는 키쉬의 재위를 평화적으로 물려받는다.
길가메시는 키쉬에 대한 정복 야욕을 버리지 못했고, 키쉬의 아가는 화친을 원했다. 길가메쉬는 도시의 장로들을 불러 모아 키쉬 정복 전쟁에 대해 피력하지만, 장로회는 전쟁을 반대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청년 회의체에서 다시 전쟁에 대한 의견을 낸 길가메시는 동의를 받는다. 하지만 두 번째 전쟁에서도 길가메시는 패퇴하고 만다.
키쉬와 우루크가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 국력소모를 하는 사이에 우르 제1왕조의 1대 왕인 메산네파다는 우르의 국력을 키웠다. 키쉬가 길가메시와의 두 번째 전쟁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국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고 우르의 메산네파다는 그 틈을 타 키쉬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노쇠한 메산네파다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인 메스키아난나는 우르, 키쉬, 니푸르 삼국을 지배하는 사람이 된다. 5대 왕인 길가메시 이후 후대 왕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르 제1왕조 - 기원전 2,600 ~ 2,460년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132~137p}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48~150p}
현재 이라크 남부의 텔알무카야르 지역에 옛 고대 도시 우르가 있었다. 우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도 확인이 가능한데 아브라함의 고향이 바로 우르이다. 우르의 최초 왕은 수메르 왕명표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메스칼람두그라는 왕이며 출토된 유물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 그다음 우르를 통치한 인물은 푸아비라는 인물이다. 푸아비가 메스칼람두그 왕과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메스칼람두그 왕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여왕이었다는 의견도 있고 아예 관련 없는 왕족 혹은 여사제였다는 의견도 있다. (무엇이 맞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음)
우르의 왕묘
영국의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는 우르에서 집단 무덤을 발견한다. 무덤은 2가지 종류인데 하나는 평민들이 묻힌 (대략 2000~8000명) 공동 무덤이며 이곳은 300년간 무덤으로 사용된 듯하고 시신은 구덩이 속에 돗자리로 말려있거나 진흙으로 만든 관속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부장된 유물이 별로 없었다. 다른 하나는 왕족의 무덤인데 16기가 발견되었으며 이곳에서 메스칼람두그 왕의 무덤과 푸아비의 무덤을 발견한다. (대부분의 무덤들이 이미 도굴된 상태였음)
16기의 무덤은 평민들의 무덤에 비해 모든 면에서(부, 매장지의 구조, 의식) 눈에 띄었고 벽돌과 석재로 공들여 지은 묘실과 각종 귀금속은 그들이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무덤 속 귀금속의 출처를 알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 은(아나톨리아), 금(이집트 혹은 페르시아), 청금석(아프가니스탄) 이와 같은 귀금속을 무덤의 부장품으로 넣을 수 있던 지위는 왕족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각각의 묘실 안속 시신 주위에는 (일부는 도굴당해 시신이 없었지만) 사후 세계를 충족시키기 위해 풍부한 식량과 재화가 함께 묻혔다. 안타깝지만, 인간 희생물도 물건 취급을 당하면서 시신과 함께 순장되었고 아마 장례를 치르고 나서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토막 상식]
순장: 왕과 귀족 등 권력자가 사망하여 무덤에 매장될 때 그에 종속되어 있던 사람을 함께 죽여 매장하는 장례 풍습 |
<메스칼람두그의 무덤: PG(Private grave) 755>
이 무덤(PG755)은 처음 발굴 당시, 일반 평민의 무덤보다는 크긴 했지만. 겨우 나무관 하나쯤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에 구조도 별다를 게 없어서 왕족의 무덤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구덩이의 벽면 근처에는 간단한 그릇, 도구, 무기 및 개인 장식품(금으로 만든 단검, 은 벨트, 청금석 등)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머리 근처에 순금으로 만든 반구형 그릇이 있었는데 겉면에 메스칼람두그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금색 헬멧도 같이 발견되었다. 크기가 더 큰 다른 무덤에서 '메스칼람두그 왕'이라고 쓰여진 원통형 인장이 발견되어 메스칼람두그가 왕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후기의 다른 왕묘에 비하면 순장의 흔적이 없고 규모가 작기에 메스칼람두그의 아들의 묘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름 모를 왕의 무덤: PG789>
푸아비 무덤(PG800)와 이름 모를 어떤 "왕의 무덤"(PG789)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왕실 무덤 중 가장 화려하고 보존이 잘 되어있어서 유명하다. 고고학자 울리는 이 두 무덤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측하였으나, 현재 두 무덤은 연관이 없는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PG789 "왕의 무덤"은 내부 구성이 독특하다. 무덤의 진입로는 군인 6명(구리 헬멧 및 구리 창)이 입구를 지키듯이 반듯한 자세로 발견된다. 그 뒤를 이어서는 3마리의 소가 끄는 4륜 전차 2대(실제로 발견된 인류 최초의 전차)가 발견되었고 무덤 중간에는 50구 이상의 남녀 시신이 발견된다. 이들은 대부분 수면제나 독약을 먹고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녀의 시신은 각종 장식으로 덮여있었고, 옆에는 황소 머리장식의 악기도 발견된다.
