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4 - 신석기 시대 (레반트의 선토기 문화)

인간의 역사에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환메소포타미아 유역은 농경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었고 후기구석기시대 말기(중석기라고도 함)에서 신석기시대로의 과도 단계가 가장 확실히 설명되는 곳이다. 소위 신석기 시대의 종합 세트인 정착생활, 농사, 가축사육, 토기생산에 대한 발전 양상을 이 지역보다 더 확실히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전세계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특징도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서쪽(레반트)과 동쪽(자그로스산 기슭 +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으로 나눠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신석기 시대는 토기 사용 이전 시기와 토기 사용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발견되는 유적지의 수는 서쪽이 더 많지만(서쪽은 주로 토기 사용 이전 관련 유적지) 최초의 토기 사용은 동쪽 지대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 서쪽(레반트) : 정착생활, 농사, 가축사육 확인가능

- 동쪽(자그로스산 기슭 +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정착생활, 농사, 가축사육은 기본이고 토기 생산 확인가능

또한, 서쪽은 중석기에서 신석기시대로의 과도 단계를 보기에 알맞은 유적지가 많이 분포해 있다. 반면에 동쪽은 서쪽처럼 변천의 과정이 질서정연하지는 않다. (역사에 질서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겠지만) 또한, 레반트 지역(서쪽)과 이란의 자그로스산 기슭의(동쪽) 사람들 간에는 유전적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았고 농경 문화의 교류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막 상식]
참고로 이후 레반트 지역민들은 서북쪽으로 이주해 서유럽의 초기 농경민이 되었으며, 이란 지역 사람들은 북쪽으로 이동해 동유럽 스텝 지역의 목축민이 되었다. 이 목축민들은 5000년 전 이후 서진해 서유럽에 거주하던 초기 농경민들을 대체했다. 따라서 현재 서유럽인의 유전적 계통은 대부분 이란 지역에서 기원한 동유럽 스텝의 목축민들로부터 전달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편 레반트 지역에서 기원한 서유럽의 초기 농경민 계통은 목축민의 영향을 덜 받은 남유럽 쪽에 비교적 높은 비율로 남아 있다.
출처: {박정재, 기후의 힘, 바다출판사, 2021, 151p}
비옥한 초승달 지대: Fertile Crescent

여하간 이번 Part에서는 신석기로의 이행을 설명해줄 지역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발전 양상을 동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문화별 연대를 미리 알고가면 훨씬 이해하는데 수월하기에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서쪽 - 레반트>

  • 케바란 문화: 기원전 18,000년 ~ 10,000년
  • 나투프 문화: 기원전 12,500년 ~ 9,500년
  • 선토기 신석기 시대 A: 기원전 9,500년 ~ 8,600년 --> 주요 유적지: 예리코, 차이외뉘 테페시, 괴베클리 테페

(Jericho, Netiv Hagdud, Nahul Oren, Gesher, Dhar', Jerf al Ahmar, Abu Hureyra, Göbekli Tepe, Chogha Golan, Beidha)

  • 선토기 신석기 시대 B: 기원전 8,600년 ~ 6,200년 --> 주요 유적지: 차탈회위크, 아부 후레이라

(Abu Hureyra, Ain Ghazal, Çatalhöyük, Cayönü Tepesi, Jericho, Shillourokambos, Chogha Golan, Gobekli Tepe --> 중복되는 것들은 이 시기까지 이어진 것들임)

  • 선토기 신석기 시대 C: 기원전 6,200년 ~ 5,500년 --> 주요 유적지: 아인가잘

<동쪽 - 자그로스산 기슭 +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 자르지아 문화: 기원전 18,000년 ~ 8,000년
  • 믈레파트 문화: 기원전 9,000년 ~ 8,000년
  • 자르모 문화: 기원전 7,090년 ~ 4,950년 --> 최초의 토기사용 문화
  • 하수나 문화: 기원전 6,500 ~ 5,900년
  • 사마라 문화: 기원전 6,500년 ~ 5,900년
  • 할라프 문화: 기원전 5,900년 ~ 5,300년
  • 우바이드 문화: 기원전 5,300년 ~ 4,100년
  • 우르크: 기원전 4,500년 ~ 3,100년

 

<서쪽 - 레반트>

케바란 문화 (Kebaran culture) - 기원전 18,000 ~ 10,000년

{쑨룽지, 신세계사1, 흐름출판, 2020, 73p}

{출처: https://aratta.wordpress.com/neolithic-revolution/}

{Bellwood & Peter, First Farmers, Blackwell, 2004, 105p}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 민음사, 2019, 107~108p}

<정의>

케바란 문화는 동지중해 지역의 고고학적 문화로, 하이파 남쪽(하이파는 지중해에 접하는 이스라엘 북쪽의 해안가 도시)의 케바라 동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후기 홍적세에 (현세인 홀로세 이전 지질 시대) 나타난 케바란 문화는 아석기 시대 혹은 중석기 시대의 문화로 분류된다. 이들은 후에 비슷한 지역의 범위에서 삶을 영위한 나투프 문화 속 사람들의 조상쯤에 해당한다.

