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5 - 신석기 시대 (비옥한 초승달 지대 동쪽)

신석기 시대 종합 세트인 정착생활, 농사, 가축사육 기술은 서쪽에 살던 레반트 지역 사람들에 의해 통째로 동쪽에 전수된다. 그리고 그 지식을 이어받아 신석기 시대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토기의 탄생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 동쪽에서 이루어진다. 이번 Part에서는 미쳐 끝내지 못한 동쪽 지대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자. 비옥한 초승달 지대 동쪽의 문화별 연대는 아래와 같다.

출처:  https://alisariramart.files.wordpress.com/2014/04/screenhunter_4766-apr-23-13-50.jpg
 

 

<동쪽 - 자그로스산 기슭 +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 자르지아 문화: 기원전 18,000년 ~ 8,000년
  • 믈레파트 문화: 기원전 9,000년 ~ 8,000년
  • 자르모 문화: 기원전 7,090년 ~ 4,950년 --> 최초의 토기사용 문화
  • 하수나 문화: 기원전 6,500 ~ 5,900년
  • 사마라 문화: 기원전 6,500년 ~ 5,900년
  • 할라프 문화: 기원전 5,900년 ~ 5,300년
  • 우바이드 문화: 기원전 5,300년 ~ 4,100년 --> 추후 고대 파트에서 다룰 예정
  • 우르크: 기원전 4,500년 ~ 3,100년 --> 추후 고대 파트에서 다룰 예정

<동쪽 - 자그로스산 기슭>

서남아시아 3D 지도, 출처:&nbsp; https://fineartamerica.com/featured/middle-east-syria-iraq-3d-render-topographic-map-color-frank-ramspott.html ( made by Frank Ramspott)

 

자르지아 문화 (Zarzian culture) - 기원전 18,000 ~ 8,000년

자르지아 문화는 북쪽으로는 코카서스의 코비스탄까지, 동쪽으로는 이란까지 뻗어 있으며 이라크, 이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후기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의 고고학 문화로 많은 세석기가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 형태는 짧고 비대칭인 사다리꼴과 속이 빈 삼각형)

시기적으로는 레반트의 케바란 + 나투프 문화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연관성은 같은 지역의 선행 문화였던 바라도스티안 문화(자그로스 지역 특색이 묻어있는 오리냐크 문화)와 캅카스산맥의 아래쪽에 위치했던 이메레티 문화에 더 가깝다.

자르지아 유적지는 몇 개에 불과하며 이 지역은 인구가 매우 희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동물이 야생조류, 붉은 사슴 및 염소 등 인것으로 보아 수렵채집을 통해 생존했음을 알 수 있고 길들여진 개의 잔해와 활과 화살 등이 발견된다.

자르지아 문화는 M'lefaatian 문화로 이어진다.

믈레파트 문화 (M'lefaatian culture) - 기원전 9,000 ~ 8,000년

믈레파트 유적지는 이라크의 도시인 모술에서 동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곳에 있다. 자르지아 문화에서 파생됐다고 추정되는 믈레파트 문화는 두 문화 간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여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유적지에서는 땅속으로 파묻힌 원형과 타원형 집 10채가 확인됐다. 또한 화덕, 점토 벤치 및 석고 흔적, 600개의 부싯돌 인공물이 발견되었다.

믈레파트 문화의 특징으로는 잘 다룬 세석기 유물이 있고, 식생 특징으로는 소, 양, 가젤, 멧돼지, 새를 사냥하고 민물조개, 민물 게, 육지 달팽이, 물고기를 채집하는 등 야생 식량 자원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야생 곡물도 식단의 일부를 차지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자르모 문화 (Jarmo culture) - 기원전 7,090 ~ 4,95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219~220p}

서남아시아의 최초로 토기 사용이 발견된 문화는 자르모 문화이다. 토기 사용 이전 시대가 어떻게 해체되었고 토기 사용 시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아직 연구가 많이 필요하지만, 기원전 6,000~5,500년이 되면 PPNB & PPNC의 중심지역이었던 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Part4에서 언급한 것처럼 몇 천 년 지속된 인구 증가, 삼림 개간, 토양 경작, 동물 방목 및 토지 황폐화, 초목 손실, 염분화, 침식 및 일반적인 자원 감소, 8.2ka 한랭 이벤트 등이 원인 제공을 하여 정주민들이 정착지를 떠났을 거란 추정뿐이다.

