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6 - 신석기 시대 (유럽 & 이집트)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환메소포타미아 유역을 제외하고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수렵채집인의 생존에서부터 농업에 이르는 '시간적 연속성'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적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기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고고학적 유적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정적인 자료를 가지고서도 역사학자들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을 내놓았으니 참고삼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세계 각 지역별 농경의 출현 시기는 아래와 같다. 이번 Part에서는 유럽과 이집트의 농경 출현 & 문화적 특징에 대해서 살펴볼 예정이다.

<농경의 출현 장소와 시기>

서남아시아(비옥한 초승달 지대) : 기원전 9000년경

이집트, 수단(나일강 유역): 기원전 8000년경

중국(양쯔강 & 황허강 유역): 기원전 7000년경

오세아니아(뉴기니 고지대): 기원전 7000년경 ~ 4000년경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기원전 3000년경 ~ 2000년경

인더스강 유역: 기원전 2000년경

메소아메리카(멕시코 중부): 기원전 3000년경 ~ 2000년경

남아메리카(안데스 산맥, 아마존 유역): 기원전 3000년경 ~ 2000년경

북아메리카(미국 동부): 기원전 2000년경 ~ 1000년경

유럽: 기원전 6000년경 ~ 4000년경

출처:&nbsp; http://topofly.blogspot.com/2012/07/skara-brae-masive-to-macro.html
전세계 농경의 확산, 출처:&nbsp; https://slideplayer.com/slide/8002434/ &nbsp;ⓒ Bedford/St.Martin's

<유럽>

농경의 확산이 있기 전 유럽 상황 - 기원전 16,000 ~ 8,500년

{출처: https://www.britannica.com/topic/history-of-Europe/Mesolithic-adaptations}

유럽의 북부를 짓누르던 스칸디나비아 빙상이 북쪽으로 후퇴하였고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갔지만, 대륙을 누르던 얼음의 무게가 제거되면서 육지의 상승으로 그 영향은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그래서 해수면이 올라간 수준은 지금의 프랑스와 영국 사이가 바다에 의해 분리되는 정도였다.

척박하던 스텝-툰드라 지형은 기온과 습도가 높아지면서 자작나무와 소나무, 견과류와 열매를 맺는 작은 나무와 덤불을 포함한 식물이 자라는 땅이 된다. 계속되는 온도 상승은 더 많은 환경 변화를 불러왔고, 숲의 형성 초기에 번성했던 작은 초본식물들은 사라지고 점점 참나무와 느릅나무가 우세한 숲으로 바뀐다. 동물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다. 들소와 매머드, 털 코뿔소 같은 빙하기의 큰 동물들은 기후 변화와 과도한 사냥으로 인해 자취를 감췄고, 그나마 살아남은 순록 무리는 더 추운 조건을 찾아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떠난 유럽의 숲은 야생 소, 돼지, 붉은 사슴, 노루와 같은 작은 동물들이 터를 잡았으며 남쪽에는 아이벡스가(절벽에 사는 산 염소) 자리 잡았다.

순록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일부 인간 그룹도(중석기 시대에 해당) 북쪽으로 이동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게 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은 이용 가능한 새로운 동식물 자원에 적응했고, 활과 화살을 이용하여 야생 소, 사슴, 돼지뿐만 아니라 많은 종류의 새를 사냥해 식량으로 사용하였다. 해양자원도 주요 식량 중에 하나로써 연어와 잉어와 같은 민물고기와 해안가 근처에서는 바다 물고기, 서해안에서는 조개류를 채집하였다. (카누와 노, 낚싯바늘·그물 발견됨) 식물성 식량은 헤이즐넛과 다양한 베리 종류를 먹었던 증거가 일부 발견되었다.

중석기 시대에 속하는 인간들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대부분 정착 생활을 하지만 식량 확보를 위해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수한 종류의 암석 교환이 이루어졌으며(장거리 교환), 이를 통해 광범위한 소셜 네트워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 중석기 시대의 특징

유럽의 빙상 후퇴 우측에서 좌측 순, 출처:&nbsp; https://en.wikipedia.org/wiki/Early_Holocene_sea_level_rise#/media/File:Doggerland3er_en.png
Younger Dryas 시기때의 유럽, 출처:&nbsp; https://www.esd.ornl.gov/projects/qen/nercEUROPE.html
기원전 9000~8000년
기원전 7000~5000년

 

유럽 지역의 농경 확산 - 기원전 8,500 ~ 4,000년

{Bellwood & Peter, First Farmers, Blackwell, 2004, 131p}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 민음사, 2019, 116~118p}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235~377p}

