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서막 (우바이드 문화)

기체는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흐르고, 전기는 전위차에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문명의 흐름도 같은 맥락인데, 보통 높은 수준의 문명 혜택은 낮은 수준의 지역으로 흘러가서 주변으로 전파됐다. 높다 낮다의 기준은 지극히 인간의 기준이고 가치판단의 영역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역사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의하면 높은 수준의 문명은 서남아시아에 존재했고, 그 기세는 르네상스 이전까지(15세기) 유지된다. (로마가 번성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이를 증명하듯 고대 로마에는 "빛은 동방에서 왔다(Lux ex oriente)"라는 속담이 있고, 이들에게 해가 뜨던 동쪽의 문명은 배움의 대상이었다. 과거에는 서양 중심의 사관이 서남아시아를 변두리 취급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서남아시아와 동양사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또한, 서양사와 동양사로 각각 구분하지 않고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텔알-우바이드(Tell al-'Ubaid)에서 발굴한 임드구드 신의 석상

문명의 혜택이 동에서 서로 향하는 그 근원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어원은 서남아시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지역(현재의 이라크 땅)을 그리스어로 '강들의 사이'라는 뜻인 'Μεσοποταμία'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중간'을 의미하는 '메소스(μέσος)'와 '강'을 의미하는 '포타무스(ποταμός)'를 합쳐서 만들었다. 대략 기원전 4,100년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330년까지 지속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을 지배했던 문명 집단들에 대한 기록이다. 순서대로 수메르, 아카드 제국, 아시리아, 바빌론 제국, 아케메네스 제국을 의미하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이 지역을 지배하는 시점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종료 시점으로 본다.

이번 Part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첫 번째 주자인 수메르 문명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수메르 문명에 앞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했던 우바이드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 문명과 고대 도시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아래의 연표를 참고하길 바란다. 신석기 시대 문화 중 서남아시아 동쪽 지역에 존재했던 주요 문화들을 나타냈으며 할라프 문화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우바이드 문화가 꽃을 피운다. 우바이드 문화는 신석기 시대에서 금석병용기(chalcolithic)로 넘어가는 시기에 존재했던 문화이다.

<동쪽 - 자그로스산 기슭 +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 ​자르지아 문화: 기원전 18,000년 ~ 8,000년
  • ​믈레파트 문화: 기원전 9,000년 ~ 8,000년
  • ​자르모 문화: 기원전 7,090년 ~ 4,950년 --> 최초의 토기 사용 문화
  • ​하수나 문화: 기원전 6,500 ~ 5,900년
  • ​사마라 문화: 기원전 6,500년 ~ 5,900년
  • ​할라프 문화: 기원전 5,900년 ~ 5,300년
  • ​우바이드 문화(수메르 문명 태동기): 기원전 5,400년 ~ 4,100년
  • ​우루크 시대(수메르 문명): 기원전 4,100년 ~ 3,100년

우바이드 문화(Ubaid culture) - 기원전 5,400 ~ 4,100년

{쑨룽지, 신세계사1, 흐름출판, 2020, 238~240p}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23p}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Sumerians/}

{출처: https://www.historyfiles.co.uk/FeaturesMiddEast/MesopotamiaSumer03.htm}

우바이드 문화는 선사 시대와 초기 도시 문명의 문턱 사이의 교차점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Tell al-'Ubaid에서 그 시대의 토기가 처음 발견되었고, 그 장소의 이름을 따서 우바이드라는 이름이 명명되었다. 우바이드 이전에는 할라프 문화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퍼져있었으나 남부에서 탄생한 우바이드 문화가(남부는 기원전 6200년 무렵을 시작으로 봄) 북부까지 퍼졌고 기원전 5300년이 되면 대부분 우바이드 문화권에 속하게 된다. 우바이드 문화는 수메르 문명의 태동기에 해당한다. (본격적으로 수메르 문명 안에 포함하는 것은 우루크 시대) 우바이드 문화는 시대적 변화 양상에 따라 0~4기로 나누어진다. 다만, 이 기간에 대한 구분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한정적인 개념이며 북부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이 부분은 우바이드 문화 설명 막바지에 이어가겠다.