<주거지>

케바란 문화에 속하던 사람들은 레반트와 시나이 지역에서 세석기 도구를 사용하는 사냥꾼과 채집인이었고 이동성이 뛰어났다. 이들의 대부분 300~1,000제곱미터 크기의 동굴이나 작은 야영장에서 살았으며, 계절에 따라 이동하였고 겨울에는 저지대 호수 근처의 동굴과 바위 은신처에 머물고 여름에는 고지대로 올라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생활상>

작고 뾰족한 세석기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이들이 사용한 돌 절구와 유봉이 발견되면서 농경사회가 되기 이전에도 야생 곡물의 수집이 이뤄졌다고 추정된다. (신석기시대를 향한 첫걸음)

<식량>

대규모 가젤무리를 잡는데 주로 노력하였고 보통 덫을 놓아 가젤 무리를 잡은 뒤 일부를 선별적으로 도살하였다. 또한, 야생 상태의 밀과 보리, 아몬드, 피스타치오 등을 먹었다.

[토막 상식]
세석기: 뗀석기의 한 종류로 3cm 이하의 작고 뾰족하며 날카로운 특징의 석기, 중석기 시대의 특징임.

 

나투프 문화 (Natufian culture) - 기원전 12,500 ~ 9,500년

{쑨룽지, 신세계사1, 흐름출판, 2020, 73p}

{출처: https://aratta.wordpress.com/neolithic-revolution/}

{Bellwood & Peter, First Farmers, Blackwell, 2004, 106p}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161~166p}

<정의>

나투프 문화는 케바란 문화가 발견된 지역에서 동일하게 발견되기에 그들의 후손들로 간주된다. 참고로 나일강 유역의 중석기 문화인 무샤비 문화가 지중해의 동부 연안으로 이동해 하이파 남쪽에 당도하고 이 지역의 후기 구석기 시대 문화였던 케바란 문화와 융합하면서 나투프 문화를 촉진했다. 발굴된 문화 유적지의 수를 비교하면 이들이 살던 면적은 케바란 문화의 5배 정도 더 넓었기에 그만큼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나투피안 Natufian"이라는 용어는 텔아비브와 라말라 중간쯤에 있는 서부 유대 산맥의 와디 안 나투프(Wadi an-Natuf)에 있는 슈크바 동굴을 연구한 도로시 개로드(Dorothy Garrod)가 처음 명명하였다. 나투프 문화는 지중해 동부인 레반트 지역에 존재했던 후기 구석기 시대 문화이고, 지금의 시나이 반도 북부에서부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레바논까지를 말한다. 시기로는 12,500년에서 9,500년 전에 해당하며, 이 기간을 두개로 나누어 일반적으로 전기 나투프 문화 (기원전 12,500~10,800)과 후기 나투프 문화(기원전 10,800~9500)라 부른다. 전기와 후기로 나뉜 이유는 영거 드라이아스 (기원전 10,900~9700년)에 의한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투프 문화는 농업이 도입되기 전에 정착 또는 반 정착 형태의 수렵채집 경제라는 점이 이례적이며, 초기 신석기시대 정착지를 건설한 사람들의 조상들로 여겨진다.

<주거지>

정착하려는 경향이 뚜렷하였으며 최초의 주거 형태는 원형의 반지하였다. 가옥은 초석 위에 흙을 짓이겨 쌓았으며 집 중앙에는 커다란 모닥불자리가 있었다. 집안에는 작은 돌들로 안쪽을 포장해 만든 구덩이가 발견되는데 이는 식량을 저장하기 위한 용도였다. 나중에는 집의 형태가 장방형(타원보다 사각에 가까운) 형태로 변한다. 장방형의 구조물은 일반적으로 반지하 형태에서 벗어났으며, 잇닿은 가옥 구조에 적합하여 도시 취락의 최초 형태가 되었다. 주로 사냥과 채집과 소량의 곡식(보리&호밀) 재배를 시도하는 작은 마을이라고 상상하면 된다. (300~400명 정도 거주하는)

하지만, 일부 정착지는 상당히 컸다. 이스라엘 북부 훌레 호수의 고대 해안선에 있는 Ain Mallaha의 초기 나투프 유적지는 약 2000제곱미터에 달했으며 한 번에 움푹 파인 돌 바닥이 있는 최대 12개의 원형 오두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식량>

사냥 외에 야생 곡물 채집이 식량 조달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전기에는 보리, 후기에는 호밀을 경작하려 했던 증거가 있다.

텔 아부 후레이라(Tell Abu Hureyra) 유적지에는 곡물, 특히 호밀 경작의 증거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야생 곡물을 주로 먹었다. 나투프 시대 레반트의 식물상은 오늘날의 메마르고 척박하며 가시덤불이 우거진 풍경이 아니라 풀이 우거진 삼림지였기에 100가지 이상의 곡물, 과일, 견과류 및 기타 식물들이 식용 가능했다.