유럽에서 농경의 전파는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수천 년에 걸친 확산이었다. (1년에 1km씩 서쪽 혹은 북서쪽으로 가는 속도였음) 기존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중석기 시대 유럽인들이 (40,000년 전 도착했던 호모사피엔스) 이들을 환영했을지 배척했을지는 의문이지만 두 집단은 뒤섞이게 된다. 그리하여 유럽의 여러 지역에 존재하던 수렵채집인의 중석기 문화는 농경민들이 도착한 순간 유전학적 기록과 고고학적 기록 모두 사라지게된다.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여러 가지이다. 수렵채집 집단이 농경을 택했을 수도 있고, 농경 집단이 갖고 있던 높은 출산율을 기반으로 그 인구 차이가 불러온 힘의 논리에 밀려 살육의 과정이 있었을 수도 있고, 의도치 않게 농경 집단이 가진 질병이 수렵채집 인구를 병들게 했을 수도 있고, 상호 교배가 있었을 수도 있다. 네 가지 모두 가능성이 있고 지금 상상해도 벌어졌을 법한 일이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네 번째 가설인 '뒤섞여 양쪽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이 지속적으로 퍼졌음'에 더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이 시작된 후 수 세기 또는 수천 년 동안 수렵 채집을 업으로 삼던 인구는 항상 남아있었다. (메커니즘 측면에서 보면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의 유럽 식민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입된 신석기인들의 가장 큰 장점은 중석기시대의 생활방식과는 다르게 적은 토지와 이동이 없이도 충분히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동력이 뒷받침된다면) 덕분에 필연적으로 사회가 복잡하게 발달하면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또한, 농경이 시작된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그 서쪽인 아나톨리아 & 발칸반도는 위도가 비슷하다.(더 나아가 서유럽까지) 그리고 비슷한 위도는 상대적으로 유사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장점으로 나타난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며 같은 위도인데 고산지대로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짐) 왜냐하면, 농경에 적합한 식물종은 한정되어 있는데 유라시아 대륙은 동서로 길고 위도가 비슷하기에 기후가 유사해서 종의 확산(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이 잘 이뤄진다. 반면에, 위도 차이가 나는 지역들은 달라진 기후에 적응이 필요해 전파 속도가 느리다. 이 덕분에 농경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던 서남아시아 농경민들은 불어나는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한 새로운 땅을 찾아 +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8.2ka 이벤트)에 대응하기 위해 각각 북진, 서진을 한다. (키프로스 섬에는 PPNB 시기에 먼저 당도함)

유럽의 신석기인들의 기본 식량은 에머밀, 외알밀, 보리였다. 이들은 곡물을 이용해 빵을 굽고 죽을 끓였다. 아마로는 기름과 실을 만들었고(동물의 털과 가죽이 아니어도 옷을 짤 수 있었음) 양념과 치료제로 양귀비를 사용한다. 또한 완두콩 및 렌틸콩과 같은 고열량의 콩과 식물들도 이들의 에너지를 보충해 준다. 맛이 좋고 비타민이 풍부한 야생식물(딸기, 버섯, 사과, 체리, 딱총나무, 견과류, 약초 등)들도 즐겨 먹었다.

신석기인의 평균 수명은 20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10~50%에 달하는 높은 유아 사망률 때문에 나타나는 평균의 함정이다. 유아 사망이 극에 달하는 기간만 지나면 40세까지는 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과 비교했을 시 초보적인 수준의 의료적 처치(처치를 받은 뼈 골절 회복 유골, 해골을 열기 위해 뚫었던 구멍 등)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그들은 짧은 여생을 살다 갔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지만 결국엔 선형 토기 문화와 비커 문화로 양분되고 나서, 신석기시대의 말엽인 기원전 2800~2200년 사이에는 보존된 주거 유적지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활동 지역에서 불연속점이 생김) 다만, 꽃가루 분석 결과로 볼 때 사람들이 매우 밀집해서 살았음을 발견해 냈다. 또한, 이 전 시기에 비해 목축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늘어난다. (소의 사육이 현저히 증가)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유럽으로의 농경 기술 전파(기원전 7000~4000)와 유럽어가 퍼지는 것(기원전 3000~1000년)은 시기상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설명할 것은 유럽으로의 농경 기술 전파 즉 초기 유럽 농부 EEF(Early European Farmers)의 형성 과정만을 의미하며 인도유럽어족이 퍼지는 것은 고대사 파트의 '유목 민족과 인도유럽어족' 글을 참고 바란다.