<푸아비의 무덤: PG800>
푸아비의 시신은 청금석, 홍옥수 구슬로 치장된 겉옷을 입은채 나무관대에 뉘여 있었다. 석실 무덤 안에는 보석을 포함하여 각종 장신구가 놓여져 있었고 황금 접시와 술잔, 은으로 만든 그릇이 발견되었다. 푸아비의 시신은 금으로 장식된 가발 썼으며, 손은 황금컵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시종 셋과 함께 묻혔다. 석실 무덤의 바깥에는 "왕의 무덤"처럼 진입로에 무덤 경비병의 시신이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맨왼쪽은 시녀의 시신 13구가 두 줄로 눕혀져 있고 오른쪽에는 전차와 옷상자, 시종의 시신 4구가 있었다.
추가적으로 우리가 우르의 전승판으로 알고 있는 유물은 PG779번 무덤에서 조각으로 발견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우르의 전승판에 나온 전쟁
우르의 전승판을 통해 우리는 그때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을 치렀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전승판 속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 군역을 지는 징집병이 보인다. 보병의 무장은 도끼, 자귀, 가죽 방패, 창으로 이루어졌고 구리나 청동은 귀했기에 장검은 없었고 단도를 지니고 다녔다. 통치자는 통나무 원판으로 만든 바퀴가 달렸고, 당나귀가 끄는 (가축 당나귀와 야생 당나귀의 교배종 ‘쿤가’) 전차를 타고 전장에 나갔다. (실제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지위의 상징) 전쟁에서 패배한 도시의 남자는 으레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거나 눈을 잃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가 됐다.
[토막 상식]
쿤가: 쿤가는 가축 당나귀와 야생 당나귀의 교배종이다. 덩치가 큰 수컷 쿤가는 왕과 귀족, 전쟁터의 병사나 지휘관이 탄 수레를 끌었으며, 덩치가 작은 수컷과 암컷은 쟁기를 끄는 용도로 쓰였다. 쉽게 구하지 못하는 가축이어서 왕실 결혼 때 지참금으로도 한몫했다. 가축 당나귀는 온순하지만 느리고, 야생 당나귀는 빠르지만 거칠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쿤가는 둘의 장점을 물려받았다. 쿤가는 당시 이 지역에 분포해 있던 야생마보다도 훨씬 빨랐다. 출처: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027748.html - 말보다 500년 앞서 수레 끌던 고대 동물 ‘쿤가’의 정체 |
우르의 왕조
다시 우르의 왕조에 대한 정보로 돌아가자면, 수메르 왕명표상 우르 제1왕조의 1대 왕은 메산네파다이다. 그는 키쉬가 우르크의 길가메시와 전쟁을 벌이는 사이 국력을 키웠다. 키쉬는 길가메시와의 첫 번째, 두 번째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국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고 우르의 메산네파다는 그 틈을 타 키쉬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노쇠한 메산네파다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인 메스키아난나는 우르, 키쉬, 니푸르 삼국을 지배하는 사람이 된다. 우르 왕조는 4~5명의 왕이 약 177년간 지속됐다고 적혀있는데 그 이후 일종의 수메르 전국 시대가 펼쳐진다.