<생활상>

나투프 문화를 특징할 만한 도구로는 마제석기, 부싯돌 돌날, 뼈로 만든 작살과 낚싯바늘이 있다. 시리아의 텔 아부 후레이아 유적지에서는 뼈와 뿔, 규석으로 만든 낫, 돌절구, 절굿공이, 주발, 석회암 대접, 흑요석 등도 발견된다. 이들은 수집한 곡식을 가공하기 위한 도구들이다. 돌로 만든 화살촉으로 보아 이미 활과 화살을 잘다뤄서 사용하였고 (주로 가젤을 잡았으니), 가젤 외에도 들소, 들염소, 붉은 사슴, 다마사슴, 노루, 멧돼지, 아시아당나귀, 야생마 사냥에도 주력한다. 털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여우, 고양이, 오소리, 족제비 등을 사냥했다.

 
출처:&nbsp; https://www.dcuci.univr.it/documenti/OccorrenzaIns/matdid/matdid025490.pdf

<가축>

온전하고 지속적인 가축화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지만 개를 길들였던 흔적이 발견되고, 개가 함께 묻혀있는 무덤도 발견된다. (이미 후기 구석기 시대 때부터 인간과 함께 살았음)

<장제문화>

일부 사이트에는 대규모 공동묘지가 있으며, 시신은 주로 주거지역 옆 또는 폐가에 매장되었다. 보통 돌이 많은 땅을 파서 장신구, 도구, 동물 잔해와 함께 시신을 매장 후 석판으로 덮었다. 또한, 어린이 사망률이 높아 아동의 묘 비율이 높았다. 부장품의 흔적으로 보아 사회에 뚜렷한 신분 구분의 증거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의미한 재산의 축적이 힘들었기에)

<예술>

장신구 제작도 많아져 동물의 신체로 만든 펜던트와 구슬사슬, 공작석으로 만든 구슬이 발견되지만, 서남아시아는 유럽과 달리 그림 같은 예술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기원전 12,500~11,000년 나투프 문화 범위
기원전 11,500~10,000년 나투프 문화 범위
기원전 10,000~9,500년 나투프 문화 범위

 

토기 이전 신석기 문화 (Pre Pottery Neolithic, PPN) - 기원전 9,500 ~ 6,200년

PPN 혹은 선토기 문화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있는 레반트와 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초기 신석기 시대를 나타낸다. 영거 드라이아스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발현되었고 나투프 문화를 계승한다.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는 선토기 문화 A(PPNA 9,500 BCE – 8,600 BCE)와 선토기 문화 B(PPNB 8,600 BCE – 6,200 BCE)로 나뉜다. 이 개념은 예리코(예루살렘 동쪽의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를 발굴하던 Kathleen Kenyon에 의해 정의되었다.

토기 이전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6200년경을 중심으로 8.2ka 한랭 이벤트 이후 끝이 나게 된다.

PPNA와 PPNB에 대해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토막 상식]
8.2ka 한랭 이벤트 - 8400년 전 ~ 8200년 전(기원전 6400 ~ 6200년) 열염순환의 오작동에 의한 이벤트 - 북반구 고위도의 로렌타이드 빙상이 감소하여 아가시즈 호수 민물이 바다로 유입됐고 때문에 열염순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 차탈회위크등 선사 유적지의 급격한 거주지 감소가 이 이벤트에 의한 영향 중 하나라고 추정됨 [ka = kiloannum의 약자로 1000년을 의미].

선토기 문화 A (Pre Pottery Neolithic A, PPNA) - 기원전 9,500 ~ 8,6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168~171p}

{쑨룽지, 신세계사1, 흐름출판, 2020, 71~75p}

{출처: https://aratta.wordpress.com/neolithic-revolution/}

PPNA에 해당하는 지역은 레반트지역 남부의 술타니안(예리코), 레반트 북부 무레이베티안, 아스바디안, 차이외뉘 테페시, 괴베클리 테페 근방이다. 이들 지역의 문화수준은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주거지, 생활상, 식량 조달 방식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 PPNA시대의 특징을 미리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 원형의 구조물, 돌지반, 테라초, 불에 굽지 않은 흙벽돌 담을 채택
  • 농작물 재배
  • 곡물 창고를 만듦
  • 달군 돌을 요리에 이용
  • 동식물의 순화에 광범위하게 의존함
  • 주거지 바닥 아래에 시체를 매장하는 독특한 매장 풍습

<식량>

PPNA는 농경생활과 수렵&채집 생활이 함께 나타나는 혼합 경제 시기로서, 야생식물의 재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흔적은 주거지역 유적지 내의 탄화된 외알밀, 보리, 에머밀 알갱이와 콩과 식물의 흔적에서 알 수 있다. 느린 대형 포유류는 오래전에 멸종하고 빠른 포유류들이 많이 남았어서 주로 가젤을 사냥하였다. 단백질 섭취는 사냥에 의존했고 가축 사육의 흔적은 없다.

[토막 상식]
서남아시아에서 길들여진 8종류의 식물
<곡류>
에머밀(Emmer wheat)
외알밀(Einkorn wheat)
보리(Barley)
<콩류>
렌틸콩(Lentil)
완두(Pea)
병아리콩(Chickpea)
쓴살갈퀴(Bitter vetch)
<기타>
아마(Flax)
[토막 상식]
인간이 소비하는 식물은 거의 다 속씨식물이다.(꽃이 핌) 그중에서도 길들임에 성공한 곡식들은 식물학적으로 초본식물의 열매이다.
*속씨식물로 갈 수록 생식방법이 더 정교해짐.
출처: {루이스 다트넬, 오리진, 흐름출판, 2020, 102~104p}
출처:&nbsp;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magician_e&logNo=220451513057

<생활상>

사냥 도구로는 여전히 활을 사용하였다. 규석을 이용한 낫을 사용하였고, 처음으로 손도끼와 자귀가 등장한다. 식사용도로 바닥이 얇은 대접과 주발을 사용한다.