[토막 상식]
텔(Tell)의 의미: 텔(tell)은 인공 언덕을 의미한다. 이러한 언덕이 생긴 이유는 살기 좋은 곳에 대한 안목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도 살기 좋았던 곳은 항상 인기가 많았고,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세대가 거듭되면서 무너진 건물 위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전에 쓰인 건물의 진흙벽돌이 쌓이고 쌓여 단계적으로 층위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누적이 인공 언덕을 만들어 냈다.
옛 건물 부지의 진흙벽돌을 좀 치우고 다시 새로운 건물을 올리면 될 것 같지만 이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진흙벽돌 건축물은 강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진흙에 짚을 섞은 다음 햇볕에 말려서 만드는데, 이들에게는 값싸고 튼튼한 건축 재료이자 단열성과 통기성이 뛰어난 재료였다.
하지만, 진흙벽돌은 내구성이 약해 지속적으로 보수해 주어야 한다. 진흙벽돌 건물은 50~70년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보수가 없이는 건물 부지가 폐허나 진흙더미로 변하게 된다. (벽돌을 불로 구우면 = 소성 벽돌, 내구성을 향상시킬 수 있지만 불을 피우기 위한 연료가 귀하기에 매우 제한적으로 쓰임) 건물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 경우, 재활용할 수 있는 재료들은 떼어내고 남은 부분은 부식될 때까지 남겨두었다. (진흙벽돌이 굳어서 남겨진 잔해는 철거가 어려움) 하지만 부지를 놀려둘 수 없기 때문에 잔해가 남겨진 곳에 새로운 흙을 덮어서 부지를 평평하게 만든 후 그 위에 새롭게 건물을 지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진흙벽돌이 사용된 도시는 지면의 고도가 점점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출처: 카렌 라드너, 바빌론의 역사, 더숲, 2021, 48~49p
 
할라프 문화와 우바이드 문화 범위,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image/513/map-of-ubaid-culture/
 

 

우바이드 제0기 (Oueili) - 기원전 6,500 ~ 5,400년

초기 우바이드 시대는 옛 페르시아 만 해안선 근처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단에 자리했다. 이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합류하는 근처의 건조한 남부 평야에 최초의 영구 정착지를 세웠다. 농경으로 진입하기 전 유프라테스강 하구 쪽에 사람이 자리 잡고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것은 기원전 6,500년이며 Tell el-'Oueili(우에일리)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5,400에 이르면 농경 사회로 진입한다. 이 지역에 많은 수의 인구가 살지 못했던 이유는 두 강사이에 자리한 넓은 하천 유역이 살기 어려운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여름은 길고 무더웠으며 겨울은 혹독하고 추웠다. 강을 벗어난 곳에서는 물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핵심 자원도 모두 부족했다.

우바이드 제0기 유물: 토기
 
우바이드 제0기 유물: 인장

 

우바이드 제1기 (Eridu) - 기원전 5,400 ~ 4,700년

현재 이라크의 남단에 (당시 페르시아 만 해안은 지금 보다 육지 쪽으로 200km정도 더 많이 올라와 있었음) 해당하는 에리두라는 도시에서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북쪽의 사마라 문화와 명확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사마라 문화: 기원전 6,500~5,900년) 에리두는 강우량 127밀리미터 선 이남에(매우 건조한 토지) 자리 잡은 농경 도시로써 지하수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이들은 해당 지역의 높은 지하수면 덕분에 극한의 건조 조건에서 곡물 재배가 가능했다. 이들의 기원은 북쪽에 살던 사마라 문화인들로 추정되며 북방의 다른 강력한 집단에 의해 아래로 이주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우바이드 시대 주택, 출처:  https://www.historyfiles.co.uk/FeaturesMiddEast/MesopotamiaSumer03_Full.htm

에리두 사람들은 유프라테스 강의 봄철 홍수를 이용해 농작물 수확량을 크게 개선으며, 많은 수확량은 더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에리두는 우바이드 시대에 10헥타르에 달했으며 4,000명의 주민이 거주했다. 하지만, 증가하는 인구 대비 원자재 공급은 매년 범람하는 강으로 인해 맞춰줄 수 없었다. 강의 범람이 만연한 환경은 도구와 건축물 생산에 필요한 석재와 목재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자재를 구하기 쉽지 않은 환경은, 결과적으로 무역 네트워크의 확장을 불러왔다. 구하기 어려운 원자재들은 무역을 통해 공수하였는데, 예를 들어 구리의 경우 아나톨리아 동쪽(토로스 산맥 아래), 아라비아반도 동쪽이 구리의 원산지였다. (마간=현재의 오만)