본격적으로 농경의 확산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확산 과정>

출처:&nbsp; Map: Expansion of farming in western Eurasia, 9600 - 4000 cal BC (update vers. 2021.2),&nbsp; Detlef Gronenborn

서진한 농경민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던 발칸반도의 해안가(크레타 섬 + 에개해 주변) & 아나톨리아의 서쪽 지역에 기원전 6700~6600년에 당도한다. 이들 지역은 기후가 비슷해 기존에 알고 있던 농경 기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농경 기술이 전파되면서 농경 공동체가 생겨났다. 농경민들은 이주하면서 가축들도 같이 데려갔으며 유전 데이터에 따르면 유럽 소는 유럽의 야생 종보다 서아시아의 후손이고, 양과 염소 또한 서남아시아에서 유입된 종임이 밝혀졌다.

(+후에 농경민들은 발칸반도에서 다시 갈라진다. 일부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동하고 다른 일부는 헝가리 평원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기원전 5000년 정도에 파리 분지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유럽의 연도별 신석기 문화, 출처:&nbsp;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s10814-020-09153-x/figures/3

 

키프로스섬 - 기원전 8300년

{Bellwood & Peter, First Farmers, Blackwell, 2004, 136p}

키프로스로의 농경 전파는 PPNA 말기에서 ~ PPNB 동안 이뤄졌다. (기원전 8300년) 농경민들은 아마도 시리아 해안에서 지중해를 건넜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들이 발원했을 법한 북부 레반트 지역은 현재 바다 아래에 잠겨있다. 참고로 신석기 시대 해안 연안 지형은 오늘날과 매우 달랐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지난 1만 년간 해수면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였고 기원전 4000년은 되어야 해수면 상승이 멈춘다. 그래서 그 당시 해안가 주변 유적지는 현재는 대부분 바닷속에 있다.

지난 1만 년간 해수면 상승 정도

키프로스에 당도한 농경민은 광택이 있는 낫 칼날, 흑요석을 포함하여 레반트의 PPNB 유산을 가진 마을을 일군다. 이들은 그들이 기르던 농작물, 소, 양, 염소, 돼지를 같이 갖고 왔다. 키프로스의 신석기 마을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섬 남쪽에 있는 키로키티아로(Khirokitia), 기원전 7000년경 레반트 PPNA를 연상시키는 돌담으로 된 벌집 모양의 원형 집 수십 채의 마을이 세워졌다. 키프로스 섬은 고양이를 기르려는 최초의 시도가 이루어진 곳으로 추측된다. 고양이는 설치류 동물이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쫓는 데 도움이 되었다.

기원전 6000년대부터는 키로키티아 문화가 발달하며 주거지 근처에 방어벽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재배 식물의 종류가 늘어나 콩과 식물, 무화과 & 피스타치오 등이 재배된다. 기원전 3000년이 되면 구리 야금술이 활용되기 시작한다.

크레타 섬 - 기원전 67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247p}

기원전 6700년경 크레타의 크노소스에서는 밀, 소, 돼지, 양 및 염소의 완전한 농업 목축이 있었다. 이곳은 키프로스 섬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유입된 주민들이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의 주민과 융화된 것이 아닌) 롬 흙(모래 50~80%, 실트 50% 이하, 점토 20% 이하의 비율로 섞여 있는 흙)으로 만든 건물 등이 발견된다. 이 지역은 신석기시 중기 이후에 들어서야 규모가 큰 가옥 단지가 발견된다. (2층 건물도 존재)

크레타섬의 토기 이 전 시기 문화유적지는 상당수가 바닷물에 잠겨있기 때문에 발견되는 증거물들이 크레타섬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못한다. (유물들로만 보면 상당히 고립되어 있는 섬처럼 보임)

아나톨리아 서부 & 발칸반도 동부 - 기원전 6600 ~ 6400년

{Bellwood & Peter, First Farmers, Blackwell, 2004, 137p}

기원전 6600년 현재 터키의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신석기 시대 문화가 시작된다. 일르프나르(기원전 6200-5500년, 터키 수도 앙카라의 북쪽에 위치) 지역에서는 진흙 석판으로 지어진 단칸 주택의 초기 단계뿐만 아니라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의 특징인 진흙 벽돌 2층 주택도 발견된다.