<장제문화>

매장 관행이 독특하며 죽은 사람을 택지 아래 혹은 벽에 매장하여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생활한다. 이러한 풍습은 초기 신석기 시대 근동 아시아에서 유럽 동남부에까지 퍼진다.

<주거지>

PPNA의 주거지는 이전의 나투프 수렵 채집 문화보다 훨씬 크며 유명한 예리코 탑과 같은 공동 구조의 흔적을 포함한다. 돌 기초와 테라초 바닥이 있는 둥근 반지하 주택이 특징이다. 흙과 짚으로 만든 벽돌을 햇볕에 말려서 원형 주거지를 짓고 진흙 모르타르로 함께 회반죽을 입혔다. 각 집은 폭이 약 5미터이고 진흙을 바른 덤불로 지붕을 덮었다. 집 내부에는 요리용 모닥불이 있었고, 암석을 가열하여 요리에 사용하였다. (후라이펜처럼) 거의 모든 정착지에는 돌이나 진흙 벽돌로 만든 붙박이형 보관함이 있었다.

곤충이나 설치류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고 환기가 잘 되게 바닥을 지면에서 띄워 놓은 곡식 보관창고가 있었다. 초기 촌락의 크기에 비해 큰 창고가 있었다는 것은 공동으로 이 창고를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 한다. (공동으로 기른 곡식을 한 장소에 저장) 하지만, 1,000년 정도 지나면서 이 저장 창고는 집 안으로 들이게 된다. (1층 저장 창고, 2층 생활공간)

이러한 변화는 소유권 및 사유재산 시스템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PPNA의 대표적 유적지로는 텔 에스-술탄(Tel es-Sultan)이라는 예루살렘 동부의 예리코라는 지역이다. (성경의 여리고) 세계 최초의 도시형 촌락이라 말할 수 있는 이곳에는 최대 2000-3000명의 인구가 거주했으며 거대한 돌담과 탑으로 보호되었다. 현재 심각한 전쟁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 성벽의 기능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다. 이곳은 완벽한 형태의 도시는 아니다. 도시라 말하려면 직업의 분화, 중앙집권적 형태의 권력, 도시를 보조하기 위한 주변의 여러 촌락 존재 여, 정치적 & 종교적 & 경제적 제도 등이 눈에 띄어야 한다. 따라서 기원전 4000년 이전까지는 완벽한 형태의 도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전에 도시라 일컫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도시형 촌락이다.

[토막 상식]
테라초: 돌의 파편을 다른 응착재와 석어 굳힌 뒤에 표면을 갈아 대리석처럼 만든 돌
예리코 탑: 높이 3.6m, 바닥 폭 1.8m가 넘는 거대한 돌담이다. 이 벽 안에는 높이가 3.6미터가 넘는 탑이 있었고 내부 계단에는 22개의 돌계단이 있었다. 성벽과 탑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었고, 100명을 동원해 건설하는 데 100일이 넘게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의식 목적(숭배 제의와 종교적 의미)으로 사용되는 탑과 함께 홍수에 대한 방어였다고 보여진다.
예리코, 출처:&nbsp; https://www.dcuci.univr.it/documenti/OccorrenzaIns/matdid/matdid025490.pdf
 
예리코의 집구조 형태, 출처:&nbsp; https://www.tandfonline.com/doi/pdf/10.1179/0075891415Z.00000000063
 
예리코의 집구조 형태, 출처:&nbsp; https://www.tandfonline.com/doi/pdf/10.1179/0075891415Z.00000000063

 

 

선토기 문화 A의 다른 유적지 - 차이외뉘 테페시(Çayönü Tepesi),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차이외뉘 테페시>

{출처: https://www.tf.uni-kiel.de/matwis/amat/iss/kap_a/advanced/ta_1_2c.html#_dum_33}

차이외뉘 테페시(Çayönü Tepesi)는 수천 년 동안 사람이 살았던 터키 남부의 신석기 정착지이다. (아래표 참조)

차이외뉘에서는 최초로 이뤄진 것이 여럿 있다. 돼지가 처음으로 길들여졌고 그 이후 양과 염소를 길들이며, 구리로 만든 가장 오래된 인공물이 발견된 곳이다. 또한 테라조 바닥(돌 조각을 시멘트 바닥에 압착한 후 광택을 낸 것), 직조 천(아마로 짠 린넨 직물) 및 여러 여성 조각상도 이곳에서의 발견이 가장 오래됐다.