석재와 목재가 부족하니, 우바이드 시대에 지어진 거의 모든 건축물은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소량의 석재만 사용했다. 또한, 우바이드 주택은 독특한 구조가 특징이다. 이러한 주택의 형태는 사마라 문화에 의해 지어진 T자형 주택과 일부 유사성을 보여준다. 집의 주요 부분은 양쪽에 현관, 계단 및 거실이 있는 중앙 십자형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Tell Madhhur에서 발견된 이 집은 지붕을 구성하는 목재와 갈대 매트가 그을린 채로 파괴된 잔해 속에서 발견되었다. 칠한 냄비, 숫돌, 괭이, 3,800개가 넘는 새총 총알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한쪽 방바닥 아래에는 토기 항아리에 갓난아기의 시신이 묻혀 있었다. 가족 거주 구역 내 매장은 초기 정착민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관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신성한 공공 건축물이(신전) 처음 등장한다. 직사각형 사원은 진흙 벽돌로 지어졌으며 의식 활동을 용이하게 하는 벽감과 같은 제단이 발견되었다. 에리두의 신전은 인류 최초의 도시 형성에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종교는 혈연관계가 아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추후에 국가의 중앙집권적 권력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우바이드 제1기 에리두 신전, 출처:  Lecture-5 (ppt.): Ubaid and Uruk cultures in Mesopotamia and beyond: ca. 5,400 - 3,100 BCE (G. Mumford 2022; 225 slides)

 

우바이드 제2기(Hajji Muhammad) - 기원전 4,800 ~ 4,500년

우바이드 제2기에는 하지 무함마드 양식의 토기가 생산되고 있었고, 채색된 우바이드 토기는 고온에서 소성되었으며 갈색 또는 검은색 기하학적 디자인이 있는 녹색, 빨간색 또는 담황색 페이스트로 구성되었다. 이 기간 동안 주요 정착지 근처에 대규모 운하 네트워크가 발달하였다. 관개 수로 방식을 도입하여 농업을 시작하였으며 이는 인근의 초가마미 (Choga Mami)에서 기술이 전파된 것으로 보여진다. 관개 수로의 규모를 보아 대량의 노동력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강물, 주로 유프라테스 강을 이용하여 광대한 충적 사막을 경작하여 생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일강 양쪽의 농지와 달리 유프라테스 강의 인공 관개 시스템에는 많은 양의 미사가 범람하면서 끊임없는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홍수의 시기도 이들을 방해했다. 홍수는 보통 토로스 산맥의 눈이 녹으면서 생성되어 늦봄이나 초여름에 찾아왔는데, 이 시기는 봄 작물에는 너무 늦었고 가을 작물에는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지표면 바로 아래에는 소금 퇴적물이 많이 집중되어 있었다. 토양의 높은 염분 함량은 이집트의 경우보다 농업을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었다. 이 지역은 주변으로부터 습격과 전쟁이 이집트보다 더 잦았으며, 관개 도랑이 적절하게 유지되지 않을 때마다 식량 부족이 뒤따랐다.

[토막 상식]
관개와 염분
작물의 생장에 필요한 물을 제때 공급해 주기 위해 물을 통제, 저장 그리고 관개하였지만 이는 장기적으로는 지속 불가능하다. 생태계는 인위적으로 바꾸면 그 끝은 대부분 부작용이 일어났다. 관개기술은 아래와 같은 부작용을 불러왔다.
(1) 지하수의 수위가 지속적으로 높게 유지되어 토양의 물이 빠지지 않아 물에 잠기는 곳이 생기면 염분이 지표면으로 올라옴
(2) 토양 염류화: 고대의 관개용수 기작은 결국, 고산지대에서 흐르는 물을 모아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관개용수는 필연적으로 산에 있는 암석의 염분을 끌고 내려와 하천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저수지에 가둬졌다. 이후 관개용수가 작물의 생장에 사용되면 토양에는 염분이 남게 됐다. 이러한 상태가 수백 년 지속된 땅은 토양의 염류화가 심해져 작물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주변 지역에서 생산되는 홍옥수와 청금석으로 만들어진 유물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이들이 활발한 무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운하 네트워크의 발달은 이동을 더 쉽게 만들어 무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남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갈대 배를 만들고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등의 육로로 이동하는 것보다 쉽게 물자를 이송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바이드에서 생산된 상품은 페르시아 해안을 따라 남쪽인 아라비아에서도 발견됐는데, 이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외부로 무역망이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바이드 제2기 유물, 토기 (하지 무함마드 양식)