이곳의 주민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작물들(외알밀, 에머밀, 여섯줄보리, 렌틸콩, 완두콩, 아마 등)을 길렀고 돼지, 소, 염소, 양을 이용한 완전한 농업 목축 경제를 가졌으며 여성 조각상과 토기를 만들었다. 이 지역은 아나톨리아 동부와 발칸반도의 초기 신석기 시대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지역이다.

아나톨리아 서남부의 대표 신석기 대표 유적지인 하즐라르에서는 채색된 토기, 점토로 만든 여성 조각상 등이 발견되는데 특정 신체 부위를 강조하였다. 신석기 후기의 회위제크(기원전 6055 ~ 5600년) 유적지에서는 석조 기저부를 가진 벽돌 건물, 독채로 세워진 가옥 등이 발견된다.

서쪽으로 더 나아가 트라키아(터키의 서쪽인 지금의 불가리아)에서는 기원전 6400년경에 이국적인 토기와 함께 신석기 시대 문화가 나타난다. 돌담으로 된 원형 집, 방어벽, 채색 및 단색 토기, 대형 칼날 등이 발견된다.

그리스 - 기원전 65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248p}

그리스 본토에서는 기원전 6500년 이후의 유적층에서 토기와 함께 신석기 유적지가 발견된다. 그리스는 아나톨리아의 신석기 문화가 서진하여 확장된 지역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길들여진 양, 염소, 돼지와 함께 길들여진 에머, 보리, 렌틸콩이 기원전 6500년경에 갑자기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250~300개의 신석기 유적지와 달리 기록된 중석기 유적지는 12개에 불과하다. 따라서, 외부에서 밀려온 농경민에 의한 식민지화 + 압도적으로 빠른 인구 증가로 인한 자연적인 점령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터키의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는 산악지형이기에 농경지가 제한되어 있지만, 비옥한 충적토가 쌓인 일부 지역(테살리아, 그리스 북부의 곡창지대)에서는 신석기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밀려오면서 유적지가 발견된다. 이 유적지는 8미터가 넘는 매우 두터운 유적지 층이며 여러 세대에 걸쳐 신석기인들이 거주했다. 이곳은 산맥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내려와 바다로 빠져나가는 곳으로서 물이 풍부하고 비옥하였다. 이러한 환경 덕에 그리스 신석기 시대 경제는 시작부터 농경 목축에 의존적이었고 사냥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리스의 채색 토기는 트라키아의 초기 토기와 남부 발칸반도의 토기 특징을 합쳐놓은 것과 같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기원전 5300년 이후에 더 큰 지역적 표현을 발전시킨다. 세스클로 문화라 하는데 점토, 인장, 집 바닥 아래의 매장 풍습, 진흙 벽돌 및 목재 골조 주택 건축 기술 등이 발견된다. 또한, 거주민들은 수준 높은 품질의 토기와 조각상을 만들어 낸다. (그리스와 발칸 신석기 시대 주택은 레반트 북부의 일부 현대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볼 수 있듯이 방 하나가 따로 있는 경향이 있다.)

기원전 5000년 초에는 구리와 금 야금이 발전했다는 증거가 발견되며, 발칸반도의 구리 광산에서 생산한 구리를 사용한 흔적도 나타난다. (불가리아의 바르나에 있는 공동묘지에는 금으로 만든 물건이 많이 발견됨)

사회적 계급 차이는 디미니 문화 후반기인 기원전 4000년대에 발견된다. (대저택이라 불리는 거주지들이 점점 많이 생겨나고 일반 사람들과의 건축물 차이가 나기 시작함)

기원전 6000~5000년 유럽 신석기 문화, 출처:&nbsp; https://www.eupedia.com/europe/neolithic_europe_map.shtml

지중해 - 기원전 6000년

유럽으로 확장하는 농업 인구는 기원전 6000년까지 지중해 북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드리아해, 이탈리아반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프랑스 남부, 스페인, 포르투갈, 북아프리카 해안 등) 알바니아와 이탈리아의 토기는 눌러 찍기 무늬 토기 (발칸반도의 스타르체보 문화와 관련이 있음), 지중해 서부는 카르디움 토기로 특징지어지는 (카디움 조개 무늬 토기) 신석기 문화가 자리 잡는다. 따라서 지중해 문화를 눌러 찍기 무늬-카디움 토기 문화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탈리아반도 남부의 주거지는 사람들이 오랜 기간 머물렀던 흔적이 보인다. 반면에,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에서는 주거지를 자주 바꿨다고 한다. 특히 이베리아반도는 신석기시대 사람과 중석기시대 사람이 적어도 1000년간 같은 문화를 향유하며 공존했다고 한다.