그 이후 이야기
신생 도시들과(아카드, 라가쉬, 움마, 엘람의 아완 왕조, 하마지) 기존의 패권 도시들은 (우르크, 키쉬) 서로 옥신각신 왕권을 두고 다툰다. 이 시기는 서로 다른 도시의 왕들이 서로 왕위를 승계한 것처럼 나열해서 기록해놓는 바람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정확한 연대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 번 해보려 했으나 꼬여서 포기) 결론만 말하자면 최후에는 우루크 제2왕조를 탄생시킨 엔샤쿠샨나 왕이 수메르 전체의 지배권을 가져간다. 그는 ki-en-gi lugal kalam-ma 즉, '수메르의 주인이자 모든 땅의 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우루크 제2왕조의 2대왕인 루갈 키니쉐두두 대에는 라가쉬의 에안나툼에게로 왕권이 넘어간다.
[토막 상식]
더 자세한 우르 왕조에 대한 내용은 https://www.historyfiles.co.uk/KingListsMiddEast/MesopotamiaUr.htm 사이트에서 참고 바란다. |
[토막 상식]
아완 왕조: 아완 왕조는 엘람 지역의 최초의 왕조이다. 기원전 2700년경에 건국되었으며 현재 쿠웨이트의 티그리스강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문화적으로, 왕국은 선진 이웃 국가들보다 덜 성숙했고 수메르의 글과 건축양식을 차용한다. 남아 있는 소수의 엘람 기록으로 볼 때, 엘람어는 다른 언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엘람인의 기록으로는 해당 지역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기 어려워 대부분 그들의 역사는 수메르인 기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아완 왕조는 엘람 지역의 4개 도시 (아완, 수사, 안샨, 시마쉬)를 기반으로 잠시나마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영향권 아래 두었다. |
라가쉬 제1왕조 - 기원전 2,500 ~ 2,350년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139~147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137~142p}
{김산해, 최초의 역사 수메르, 휴머니스트, 2021, 190~194p}
라가쉬는 수메르 왕명표에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수메르 남부의 강력한 패권국가였다. 라가쉬가 왕명표에서 빠진 이유는 수메르 왕명표 또한 승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후대에 아카드 제국을 필두로 셈족이 서남아시아를 지배하게 되는데 이들의 영향을 받은 필경사는 수메르인들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왕명표에서 지운다. 특히 라가쉬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지는데 일조하며, 정치적인 목적하에 의도적으로 편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우르의 메산네파다 전성기가 있기도 전) 라가쉬는 인근 도시인 움마(Umma)와(서로 80km 정도 떨어져 있음) 국경에서 분쟁이 항상 있어왔고 당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던 키쉬의 왕인 메실림은 두 도시의 왕들을 중재해 국경선까지 그어준 일화도 있다. (메실림 사후에 움마는 국경지역을 다시 탈환하였다)
라가쉬의 첫 번째 왕은 우르난쉐 왕이며 그 시기는 기원전 2500년으로 본다. 라가쉬는 우르난쉐의 손자인 에안나툼(Eannatum)대에 이르러 전성기 구가한다.(기원전 2455년) 에안나툼은 즉위 후 국경 분쟁이 있었던 움마를 정복하러 간다. 그는 두 나라의 국경지대인 기르수(Girsu) 근처에서 움마의 왕(당시 왕은 알려져 있지 않음)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기념비에는 적의 시체가 3600구에 달했다고 쓰여 있음) 에안나툼의 승전에 대한 증거는 그가 세운 '독수리 승전비'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인근 도시인 움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기념한 것이다. 그리고 후에 이어서 아완(엘람), 아시리아 슈비르(Assyria Shubir, 후에 아시리아가 될 지역을 수메르인들은 아시리아 슈비르라고 함, 아카드어로는 수바르투)를 정복한다. 이곳은 목재가 풍부한 곳이기에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다음에는 우루크, 우르, 아크샤크, 키쉬를 정복한다. 하지만, 에안나툼이 정복한 땅들은 항상 불안 요소를 갖고 있었다. 에안나툼이 정복한 각 도시들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에안나툼은 처음에는 손쉽게 반란을 제압하지만, 지속적인 반란으로 인해 점점 힘이 빠진다. 결국 에안나툼이 죽고 그의 동생인 엔안나툼(Enannatum)이 왕위를 물려받지만 주변 도시 국가들은 더 이상 라가쉬를 맹주 국가로서 받들지는 않게 된다.