 

우바이드 제3~4기 - 기원전 4,500 ~ 4,000년

운하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해 우바이드 문화가 넓은 지역에 걸쳐 보편적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중부 메소포타미아에만 국한된 채로 퍼졌던 할라프 문화와 사마라 문화와 달리 우바이드는 남부에서 퍼져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망라하게 되었다. 수백 년에 걸친 관개농업에 의해 밭을 경작하는 농부들의 일상적인 필요를 훨씬 뛰어넘는 곡물이 잉여가 되었다. 잉여 생산물을 기반으로 이들은 점점 창의적인 생각과 지역을 발전시킬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만한 여유가 생겼으며, 점차적으로 최초의 도공, 상인, 사제 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은 농부들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유지되었다.

이에 대한 증거로 단순한 구조에서 복잡한 구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토기 가마가 수많은 우바이드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그릇, 조각상 및 기타 토기 공예품은 높은 수준의 토기 전문화를 보여준다. 우바이드의 토기 생산량은 상당했다. 우바이드 토기는 물레가 아니라 회전반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는데, 진정한 형태의 물레는 우바이드 말기에 나타난다. 물레의 발견은 혁명적인 다른 발견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도공의 물레를 옆으로 뒤집어 운동에 적응시키는 것을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바퀴가 탄생했다. 바퀴 덕분에 농부들은 마을이나 마을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땅에서 일할 수 있었다. 바퀴가 달린 수레에 묶인 소나 당나귀는 이전에 등에 짊어졌거나 바닥이 평평한 썰매로 끌 수 있었던 것보다 세 배나 많은 짐을 끌 수 있었다.

석기 산업으로 괭이, 도끼, 낫, 긁는 도구, 절굿공이, 곡물 가공용 연삭 도구를 생산했고, 직조와 바구니 제조도 중요한 산업이었다. 이러한 산업을 기반으로 급진적인 인구증가에 불을 붙였으며 결국 대형 촌락은 도시화된다.

우바이드 문화 안에서 발생한 도시가 국가 수준 사회를 이루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도시에는 전업 도예가나 건축업자와 같은 직업 전문화가 나타난 것은 증거가 있지만 토기 생산을 통제하는 중앙 정부에 대한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상품 분배를 통제하는 데 있어 중앙 정부의 존재를 유추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었기에 과도기적인 성격이라고 봐야겠다.

우바이드 문화 때는 사회적 계층이 명확히 구분되진 않았어도 초기 엘리트 계층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아마도 마을 지도자 또는 족장과 연결된 가족 집단을 형성했을 것이며, 족장의 권력과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그들의 지위도 높아졌을 것이다. 권력은 계승되었고 이후 도시 국가의 씨앗이 뿌려졌다. (Tepe Gawra에서 소량의 홍옥수와 청금석 구슬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상위 계층의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어찌 되었든 우바이드 시대에 도시의 존재는 곧 문명의 탄생을 예고하는 서막과도 같다. 이 지역에 살던 이전의 사람들은 인구가 밀집도가 낮은 단순한 농민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도시 국가 수준의 사회를 향한 첫 발걸음을 뗀다. 에리두 유적지는 기원전 4,75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 지역과 전 세계에 알려진 최초의 도시 중 하나(과도기적인 형태의 도시: 촌락과 도시 중간)인데, 에리두는 공동묘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에리두에서 가장 먼저 알려진 건축물은 사원이다. 진흙 벽돌로 지은 비주거용 대형 건물(사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은 점토나 수입 석재로 된 플랫폼 위에 세워졌다. 계단은 이러한 구조의 꼭대기로 이어지며 수메르의 거대한 지구라트를 연상케한다.