<생활상>

자르모 문화에서 만들어낸 토기는 매우 단순한 형태이며 두껍고 무늬가 없다. 또한, 식물성 재료를 섞어 점토 비율을 낮추어 만들었다. 뼈바늘로 옷을 꿰매었고, 진흙으로 만든 물레 가락 손잡이가 있는 것을 보면 아마와 양털로 실을 잣거나 뜨개질을 할 줄 알았을 것이다. 다양한 용구와 용기가 식재료의 수확, 가공 및 저장을 위해 제작되었다. 농경도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식량으로는 에머밀, 외알밀, 보리, 렌틸콩을 재배했고 염소와 양 그리고 돼지를 가축으로 길렀다. 흑요석 도구도 발견되었으며(석재 도구의 40%가 흑요석) 이 원산지는 아나톨리아 동부였으므로 확인되었는데 원거리 무역이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흙으로 만들 목걸이, 대리석 팔찌, 조개껍데기 귀걸이를 하고 다녔으며, 풍만한 여성상이 오천 점 넘게 발견됐다.

<식량>

재배된 밀과 보리의 탄화된 이삭과 낟알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농업 활동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염소만이 가축화 되었고, 양은 가축화가 진행중이었다.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해 사냥도 병행했으며, 달팽이 껍질이 많이 발견된다.

 
서남아시아 3D 지도, 출처:&nbsp; https://fineartamerica.com/featured/middle-east-syria-iraq-3d-render-topographic-map-color-frank-ramspott.html ( made by Frank Ramspott)

 

자르모 문화 위치
자르모 문화, 흑요석

<주거>

주거 유적지에서는 150명 정도 살았던 작은 마을의 흔적을 발견하였으며 손으로 만든 점토 진흙 벽으로 지어진 'tauf'로 알려진 25채의 집이 있었다. 벽은 석회석으로 만든 돌 기초 위에 지어졌고, 집에는 문, 창문, 굴뚝이 있는 빌트인 오븐이 있었다. 이는 오늘날까지 근동 아시아의 전통적 건축 형태이다.

자르모 문화의 집 모형
그림에 나온 각 문화별 시기는 무시

 

하수나 문화 (Hassuna culture) - 기원전 6,500 ~ 5,9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222~225p}

하수나 문화는 이라크 모술의 남쪽에 위치한 신석기 시대 문화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형성에 일조하는 가장 초기 문화 중 하나이다. 소량의 강우에 의지한 건조 농업이 이루어졌다. 하수나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의 북부에서 기원전 6,500~5,900년경 지배적인 문화였지만 5,900년 이후에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단지, 지배적인 문화가 되지 못했을 뿐이다.

<거주지>

하수나 문화의 사람들은 안정된 생활 방식을 가졌다. 마을의 최대 인구는 약 500명이었고 집은 직사각형이었으며 대부분 방이 하나 이상이었다. 작업과 생활을 위해 바닥을 회반죽으로 칠한 작은방, 저장실을 갖고 있는 건축물들이 서로 붙어 있어서 지붕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집안에서 할 수 없는 작업들은 대부분 지붕 위에서 실시했다. 가옥에는 화덕, 의자, 단상 등을 설치해놨다.

또한, 회반죽을 칠하지 않은 벽과 미완성 흙바닥이 있고 작고 네모난 방이 줄지어 있는 공동체의 저장 건물이 발견되며 이곳에는 2,400개의 구운 점토 슬링 미사일과 100개의 큰 구운 점토 공이 있어 사냥용 무기고의 역할도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찌 되었든 이것을 구축하기 위한 공동체의 조직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생활상>

거주지 내부에서는 갈돌, 토기, 규석과 흑요석 도구, 바늘, 뼈 도구, 구슬 등이 발견된다. 흑요석은 역시 아나톨리아 동쪽에서 수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엄청난 양의 토기를 만들었고 냄비, 그릇, 잔에 빨간색 페인트를 사용하여 선형 디자인을 만들었다. 내용물이나 소유권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는 도장이 발견되며 이런 사실로 볼 때 당시의 사람들은 본인 몫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있었고 이를 지키기 위한 법적 규율도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방추가 발견되어 집안에서 직물 제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악기인 피리도 발견된다.