[토막 상식]
수메르의 에덴: 기르수라는 도시는 라가쉬의 신앙과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라가쉬의 북서쪽 도시인 기르수는 움마의 남동쪽 중심 도시 기샤와 맞닿아 있어서 항상 대립이 있던 곳이다. 예부터 기르수와 기샤 사이의 땅은 광활한 비옥토가 있던 곳인데 그곳을 수메르인들은 구에덴나(Gu'edena)라고 불렀다. 이곳은 유프라테스와 수메르의 수많은 지류가 교차하는 곳이라 더욱더 비옥했다. 가뭄이 심해지면서 두 나라는 자국민을 먹여살리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구에덴나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수메르의 에덴은 농사짓기 좋은 금싸라기 같은 땅이며 수자원이 풍부한 땅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기원전 600년 히브리 사람들은 경전에 에덴을 이상향의 이름으로서 차용한다. 출처: 김산해, 최초의 역사 수메르, 휴머니스트, 2021, 104p |
기원전 2350년, 라가쉬는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사회가 피폐해져 간다. 부패한 사제와 부자들은 전횡을 일삼았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기아와 공포에 허덕였다. 왕족과 귀족은 도시의 토지와 논밭을 빼앗아 막대한 부동산을 축적했고, 사원의 토지는 파렴치한 사제들이 독차지하였다. 신전의 공공기능은 마비됐고, 오히려 시민들의 가축과 곡식을 착취했다. 노동자들은 빵을 구걸하고, 기술공들은 급료 지급을 받지 못해 쓰레기를 뒤지며 음식을 구했다. 나라의 관리들은 모든 곳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심지어 어떤 점토판에는 "국격에서 바다까지 세금 징수원이 없는 곳이 없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시신을 매장할 때에도 맥주 일곱 주전자와 빵 420 덩어리를 내야 했다. 세금 부담이 커서 부모는 자식을 노예로 팔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쇠퇴하는 모습은 소름 끼치게 유사하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현상은 인류 역사에 단골로 등장한다. 앞으로 자주 마주칠 예정이기에,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는지 그 구조적 모순에 대해 아래에 간략히 설명하겠다.
[토막 상식]
국가와 토지의 관계: 농경 문명의 골간은 땅과 사람이다. 그래서 예부터 땅이 넓고 사람이 많으면 대국이고 강국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국민국가가 탄생하기 전, 농경 국가의 왕권은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여겨졌기에 땅과 사람은 신의 부름을 받은 왕과 그의 영토인 국가를 위해 존재했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 탄생한다. 고도의 정치 행위인 전쟁은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축적된 자본의 힘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전쟁 실행을 결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전쟁을 끌고 나가는데 있어서도 자본은 상당히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은 화폐가 제대로 자리 잡기 전 농경 문명의 토지, 노동, 생산성 향상에 필요한 유무형의 자원쯤으로 뭉뚱그려 이해하면 됨) *주의할 점: 고대에 군인은 귀족이었고 그 수는 소수였다. 정치적 결단에 의해 벌어진 전쟁에 대해서, 왕은 전시에 모든 물자를 징발하고 조직된 군대를 이용할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가도 있었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불해야 했다. (운이 좋게 전쟁에 승리하면 그 지역에서 얻은 전리품은 보너스로 갖겠지만) 이러한 시스템은 비단 군인뿐만 아니라 급료를 지불해야 하는 관리들에게도 해당했다. 하지만 땅은 원칙적으로 왕의 것이니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를 내주었다.(조세를 받을 권리, 수조권) 일부 지역에서는 땅을 내어주기도 했다. 토지가 무한히 남아돈다면 이것은 별문제가 없다. 하지만, 토지는 유한한데 국가의 규모가 커질수록 정복 전쟁의 횟수가 늘어나고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관리들의 수도 늘어난다. 수조권을 받았던 군인들과 관료들이 은퇴하거나 죽으면 그 권리를 반납해야 하지만, 자식에게 상속된다. 수조권이 상속되면 사실상 토지 소유권이 되게 되는데, 토지는 유한하고 관리와 군인은 계속 늘어나니 땅 하나에 이중 수조권이 붙기도 한다. 이를 버티지 못하는 농민들은 노예로 전락하거나 살던 도시를 옮긴다. 국가의 재정은 생산물에서 나오는데 분배할 재정이 부족해지고 상위 계층이 자원을 독차지하니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확대재생산된다. 안타깝지만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다른 나라가 취약해진 나라를(한때는 부강해서 군대도 막강하고, 재정도 튼튼했지만 시간이 지나 계층 간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고 재정이 너무나도 취약해져 군대 유지가 버거운 나라) 정복함으로써 해결된다. 그리고 그 정복 왕조는 민심을 얻기 위해 기존의 귀족들이 갖고 있던 땅을 몰수하고 민중에게 땅을 다시 나눠준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메커니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참조: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역사, 남경태, 들녘, 2008 |