우바이드 제4기 에리두 사원, 출처:  Lecture-5 (ppt.): Ubaid and Uruk cultures in Mesopotamia and beyond: ca. 5,400 - 3,100 BCE (G. Mumford 2022; 225 slides)

사원의 존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국가급 사회의 특징에서만 볼 수 있는 '기념비적 건축'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둘째, 사회에 대한 종교의 역할 증대 그리고 하나의 이상에 대한 종교의 순응을 보여준다. 관료적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일련의 규칙이나 권위에 대한 순응이 필요하다. 사원은 또한 잉여 농산물을 저장하는 시설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흉작이나 가뭄이 발생했을 때 많은 인구를 위한 보험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바이드 지역과 그 주변은 아직 진흙 벽돌 건물만 발견되고 대규모 공공장소의 수준은 아니다. 이것은 우바이드 시대가 단지 과도기였을 뿐이며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완전한 국가 수준의 사회라고 생각하는 시대가 아님을 나타낸다.

 
 
우바이드 3~4기 유물, 출처: 위키피디아

우바이드 문화는 그때 당시의 유프라테스 강 &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남&북으로 퍼져있었고 점차 영향력이 줄어듦에 따라 세력이 교체된다.

메소포타미아의 남쪽기원전 4100년경을 기점으로 인근 도시인 우루크는 우바이드 문화의 종교적 중심지인 에리두를 능가하게 된다. (인근에는 우루크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가 생긴다.) 물론 맹주의 지위를 빼앗기긴 했지만 도시로서의 우바이드는 지속된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문명의 신화에 따르면 우루크 여신 이난나(Inanna)는 에리두의 주신 엔키(Enki)에게 가서 문명을 빌린다. 이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위가 에리두에서 우루크로 넘어갔음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북쪽우바이드 문화에 이어서 기원전 4600년경 LC(Late Chalcolithic) 문화가 시작되며 기원전 3000년경까지 이어진다. 이에 따라 메소포타미아의 양상은 남쪽은 우루크 시대, 북쪽은 LC 문화로 양분된다. 우리가 일컫는 수메르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남쪽에 더 집중되어 있기에 LC 문화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간략히 설명하고 마치겠다.

LC1~2기 (기원전 4,600 ~ 3,800년)

우바이드 문화의 선진 기술을 대부분 흡수하였으며, LC1~2기는 초기 도시화의 시기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은 지역별로 편차가 있다. 시리아 북동부의 텔 브락(Tell Brak)이나 원시 도시 중심인 키르바트 알 파하르(Khirbat al-Fakhar)와 같은 지역에는 대규모 지역 중심지가 나타나는 반면, 다른 지역들은 도시화가 될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살지 않았으나 LC의 특징을 가진 유물이 출토된다.

텔 브락(Tell Brak)이나 원시 도시 중심인 키르바트 알 파하르(Khirbat al-Fakhar)와 같은 대규모 중심 도시에서는 공예 생산의 흔적이 있으며 일부 제품은 오로지 교환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공예 전문집단 및 교역의 활성화를 엿볼 수 있다. (보통은 종교적 집단이 주도해서 공산품을 생산) 또한 양과 염소를 대규모로 길러 모직물 생산도 활발했다.

LC1~2기 동안 사회적 차별화는 장제 문화에 의해 입증된다. 우선 다양한 유형의 무덤이 사용되었고, 일부는 단순한 구덩이 무덤이었고 다른 일부는 더 정교한 구조를 가졌다. 부장품은 단순하고 것에서 부유함을 상징할 수 있는 것까지 다양했다. 아이들의 무덤에서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방어 기능이 있는 구조물의 출현으로 보아 지역 간 갈등이 있었고 이를 방어해야만 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의 증거는 텔 브락(Tell Brak)에서 발견되었다.

LC3~5기 (기원전 3,800 ~ 3,000년)

LC3~5기는 발전된 행정 통제 네트워크의 징후와 전문화 및 사회적 차별화의 증거를 보여준다. 일부 정착지는 매우 큰 규모에 도달했다. 혁신의 원천인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도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독자적으로 도시화가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Tepe Gawra와 같은 작은 정착지에서도 제조, 종교 및 행정 활동이 강화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원, 공예 또는 공공건물과 같은 전문 건물도 행정적 역할을 수행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인장은 사원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인장이 중앙 권력을 증빙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교역도 활발하여 남부 우루크의 토기가 많이 발견된다. 우루크가 쇠퇴할 때 이 지역도 버려졌거나 주민들이 목축으로 전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Johnny Samuele Baldi, Between an End and a New Beginning
출처:  Johnny Samuele Baldi, Between an End and a New Beginning