 
차이외뉘 여신상과 구리 유물

<괴베클리 테페>

{출처: https://www.tf.uni-kiel.de/matwis/amat/iss/kap_a/advanced/ta_1_2b.html#_dum_2}

{박정재, 기후의 힘, 바다출판사, 2021, 153p}

1995년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가 발견한 괴ㅣ베클리 테페는 (Göbekli Tepe --> 터키어로 "Potbelly Hill") 언덕 위에 원의 모양을 가진 여러 겹의 돌기둥 집단이 모여 있는 유적으로 무려 200개 이상의 대형 돌기둥으로 구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T자형 돌기둥에 새겨진 조각의 형상들을 볼 때 사람들이 함께 모여 종교 행위를 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기원전 10,000년 신석기인들이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크고 복잡한 사원 혹은 성역에 해당하는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이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변이다. 당시 소수의 수렵·채집민이 무게는 10톤에, 높이는 6미터에 달하는 돌기둥 200여 개를 도대체 어떻게 운반했단 말인가? 운반 후에 돌기둥을 조각하고 세우는 작업은 또 어떻게 가능했을까? 심지어 괴베클리 테페 근처에는 주거지가 없었으며 대부분 그 근방에 살던 주민들이을 텐데, 어떻게 이 지역을 중심으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을까? 결국 직업과 계급의 분화까지 일부 진행되었을 정도로 이 지역에 정주하던 수렵채집민의 수는 많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수렵·채집이 주된 생계 방식이었지만 실험적 농경의 시행착오 또한 거듭하던 시기, 즉 정착 농경 생활로 이행하기 직전 단계에 만들어진 거대한 숭배 장소이며, 유적지의 크기가 뚜렷하게 커지는 모습은 당시 농경의 시작으로 인구가 급증하고 초기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방증한다.

괴베클리 테페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에서 숭배 의식 및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원형 시설물 내에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동물 뼈들로 봤을 때 일종의 대형 축제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T자형 기둥은 다른 유적지에서도 발견되기에 북메소포타미아 산간지역은 서로 복잡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공통의 문화를 향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정보와 물자 교환을 위한 교류의 장으로도 훌륭한)

이 시기는 PPNA에 속하지만 그 정교함으로 보면 PPNB 구조보다 더 정교하다. 하지만, 기원전 8,000~7,500년경에 괴베클리 테페는 조심스럽게 흙으로 덮인 후에 버려졌지만 그 이유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괴베클리 테페

 

야생 곡물이 길들여 지는 방식

{Bellwood & Peter, First Farmers, Blackwell, 2004, 115~116p}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131p}

<야생 곡물이 삶의 일부로 들어오는 과정>

(1) 수천수만 년간 서남아시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가끔씩 야생종의 밀과 보리를 먹었다. (존재를 알고 있었음)

(2) 영거 드라이아스 이후로 지구가 점점 온난화 되면서 서남아시아는 몬순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비가 상대적으로 많이 내리게 된다.

(3) 야생 상태의 밀과 보리가 자라기에 이상적인 환경 조건이 형성되어서 더 증식되어 퍼져나간다.

(4) 곡식은 키질을하고 껍질을 깐 뒤 익혀야 먹을 수 있었기에 자연 상태의 밀을 채집한 뒤 임시 야영지로 갖고 와 후처리했다.

(5) 곡식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곡식을 땅에 떨어트림으로써 더 많은 곡식이 자라게 된다. (초본식물의 열매를 인간이 매개가 되어 여기저기 퍼트린다. 화전농법도 도움이 되었다. 다른 식물들이 있던 자리에 밀과 보리가 그 땅을 독점할 수 있게 해줌)

(6) 밀과 보리의 수확기에만 근처에서 야영하던 사람들은 점차 그 주변에 정착하고 마을을 이뤄 본격적으로 농경에 발을 담근다.

<낱알이 굵어지는 과정>

고고학자인 Gordon Hillman과 Stuart Davies은 실험을 통해 야생 식물이 재배종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1) 현재의 쇠날 보다 날이 무딘 그때 당시의 돌날은(혹은 뼈날) 곡물을 베는데 수월하지 않았음

(2) 자르는 과정에서 잘 익은 곡물을 흔들게 되는데, 이러한 흔들림에 잘 견디는 형질은 상대적으로 외부 흔들림에 취약한 형질에 대비해서 인간에 의해 지속적으로 선택

(3) 인간에 의해 선택된 곡물의 씨앗이 다시 심어지면서 흔들림에 강한 형질은 계속 강화됨

(4) 인간은 선택한 곡물의 씨앗을 야생의 환경이 아닌, 잘 다져진 토양에 새로 심었고 그 지역에서는 선택된 곡물이 토양을 독점함(곡물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

(5) 낱알이 굵고 실한 작물은 자연의 상태에서는 수정되기 쉽지 않았겠지만, 인간은 선별적으로 낱알이 굵어질 때까지 기다린 뒤 작물을 수확했음 (수확을 의도적으로 연기)

(6) 낱알이 굵은 형질은 그렇지 못한 형질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선택

(7) 이러한 과정이 1000년 이상 반복됨

선토기 문화 B (Pre Pottery Neolithic B, PPNB) - 기원전 8,600 ~ 6,2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171~178p}