이러한 시기에 9대 왕인 우루카기나(Urukagina)가 즉위한다. 우루카기나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으며 이는 인류 최초의 사회개혁에 대한 역사기록인 셈이다. 세금 징수원과 불필요한 관리들을 줄이거나 없애고 세금을 낮추었다. 부조리한 시스템에 의해 생긴 채무는 탕감해 주었고, 관리나 사제가 채무 변제 대신에 민중의 토지를 압류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사제의 권위를 빼앗았다. 우루카기나는 민중을 고리대금, 굶주림, 도둑질, 살인으로부터 해방시켰다. 하지만 급진적인 개혁은 이미 제도화된 시스템 내에서 기생하던 기득권들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개혁의 수위가 급진적일수록 반발의 강도는 심해진다)
[토막 상식]
엔메테나 왕: 사실은 라가쉬의 5대 왕인 엔테메나가 사회개혁을 먼저 시행했다. 덕분에 나라가 안정되었지만, 8대 왕인 루갈안다는 폭정을 일삼았다. 라가쉬의 땅 70%를 그가 소유하고 가장 부유했으며 가장 부패했다. 9대 왕인 우루카기나는 루갈안다를 죽인 왕위 찬탈자였다. 그는 그러한 오명을 벗기 위해 자신과 관련이 없지만 역대 라가쉬 왕조의 종묘에서 제례를 올리고, 사회개혁을 단행했다. 대부분의 사회개혁은 엔테메나의 것을 따라 했다. |
[토막 상식]
우루카기나는 왜 기득권들을 완벽하게 못 없애서 후환을 남겨놓았을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고도로 사회화된 동물인 인간은 집단 내의 기득권 탄생을 막을 수 없다. 기득권의 요체인 불평등의 생성 자체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동물 사회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각각 상이한 유전적&환경적 조건을 갖고 태어나며 이 때문에 삶의 시작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인 생존과 번식을 충족하지 못한 환경에서는 이러한 불평등이 부각되지 않았다. 불평등은 '비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모두가 식량생산에 몰두하고 근근이 살아가는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불평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농업의 발전으로 잉여 생산량이 늘어나 집단이 갖게 되는 자원의 총량이 증가하면, 개개인이 갖고 있는 불평등한 능력 차이(유전적) & 환경적 배경 차이(기존에 갖고 있던 재산 & 부모의 서포트)로 인해 자원의 소유 정도에서 차이가 나게 되고 이는 집단 내 불평등을 느끼는 사람들의 증가를 불러온다. 그러한 시점에서 어느 집단은 인간의 본성인 생존과 번식을 충족한 상태를 만족하게 되는데, 이미 그러한 삶에 안주하여 몇 세대를 살아온 집단은 그 층을 더욱더 두텁게 하려는 속성(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속성이다)이 있으며 그 이익의 궤를 같이하는 집단은 똘똘 뭉친다. 그 집단은 보통 권력 자원이 풍부하기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제도와 법을 설정하고 집단을 영속시키려 한다. 그렇게 기득권은 자동적으로 강화된다. 그래서 역대 위대한 나라들의 말로에는 내부의 부정부패가 뿌리 깊이 박혀있다. (도려내면 나라의 존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
안타깝지만, 행정가의 도덕적 올곧음과 정치적 성공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비례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례하면 우리는 그를 성군이라 부른다, 성군은 그리고 손에 꼽힌다) 우루카기나의 개혁으로 사제들은 권력남용이 불가능해졌고(사제 입장에서 생존의 위협), 부자들과 관리들은 수입의 원천인 토지와 노예, 수조권, 재산을 빼앗겼다. 입장 바꿔서 내가 기득권의 2~3세대에 해당하는 자식이고, 나라의 관리이며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살아왔는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면 기분이 어떨까? 우루카기나가 죽일 놈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루카기나는 민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라가쉬의 행정은 아마 마비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무주공산의 나라에 이웃나라 움마의 왕 루갈자게시(Lugal-Zage-Si)가 진군하였고 그는 라가쉬를 손쉽게 차지한다.