문명의 정의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27p}

{데이비드 크리스천, 빅 히스토리, 웅진지식하우스, 2022, 251p}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김영사, 2017}

우바이드 문화 이후인 우루크 시대부터는 초기 도시 국가의 형태가 나타났고, 우리는 이 시대를 수메르 문명이라 지칭한다. 그렇다면 문명은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일까? 1세기 이전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빅토리아 시대 때는 '문명'의 반대는 '야만'으로 취급했으나 오늘날의 고고학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문명은 수렵&채집 사회나 소규모 농경사회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자 찰스 레드먼은 문명을 다음과 같이 1차&2차 속성을 가진 존재로 나타냈다. 아래의 속성 중 얼마만큼 해당해야 문명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의는 없지만 보편적으로 우리가 아는 문명들은 아래와 같은 속성을 갖고 있다. 아래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농경과 높은 인구밀도에 기반한다. (산업화 이전 문명에 한해서)

1차 속성: 전문화된 노동, 잉여생산물의 집중, 계급화된 사회, 도시와 국가의 존재

2차 속성: 기념비적 공공시설물, 장거리 무역, 표준화된 기념비적 예술작품, 문자, 과학(수학, 지리학, 천문학)

문명은 대체로 이전 사회와 문화들보다 복잡한 사회 체제를 이룩했다. 직업이 다른 수만 명이 함께 모여살면서 대장장이, 도공, 직조공, 사제, 석공, 음악가, 화가, 군인 등으로 분업화되어 있었다. 이들 숫자의 9배 정도 되는 농경민은 잉여 농산물을 생산해 공납의 형태 혹은 물물 교환의 형태로 도시에 공급하였고, 반대로 농경민은 도시 장인들의 생산물을 사용했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하나가 컴퓨터 프로세서와도 같다. 수천 명이 살던 촌락과 수만 명이 사는 도시의 연산 능력(창의력 & 생산력으로 대변되는)을 비교하면 기하급수적 증가의 형태를 보인다. 다양한 프로세서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서로 만나 데이터를 계산하면서 한 시스템 내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지속적으로 높인다. 농부, 사제, 도공 사이의 대화는 세 명의 수렵채집인들 사이의 대화에서는 결코 나오지 못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산했다. 그렇게 사회는 복잡해지고 이에 더해 교통망과 무역망이 서로 연결되면서 더 많은 경제적·기술적·사회적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형태의 문명은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발견되며 이를 기점으로 전 세계에서 연속적으로 발견된다.

[토막 상식]
한 집단의 창의력은 사람들 간 연결된 정도로 근사할 수 있다. 사람의 수 (노드)와 사람들 사이의 교환(노드 간 연결의 수)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노드의 수를 n이라고 했을 때 노드 간 연결의 수는 n*(n-1)/2이 된다. 이는 집단 구성원의 수 증가 정도가 A라고 했을 시 연결의 수 증가 정도는 A^2에 해당한다.
결론: 집단 내 사람이 A 배 증가하면 사람들 간 연결은 그의 제곱에 비례함

고대 도시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25p}

기원전 4100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 내에서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생긴다. 단순히 촌락이 병합된 수준이 아니라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새로운 제도가 나타난다. 그러면 기원전 4100년을 기점으로 그전에 나타났던 도시형 촌락과 그 후에 나타났던 도시는 무슨 차이를 갖고 있을까?

두 형태 모두 도시이기에 인구가 집중되어야만 형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도시형 촌락과 다르게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 과도한 인구 증가로 인해 자체 생산하는 식량으로는 감당이 불가하여, 필연적으로 주변 촌락으로부터 식량을 확보함 (도시 주변은 도시에 종속된 읍락과 그 주변의 더 작은 촌락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태의 위계적인 거주 시스템이었음)
  • 식량을 확보하면서 주변 촌락과 연계되고, 도시는 식량에 대한 대가로 촌락에 재화와 서비스 공급함.
  • 대규모의 인원이 모인 도시의 의사결정은 소규모 촌락에 대부분 강요할 수 있었음
  •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중심지 기능 수행

 

- 종교적: 어떤 한 촌락이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종교적 의례를 행하기 위한 신전을 갖고 있었기 때문. 신전은 자신이 특별한 수호신의 보호 아래 있다는 자부심&소속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이 구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살다 보니 경제적 활동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됨. 결국엔 촌락이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지배층은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한 공공 건축물을 신전 구역 주변에 지으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 신전과 왕국은 중앙집권 제도를 이루는 두 축이었음. 처음엔 문자 체계가 회계를 위해 고안되었고 점토판 위에 적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종교적 신화도 점토판에 기록됨.