{쑨룽지, 신세계사1, 흐름출판, 2020, 75p}

{출처: https://aratta.wordpress.com/neolithic-revolution/}

{루이스 다트넬, 오리진, 흐름출판, 2020, 109p}

PPNB는 길들여진 동물, 다른 도구 세트 및 새로운 건축 양식을 더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서 PPNA와 다르다. 문화적 차이가 커서 북쪽인 유프라테스강 상류 지역의 문화가 유입되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PPNB시대의 특징을 미리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 가축화가 본격적으로 시작
  • 불을 얻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도구 사용
  • 사각형의 집에 바닥에 석회를 두껍게 바름
  • 석회의 사용이 토기의 발명을 유발
  • 장제문화에 큰 변화는 없으며 여전히 죽은자가 산사람과 같이 거주

<주거지>

주거 면적은 최대 100,000제곱미터 정도 되는 지역도 있었으며 수천 명이 거주했다. 가옥은 원형이 아닌 사각형이었고 내부 공간도 분리되었다. 이 기간 동안 주택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석회석에서 생성된 석회로 만든 고광택 흰색점토 석고를 바른 바닥의 두꺼운 층이다.

<생활상>

석회에 대한 지식은 토기의 발견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식물로 엮은 바구니의 면에 석회와 재 가루를 섞은 반죽을 발라 구우면 간단한 토기가 만들어짐) 다만, 본격적인 토기는 PPNB 시기 이후에 제작된다. 부싯돌을 날로 사용한 낫을 이용해 작물들을 수확한다.

<식량>

PPNB시기는 식량 확보 방식에 있어서 획득 경제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생산 경제로 이행되었던 시기이다. 식물 재배에 더 능숙해지며 서남아시아에서 길들여진 8종의 식물들의 재배종이 (야생종이 아닌) 발견된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가축화이다. 처음으로 염소(자그로스산맥 산기슭)와 양(토로스산맥 산기슭)을 길렀고 (개는 이미 오래전에 길들였으니 제외), PPNB의 말기쯤에는 소도 가축화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사냥만이 고기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시절은 지나가게 된다. 더불어 이들로부터 얻은 부산물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의 범위를 넓혀주었다. 이 시점부터는 초기적 형태의 농사와 가축 사육이 함께 연계되면서 비로소 농경이 수렵·채집보다 효과적인 체제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전에는 야생 동식물을 이용한 초기 농경 방식들이 생산성 측면에서 수렵·채집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확실히 PPNB가 끝날 무렵 (물론 아마도 훨씬 이전에 집약적인 사냥으로 인해 야생 종의 수가 감소했겠지만) 염소, 양, 소, 돼지와 같은 주요 가축들이 야생동물을 대체한 동물성 식량의 보완로써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점도 있다. 집약적으로 길러지는 가축과의 빈번한 접촉은 종간 장벽을 뛰어넘어 인수공통전염병을 만들어 다른 종의 세균을 인간에게 옮겼고, 이는 인간들을 병들게 했지만(특히 유라시아 대륙) 동시에 그에 대한 면역도 가지게 만든다.

  • 젖: 염소와 양으로부터 얻기 시작하였고 점차 그 범위를 소, 말, 낙타까지 넓혀나갔다. 동물의 젖은 지방과 단백질 그리고 칼슘이 풍부하였고, 젖을 이용해 만든 요구르트와 버터, 치즈는 장기간 보관이 가능했다. 젖을 내는 동물은 죽여서 먹는 것보다는 길러서 젖을 획득하는 편이 에너지 측면에서 더 이득이다. (4배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음)
  • 근육의 힘: 동물의 견인력은 사람 근육의 힘에 의존하던 과거의 일들에 추진력을 제공한다. 불모지인 땅을 개간하여 농사 면적을 넓힐 수 있었고(생산량을 증대), 운송 수단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운송 가능한 상품의 양이 늘어남)
[토막 상식]
가축화: 동물을 사육하는 것과 길들이는 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또한 길들여졌다고 해서 모두 가축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야생동물들은 갇혀 있게 되면 생식력을 잃기 때문에 갇혀있는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동물만이 가축이 될 수 있었다.

가축화가 가능한 동물들은 관리 가능한 크기여야 했고, 사회 구조에 비교적 순응하는 경향을 가졌으며, 성적으로 빨리 성숙해 번식이 가능했다.

농부들은 원하는 조건을 갖춘 개체만을 골라 번식시켰기에 야생 동물들의 모습은 점점 변해갔다. 관리가 쉬워야 했기에 크기는 점점 작아졌고, 천적을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뇌가 작아졌으며, 동족 간 짝짓기 경쟁이 필요 없어졌기에 암/수의 크기가 비슷해지고 경쟁에 필요한 긴 뿔도 사라진다.