[토막 상식]
더 자세한 라가쉬 왕조에 대한 내용은 https://www.historyfiles.co.uk/KingListsMiddEast/MesopotamiaLagash.htm#First%20Dynasty 사이트에서 참고 바란다. |
우루크 제3왕조 - 기원전 2,359 ~ 2,335년
{주동주, 수메르 문명과 역사, 종합출판범우, 2018, 148~151p}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 실천, 2007, 142~143p}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48~149p}
루갈자게시(Lugal-Zage-Si)는 움마의 엔시였는데 즉, 총독이자 수호신인 니사바를 섬기는 제사장이었다. 그는 취약해진 라가쉬로 원정을 떠나는데 그 당시 라가쉬의 왕인 우루카기나를 상대로 전투에 승리한다. 움마는 라가쉬와 오랜 악감정이 있었고 루갈자게시는 라가쉬를 포함해 그와 동조했던 모든 도시의 신전들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약탈한다. (기록 상 우루카기나는 이 전투에서 죽지는 않고 중간 도시인 기르수의 왕으로 남는다)
루갈자게시는 라가시 점령 후 20년 동안 수메르 전역을 차례차례 수복한다. 그는 이후에 우루크를 점령하였고, 수도를 우루크로 옮겨 제3왕조를 연다. 니푸르에서는 루갈자게시의 업적을 써놓은 꽃병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키쉬는 당시 루갈자게시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도시인데, 이곳의 왕이였던 키쉬의 우르-자바바를 몰아내고 신흥세력이 등장한다.(우르-자바바의 시종장 출신인 사르곤) 사르곤은 우루크를 정복하기 위해 남진하였고, 루갈자게시는 사르곤과의 결전에서 패배한다. 전쟁에서 패배한 루갈자게시는 사르곤에게 사로잡혀 쇠사슬에 목이 감긴 채 니푸르까지 끌려간 뒤 죽임을 당했고 그의 목은 엔릴 신전의 대문 기둥에 걸린다.
마무리
책을 읽다 보면 짜릿함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인간은 항상 자극을 찾아다니는 존재고, 나 또한 그러한 짜릿함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책을 계속 뒤적이는 것 같다. 분야마다 그러한 포인트는 다르겠지만 역사에 있어서는 현실과 놀랍도록 유사한 옛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할 때 자극을 받는 것 같다. 이번 파트에서는 우루카기나의 사회개혁 시도를 보고 자극(?)이 왔다.
역사적으로 사회개혁은 나라의 양극화가 극에 달했을 때 발생한다. (예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The Great Society) 물론, 보통은 그런 사회개혁까지 가기도 전에 나라가 패망하고 다른 왕조가 들어서지만 우루카기나 때에는 사회개혁에 대한 시도 정도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루카기나는 왕위 찬탈자였지만 그 내면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그가 느낀 당시의 현실은 분명 참담했을 테고, 도와주는 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본인이 생각하는 정의를 실현하려 했다. 그런 점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농경 문명의 유능한 행정가는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범위가 극도로 제한적이다. 이를 한계 짓는 요인들은 앞으로 자주 언급할 예정이니 굳이 지금 언급하진 않겠다.
다름 Part에서는 아카드 제국에 대해 다뤄볼 예정이다.
<참조한 서적>
- 고대 문명의 이해(브라이언 M.페이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03.16.)
- 수메르 문명과 역사(주동주, 종합출판범우, 2022.11.30)
-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1(수잔 와이즈 바우어, 이론과실천, 2007.10.01.)
- 신세계사1(쑨룽지, 흐름출판, 2020.01.20.)
- 최초의 역사 수메르(김산해, 휴머니스트, 2021.12.27.)
-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 (클라이브 폰팅, 민음사, 2019.12.27.)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201140607
서남아시아의 기원전 2,600 ~ 2,400년 세력 변화 지도
<기원전 2600년>
<기원전 2500년>
<기원전 24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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