- 정치적: 도시 성벽을 건설하여 도시구역과 바깥쪽 농촌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구분 지음. 중앙의 권력은 대규모 인원에 대한 방어, 자원 배분, 통제, 서비스 제공 등을 위해 관료조직을 운영하였음. 문자 체계를 통해 중앙관리들은 체계적으로 조세를 징수, 사제들은 성금을 걷고 주민들에게 일부를 배급 형태로 나눠줌. 조세의 일부는 노동의 형태로 받아 국가의 농지를 경작시키거나, 관개 시스템 수리 & 확장에 투입시킴.

- 경제적: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원자재(금속, 석재, 목재) 등을 무역을 통해 들여온 뒤 시장에서 도시 내의 수요자에게 판매. 공방 기술자들은 촌락에서 생산하기 어려운 농기구, 옷, 도구 등을 생산하여 제공. 기존의 방식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 복잡해진 상업적 거래를 기록하기 위해 일종의 회계 시스템인 문자 체계를 이용하여 거래 처리.

도시는 인류사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 그리고 문명과 거의 동시에 출현하였다. 국가는 일정한 영토를 차지하고 조직된 정치 형태, 즉 정부를 지니고 있으며 대내 및 대외적 자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실체인데, 도시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중앙집권적 계층이 탄생하고 이들의 영향력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국민들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아래의 표는 무리, 부족, 추장, 국가 사회의 기본적인 특징을 참고로 나타내었다.

사회 형태
무리
부족
추장
국가
구성원 수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 ~ 수만 명
5만 이상
정착 유형
수렵 채집, 유목
정주:1개 촌락
혹은 유목
정주: 1개 이상의
촌락 혹은 유목
정주: 많은 촌락과
도시 연합
관계의 근거
혈연
혈연에 기초한 씨족
계층
계층
민족 및 언어의 수
1개
1개
1개
1개 이상
정책의 결정
평등주의
평등주의 또는 대인
중앙 집권적, 세습적
중앙 집권적
관료층
없음
없음
없음 or 1~2개 층
다층
권력과 정보의 독점
없거나 미약
미약함
있음
합의적 권력
있음
강압적 권력
분쟁 해결
비공식적
비공식적
중앙 집권적
법률, 심판관
정착지내의 위계
없음
없음
최고 촌락
수도
식량 생산
없음
없음 -> 있음
있음 -> 집약적
집약적
노동 분화
없음
없음
없음 -> 있음
있음
교환
호혜적
호혜적
재분배(공물)
재분배(조세)
토지 소유권
무리
씨족
추장
다양함
계층화
없음
없음
있음(혈연형)
있음(비혈연형)
노예제
없음
없음
소규모
대규모
엘리트 층의 사치품
없음
없음
있음
있음
공공 건축물
없음
없음
없음 -> 있음
있음
고유 문자
없음
없음
없음
있음

 

마무리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첫 번째 주자인 수메르 문명의 시작은 우바이드 문화 이후인 우루크 시대부터이다. 수메르 문명에 대해 다루기 전 1300년간의 역사를 생략하는 것은 수메르 문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에, 기존의 역사책들 사이에 있던 우바이드 문화에 대한 내용을 짜깁기해서 정리해 보았다. 우바이드 문화의 연대가 들쭉날쭉한 이유는 그 기준을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잡느냐, 북부로 잡느냐의 차이니 참고 바란다.

다음 Part는 본격적으로 수메르 문명에 대해 알아보겠다.

 

<참조한 서적>

  • 총 균 쇠(재레드 다이아몬드, 문학사상, 2013.03.04.)
  • 고대 문명의 이해(브라이언 M.페이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03.16.)
  • 호모 데우스(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7.05.15.)
  •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1(수잔 와이즈 바우어, 이론과실천, 2007.10.01.)
  • 빅 히스토리(데이비드 크리스천, 웅진지식하우스, 2022.12.23.)
  • 바빌론의 역사(카렌 라드너, 더숲, 2021.08.17.)
  • 신세계사1(쑨룽지, 흐름출판, 2020.01.20.)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180336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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