가축화에 성공한 동물들 --> 사람이나 농장의 다른 동물들과 잘 지냄
  • 소: 야생 소보다 덩치가 작아짐
  • 염소: 뿔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염소 개체를 선택적으로 사육함
  • 고양이: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비사회적 동물
  • 돼지: 야생 돼지가 집돼지가 되면서 공격성이 줄고 근육질 어깨와 엄니가 사라짐
  • 양: 가축화되면서 털이 수북한 조건의 개체가 골라졌기에, 나중엔 두꺼운 털로 뒤덮임
  • 낙타
  • 라마
  • 알파카
  • 오리
  • 당나귀
  • 칠면조

길들일 수 있는 동물들 --> 위계적 사회구조를 가졌기에 인간의 통제를 받아들일 수 있음
  • 야생 소
  • 야생 염소
  • 늑대
  • 아프리카 야생 고양이
  • 야생 멧돼지
  • 야생 양
  • 몽골야생말: 현존하는 유일한 야생마
  • 멧닭: 오늘날 닭의 조상

길들일 수 없는 동물들 --> 여러 가지 이유로 길들이기 어려움
  • 들소: 너무 공격적
  • 가젤: 두려움을 쉽게 느껴 인간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함
  • 여우: 두려움을 쉽게 느껴 인간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함
  • 사자: 고양잇과 대형동물들은 엄청난 양의 고기를 먹여야 함
  • 혹멧돼지: 너무 공격적
  • 아메리카 큰 뿔양: 길들여지지 않음
  • 얼룩말: 너무 공격적
  • 백조: 너무 공격적
  • 하마
  • 코끼리: 성장 속도가 너무 느림
  • 판다
  • 하이에나: 이집트에서는 길들였으나 가축은 되지 못함
  • 개코원숭이

출처: 데이비드 크리스천, 빅 히스토리, 사이언스북스, 2017, 240~241p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은 다 비슷하다. 반면 길들일 수 없는 모든 동물은 각각 다른 이유로 길들일 수 없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총균쇠'

최초 가축화된 시기와 지역, 출처:&nbsp; https://www.worldhistory.org/image/12521/map-of-the-fertile-crescent/

<장제문화>

예리코에서는 해골을 석고 뜬 모습의 유물이 발견되는데, 죽은 자의 얼굴을 따라 만들려 했음으로 보아 조상 숭배에 대한 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사람의 머리뼈를 보전하는 종교로 추측) 대규모 공동 매장 시설이 존재했으며, 머리를 제거한 시신을 집안 바닥에 묻어 놓는 것도 여전했다.

PPNB의 문화는 기원전 6,200년에 일어난 8.2ka 한랭 이벤트를 겪고 급작스러운 종말을 맞이한다. 이후로 산기슭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며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의 넓은 저지대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

선토기 문화 B의 다른 유적지 -차탈회위크(Çatalhöyük)

{박정재, 기후의 힘, 바다출판사, 2021, 150p}

{출처: https://brunch.co.kr/@jingi8816r7o6/54}

차탈회위크는 중앙 아나톨리아의 언덕에 있는 고고학 유적지이며 기원전 7,500~5,700년 동안 유지되었다.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는 건조했지만, 차탈회위크는 선상지 위에 위치해 물과 야생 동식물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었다. 따라서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와 커다란 주거지가 형성될 수 있었다. 농경에 최적인 환경 덕택에 2,000년간 대대손손 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 계속 거주하다 보니 주거지 위에 또 다른 주거지가 발견되어 12번에서 18번 중첩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출처:&nbsp; https://www.choiws.kr/117

이 도시에는 최대 10,000명 (평균 5,000명에서 8,000명) 정도 거주했다고 한다. 차탈회위크는 무엇보다 독특한 주거지 구조로 유명하다. 높이가 다른 다수의 사각형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로, 남쪽의 메소포타미아 유적지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집과 집 사이에 통로가 없었고, 도로가 딱히 없어서 집 지붕에 입구와 사다리를 설치해 드나들었다.

출처:&nbsp; https://brunch.co.kr/@jingi8816r7o6/54
출처:&nbsp; https://kornan.tistory.com/13
출처:&nbsp; https://cdn.sci.news/images/enlarge/image_1681_1e-Catalhoyuk.jpg

또한, 이들은 바닥에 판석을 깔고 벽을 회반죽으로 칠했고, 벽에 벽화나 야생 들소의 머리와 같은 장식품을 걸어놓았다. 벽화도 화려했으며 안료로는 황토색의 빨강, 갈색, 노랑뿐만 아니라 구리 광물인 공작석과 남동석의 녹색과 파랑, 수은 광물인 붉은 진사를 사용했다.

출처: https://www.npr.org/2014/01/09/260918293/there-she-blew-volcanic-evidence-of-the-worlds-first-map

장제문화는 예리코와 차이외뉘 테페시의 것과 비슷하여 유골을 집안에 안치하였다. 이들은 부싯돌과 흑요석 창 끝, 화살촉, 칼, 광택이 나는 거울 등을 제작할 수 있었고 특히, 흑요석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탈회위크 근처에는 흑요석 공급원인 쌍둥이 원추형 화산이 15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이 용암지대에서 흑요석을 채취한 후 가공하여 다른 도시와 교역했을 것으로 보인다. (흑요석: 강도가 강하여 석기를 만드는 연장으로 사용함)

선토기 문화 C (Pre Pottery Neolithic C, PPNC) - 기원전 6,200 ~ 5,500년

{출처: https://www.brown.edu/Departments/Joukowsky_Institute/courses/architecturebodyperformance/326.html}

PPNC의 대표 도시인 아인 가잘(Ain Ghazal)은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아인 가잘에는 사람들이 기원전 7,250~5,00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2,000년 동안 거주했고, 최대 크기 때는 15헥타르(15만 제곱미터)에 다다라 근동에서 가장 큰 선사 시대 정착지 중 하나였다.