 

<식량>

하수나 사람들은 보리와 밀을 재배함과 동시에 상당한 양의 사냥을 했다. 그들이 사냥감은 야생 당나귀와 가젤이 포함되었고 양, 염소, 돼지와 같은 동물들은 길들여서 길렀다.

<장제문화>

어린이 해골이 특징인데, 토기 항아리 안에 담아 집 안 바닥, 문지방, 벽에 묻었다. 반면에 어른 유골은 주거지 밖에 매장하였다. 부장품은 토기와 동물 뼈, 구슬 등을 넣었다.

사마라 문화 (Samarra culture) - 기원전 6,500 ~ 5,9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226~227p}

{출처: https://www.historyfiles.co.uk/FeaturesMiddEast/MesopotamiaPrehistory03.htm}

사마라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형성 과정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신석기 문화였다. 하수나 문화와 비슷한 시기를 공유하며 중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부에 많은 부분이 겹치긴 했지만 더 남쪽인 티그리스 중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많은 사마라 정착지는 우천 지역의 한계 너머에 위치했으며 성공적인 농업에 필수인, 간단한 관개 기술이 처음 개발된 곳이었다. 농업은 이 관개 기술을 발전시킨 사람들과 함께 점차 남쪽으로 퍼졌다. 남쪽 지역은 강우량이 적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많은 양의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관개 시설을 개발해야 했다.

관개 기술로 인해 건조한 지역에서 농업이 가능했고, 자연적인 환경에서는 절대 번성하지 못했을 작물들을 관개 기술 덕분에 길러낼 수 있었다. 물론, 관개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생산은 이루어졌으며 아마포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섬유로 아마(아마씨)를 생산할 수 있었다.

농경을 행했던 부지는 자연 범람이 일어나더라도 물이 가장 쉽게 흐르고 배수될 수 있는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 지역에는 관개를 위한 운하의 건설 및 사용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농경이 가능한 땅을 넓혀가는 활동은 토지에 대한 더 많은 투자, 더 큰 영속성, 토지 소유권의 개념을 키우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결과물은 사회적으로 분업과 갈등해결 장치가 있었음을 짐작게 하지만, 그 규모를 봤을 때 아직까지는 강력한 개별 리더십이나 복잡한 사회 조직은 존재하지 않은 비교적 소규모 사회였다고 추정된다.

<식량>

생계는 재배된 밀(에머밀과 빵밀)과 보리를 기반으로 했다. 정착민들은 양, 염소, 돼지, 소를 키웠고 티그리스 강에서 낚시와 조개 채집을 했다. 사냥과 야생 식물의 채집도 있긴 있었지만 농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토기 발전>

사마라 문화의 토기는 역동적인 스타일로 칠해졌으며, 흐르는 머리카락, 염소, 사슴, 전갈 및 기타 많은 동물을 가진 춤 추는 소녀를 묘사하기도 했다. 매우 정교한 여성 조각상도 만들어졌으며 얼굴에는 페인트나 문신 장식이 있었고 정교한 머리 장식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토기들은 회전반을(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용해 만들어졌으며, 전문가의 손길이 묻어난 작품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진다. 이는 일부 인원들이 현장에서 일상적인 노동으로부터 이미 자유를 얻고 나름의 전문 직업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농경의 생산성 증가로 인해)

 
사마라 문화의 토기, 출처:&nbsp; https://www.smb.museum/en/exhibitions/detail/samarra-revisited/

 

<거주지>

가장 큰 정착지는 약 6만 제곱미터까지 확장되었고 거주 인구는 약 1,000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라의 T자형 주택 건축 스타일은 하수나 문화와 유사하다. 주택은 모두 외부 부벽이 있는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는 모서리와 지붕 빔을 지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열린 안뜰 주위에 집이 세워졌으며 곡물 창고, 오븐 및 가마가 포함되었다.