<식량>

이 시기에는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식량 조달을 위해 자급 농업과 사냥을 병행하였고,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뼈의 흔적으로 보아 양(PPNB시기), 돼지(PPNC시기), 소(PPNC 후기)를 가축화하여 길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또한 밀 보리, 렌즈콩, 완두콩, 병아리콩도 재배했다.

<장제문화>

아인 가잘의 매장 관행은 다른 레반트 지역의 패턴과 유사하며 일반적인 경우 매장은 집 바닥이나 안뜰에 하였다. 시체는 초기 매장 후 제거된 두개골과 함께 구부러진 자세로 보관되었다. 하지만, 어린 청소년 및 일부의 성인 매장의 경우 다양한 자세로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었으며 항상 두개골이 존재하고 신체에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인에 대한 다양한 대우와 존경을 나타내는 사회적 구별이 있었음을 암시할 수 있다.

묻힌 두개골의 대부분은 석고로 처리되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얼굴 특징으로 성형되었다. 크고 눈에 띄는 것으로 묘사되거나 잠이나 죽음을 나타내는 닫힌 것처럼 보이는 눈에 초점이 있다.(일부 두개골도 색도 칠해졌다) 몸에서 분절된 두개골은 같은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모여서 묻힌 채 발견된다.

<예술>

아인 가잘의 가장 흥미로운 발견 중 하나는 오랫동안 버려진 집의 바닥 아래에 의도적으로 묻힌 석고 조각상이다. 조각상은 모두 의인화되어 있으며, 회반죽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아인 가잘의 거주지 벽과 바닥을 덮는 데 사용되었던 것과 동일하다. 인물의 머리는 강조되어 전체 조각상 크기의 약 1/5에서 1/6을 나타내며 앞머리 위에 오목한 특징이 있다.

 
출처:&nbsp; https://www.dcuci.univr.it/documenti/OccorrenzaIns/matdid/matdid025490.pdf

선토기 문화 이후

{Bellwood & Peter, First Farmers, Blackwell, 2004, 127~129p}

선토기 문화 속에서 잉태한 농업은 경제적 관점에서는 대전환이었고, 농업의 발전이 있었기에 인류는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농업의 발전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불러온다.

예를 들면 몇 천 년 지속된 인구 증가, 삼림 개간, 토양 경작, 동물 방목 및 토지 황폐화, 초목 손실, 염분화, 침식 및 일반적인 자원 감소를 들 수 있다. (+8.2ka 한랭 이벤트에 의한 건조화)

번성했던 아인 가잘에서는 영아 사망률이 증가했고, 작황이 좋지 않자 더욱 가축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로 기르던 염소와 염소들의 사료인 콩과 식물 종의 중요성이 증가한다. 이러한 결과는 기존의 경제 방식을 버리고 목축 경제로의 전환과 그에 따른 인구 감소 또는 분산을 초래한다. 마찬가지로 번성했던 아부 후레이라는 전성기 시절과 비교했을 시 훨씬 더 적은 밀도의 주택과 함께 그 크기가 약 절반으로 다시 축소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기원전 5000년경에는 삶의 방식을 바꾼 레반트의 주민들이 (농업 -> 목축) 팔미라 분지 및 아라비아 북부와 같은 사막/오아시스 지역으로 점점 퍼져나간다. 이런 식의 정착지 포기와 목축으로의 전환은 지역 간 상호작용을 활발하게 만들었고 인구를 분산시켰다.

신석기 시대의 특징 중 하나인 토기 사용이 레반트 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정주민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이동하는 목축 생활을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서남아시아의 초기 농업 공동체는 2,000년의 잉태 기간을 거쳐 북동 아프리카, 유럽, 중앙아시아 및 인더스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그렇게 그들이 알고 있던 지식(농업)은 점점 더 확산된다.

 

마무리

수렵&채집에서 농경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이 걸렸고, 선조들이 써 내려간 삶의 투쟁의 증거를 유적지와 유물을 통해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아라비아반도는 나에게는 참 낯선 땅이지만, 역사의 관점에서 이 지역의 변화를 읽지 못하면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도 많기에 일부러라도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땅이기도 하다.

추후에 역사 설명의 무대를 유럽으로 옮겨 (그리스-로마) 진행이 되더라도 비슷한 비중으로 서남아시아를 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Part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동쪽에서 꽃피운 신석기 시대에 대해 마저 설명하겠다.

 

<참조한 서적>

  •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헤르만 파르칭거, 글항아리, 2020.03.20.)
  • 빅 히스토리(데이비드 크리스천, 웅진지식하우스, 2022.12.23.)
  •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5.11.23.)
  • First Farmers Paperback(Bellwood, Blackwell, 2004.12.07.)
  • 오리진(루이스 다트넬, 흐름출판, 2020.09.20.)
  • 신세계사1(쑨룽지, 흐름출판, 2020.01.20.)
  •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클라이브 폰팅, 2019.12.27.)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062785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