<생활상>

사마라 문화의 경제는 인장과 같은 복잡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토기에 개별 장인의 가능한 표시가 있어 공예의 전문화 수준을 짐작게 한다. 또한 특수한 표시로 누가 선박을 만들었고 누가 의뢰했는지 등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는 대규모 생산 및 운송이 이루어지는 시장이 존재했고 상품의 주인이 혼동되면 안 됐기에 필요했을 것이다. 사마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제한된 양의 구리는 아마도 구리와 토기를 대상으로 장거리 물물교환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유적지1> 텔 에스-사완(Tell es-Sawwan)

사마라 주거 유적지로부터 남쪽에 위치한 텔 에스-사완(Tell es-Sawwan)의 인구는 수백 명 정도였다. 주택은 크기와 디테일이 상대적으로 균등하여 거주자별 사회적 지위는 딱히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물품도 약간의 차이만 존재하며 마찬가지로 개인 간의 부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적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사원처럼 보이는 몇 개의 큰 건물(최대 17개의 방을 포함)이 발견되는데, 이는 의식을 위한 조직 또는 리더십은 존재했음을 나타낸다. 이 도시는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슬링 미사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운 점토 공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외부의 습격에 대한 방어 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텔 에스-사완 상상도

어린이 55명, 청소년 16명, 성인 13명이 대형 건물 아래 매장된 것이 발견되며, 아이들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영아 사망률이 높은 산업화 이전 인구의 특징이다. 대부분은 설화석고 여성 조각상, 설화석고 그릇, 구리와 청록색 구슬이 포함된 장신구, 세라믹 냄비를 포함한 적어도 하나의 물건과 함께 묻혔다.

부장품이 대량으로 발견되는 무덤은 딱 1곳 발견된다. (성인 남성) 그의 무덤은 특별한 방에 꾸며진 유일한 무덤이었고 일종의 마을 지도자였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곳의 매장지는 동시대의 다른 유적지보다 풍부하며, 이는 정착지 내의 그룹이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부를 획득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적지2> 초가마미 (Choga Mami)

꽤 큰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마라 유적지의 또 다른 예는 사마라 남쪽 가장자리에 있는 초가 마미이다.

이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운하 시스템의 잔해와 개량되어 낱알이 많은 보리, 밀, 큰 종자 아마와 같은 개량 작물이 발견되는데 이는 관개에 대한 가장 초기의 증거이다. 사마라와 마찬가지로 사이트는 최대 6만 제곱미터에 달했으며 최대 1,000명을 수용했다.

관개시설의 설치는 특정한 사회구조가 있어야 가능하다. 관개 시설에 대한 기술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직접 공사의 지휘를 맡거나, 결정권자에게 조언을 해줄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직의 형태는 전문지식을 가진 소수의 인원들이 존재했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었다.

텔 에스-사완의 후기 수준과 마찬가지로 초가마미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L자형 방어 입구와 사이트 입구 하나를 지키는 탑이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 국방은 분명히 심각한 관심사였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증거는 이들이 상당한 규모의 방어를 구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조직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초기 수준의 리더십이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초가마미가 번성했던 시기는 장차 사회적 위계와 이에 따른 원시 정치 제도들이 발달하기 위한 토양이 형성되는 때였다. 사마라 문화는 5,900년 까지 메소포타미아 중부지역의 지배적인 문화가 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할라프 문화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그렇다고 사마라 문화가 자취를 감춘것은 아니다. 초가마미의 관개수로 기술은 기원전 4,800년에 우바이드 문화에 영향을 줄 수 있었을 정도로 해당 지역에 오래 남아있었다. (단지, 그 지역의 지배적인 문화 지위를 잃어버렸을뿐)

할라프 문화 (Halaf culture) - 기원전 5,900 ~ 5,3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228~229p}

{출처: https://www.historyfiles.co.uk/FeaturesMiddEast/MesopotamiaPrehistory04.htm}

할라프 문화는 시리아 북동부의 카부르 계곡에 있는 텔 할라프(Tell Halaf) 유적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곳은 발전하면서 처음 몇 세기 동안은 유프라테스 강 동쪽에 집중되다가 서쪽으로 타우루스산맥 기슭을 향해 시리아 북부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반 호수(Lake Van)와 사마라 사이의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티그리스 강과 자그로스산맥 사이의 간격을 메웠다.

할라프 문화는 초기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화와(사마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오히려 타 지역에서 새로운 정착민이 유입하여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할라프 문화 범위, 각 문화별 시기는 무시

<거주지 & 장제문화>

이곳의 건축물로는 직경이 10미터를 초과하는 햇볕에 말린 점토로 지어진 돔형 원형 건물이 특징이다. (사원이었을 가능성) 이러한 둥근 돔형 구조는 석회암 바위 또는 진흙 및 짚과 같이 현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할라프 문화 건물, 출처:&nbsp; http://journals.ed.ac.uk/lithicstudies/article/view/966/1584

할라프 문화에서는 새로운 매장 관습이 발견된다. 죽은 자들은 땅속의 갱도에 비치된 무덤에 묻혔으며, 부장품을 부수는 의식과 집 바닥 아래 냄비에서 만들어진 재를 매장하는 등 복잡한 의식의 증거도 있다.

<토기>

할라프는 지금까지 이 근방에서 만들어진 것 중 가장 훌륭한 토기를 생산했다. 할라프 도예가들은 이웃 지역의 다양한 점토를 사용했으며 정교하고 아름다운 우수한 품질의 토기를 생산했다. 각 사이트는 자체적으로 토기를 만들기도 했지만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수입을 하기도 했다.

 
할라프 문화 토기, 출처:&nbsp; https://alisariramart.wordpress.com/the-pottery-of-ancient-tell-halaf-of-mesopotamia-and-my-ceramics/
 

토기는 광택 처리된 담황색 배경에 검은색, 갈색 또는 빨간색으로 정밀하게 칠해진 단색 또는 다색 마감 처리를 했다. 이러한 종류의 토기는 할라프 이전 시대의 전형이었지만 할라프 문화는 이를 계승하고 계속 만들어냈다. 이러한 고급 토기는 지역 엘리트들 사이에서 명품으로 취급되어 교환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할라프 문화 내에서는 아름답게 칠한 토기뿐만 아니라 구운 점토로 된 여성 조각상과 돌로 도장을 찍는 인장도 만들었다. 인장은 나중에 소유권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유 재산 개념의 발전을 나타내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들은 또한 보석을 수입했다. 텔 아르파치야(Tell Arpachiyah)에서 발견된 것 목걸이 장신구는 6개의 흑요석 구슬과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수입해야 했던 재료인 흑요석을 모방한 어두운 점토로 구성되었다. 카우리 껍질은 걸프에서 왔으며 원래 붉은 황토색을 포함했다.

할라프 문화 - 목걸이

<생활상>

이들은 에머 밀, 두 줄 보리 및 아마를 재배하는 건식 농업 (관개의 도움 없이 자연 강우량 기반) 이었고, 소와 양 그리고 염소를 키웠다. 할라프 문화 내의 충돌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으며 그나마 슬링 총알이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쟁보다는 사냥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할라프 때는 구리를 채굴해 가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기시대 (순동 시대라는 명칭으로도 부르며, 비공식적으로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있었던, 인간이 금속을 다루기 시작했으나, 아직 청동과 같은 합금을 다루진 못했었던 시기로, 대신에 비교적 순수한 금, 은, 동 등으로 만든 도구를 사용해왔었던 시대로 정의된다)로 간주된다.

 

마무리

우바이드 & 우루크 문화까지 작성하려 했으나 이 부분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초입인 수메르 문명과 연관이 있기에 추후에 다루려 한다. 자그로스산 기슭과 그 남단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에 존재하였으며 토기가 처음으로 생산된 이 지역을 다룬 자료가 전무하기에 해당 기간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포스팅이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다음 Part에서는 서남아시아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신석기 문화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참조한 서적>

  •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헤르만 파르칭거, 글항아리, 2020.03.20.)
  • 신세계사1(쑨룽지, 흐름출판, 2020.01.20.)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077177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