기원전 4000년이 되면 이들의 문화는 프랑스의 프르타뉴와 노르망디 지방, 파리분지까지 미친다.

기원전 5000~4500년 전 유럽 신석기 문화, 출처:&nbsp; https://www.eupedia.com/europe/neolithic_europe_map.shtml
 

중부유럽 - 기원전 5400년

농업이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퍼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다른 쪽의 개척 농업 인구는 다뉴브강(도나우 강)을 지나 헝가리 평원을 넘어(헝가리 평원인 판노니아 평원에는 스타르체보 문화가 꽃 피었음) 유럽 중부를 통해 600년 동안 정체된 후 매우 빠르게 알프스에서 멀리 라인강 인근까지 퍼지고 200~300년간 숨 고르기 하다가 마침내 파리 분지까지 퍼진다. (기원전 5400년) 다만, 북유럽 근처(유럽의 서북부, 북부, 동북부, 영국 제도,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북부)에서는 그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고 농업은 아마도 기원전 4000년까지도 퍼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남유럽과 북유럽 사이에 특이한 문화적 격차가 발생한다.

이 시기의 북유럽 지역 문화는 신석기 부흥기의 가장 오래된 문화인 선형 토기 문화(Danubian, Linear Bandkeramik 또는 간단히 LBK라고도 함)이다. 선형밴드 장식으로 꾸며진 토기가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선형 토기의 기원은 헝가리 평원의 스타르체보 문화이다. 이들의 정착지에는 특유의 목재건물(세로로 긴)이 특징이며 주로 배수가 잘되고 황토가 풍부한 지역에 머물렀다. 이들의 주거 모습은 그들의 뿌리인 유럽 동남부와 차이를 보인다. 규모가 컸으며 대형 공동묘지가 있었고 도랑과 울타리로 방어를 했다.

이들의 강가 주변 주거지에는 소밭과 경작지가 있었고 껍질을 벗긴 에머밀과, 빗자루 기장, 소, 양, 염소, 돼지를 키운 흔적이 발견된다. 마을 주변에는 숲이 있어 목재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따라서 토기 제작뿐만 아니라 가옥 건축을 위한 목재 가공 기술도 발달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LBK 문화는 주변으로의 확산이 매우 빨랐다. (슬로베니아와 폴란드에서 파리 분지까지 200년 정도 걸렸음) 하지만, 신석기인들은 진공상태의 땅에 자연스럽게 퍼진 것이 아닌, 기존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중석기 문화 사람들을 대체하며 퍼졌다. (방어를 위한 도랑과 목재 방어벽, 돌도끼, 학살 흔적 등)

기원전 5200년 발트해 서쪽에는 에르테뵐레 문화가 성립된다. (이 지역 중석기 사람들의 문화) 이들의 주 식량은 해양 자원이었으며(고기 잡이, 바다표범 사냥, 조개 등) 유적지의 대부분에서 패총(조개무덤)이 발견된다. 이 문화는 기원전 4000년 쯤에 신석기 부흥기 문화인 푼넬비커 문화로 대체된다.

기원전 4000년쯤에는 발달된 인장 시스템, 권역별 교역 중심지 형성, 복잡한 매장 의례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사회 변화가 일어나고, 특히 매장 의식은 거석묘로 대표되는 대규모 무덤으로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 최종 시기에는 선형 토기 문화와 비커 토기 양식이 유럽 전역에 퍼지고 세분화되어있던 기존의 다른 양식들은 이 두 문화에 의해 잠식된다.

[토막 상식]
유럽에서 농경이 발달하자 가축을 기르고 목초지를 개간하는 행위에 의해 많은 숲이 사라진다. 더 정확히는 숲이 넓어져가지 못한다. (가축들은 어린 새싹과 낮은 키의 풀을 먹어치움) 그 결과 인류에 의한 최초의 온난화가 발생한다. (식물에 의한 이산화탄소 농도 조절 약화) 기원전 5000~4000년 알프스 북쪽 지역의 기온 상승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개입에 의해 생겼다.
 
선형 토기 문화의 토기(위) 푼넬비커(아래), 출처:&nbsp; https://www.grandcurtius.be/en/taxonomy/term/4/ceramics-linear-pottery-culture-lbk
 
북유럽으로의 이동방향
기원전 4000~3500년 유럽 신석기 문화, 출처:&nbsp; https://www.eupedia.com/europe/neolithic_europe_map.shtml
 

 

영국 제도 - 기원전 4000년

이베리아 지역에 살던 신석기 농경민들은 프랑스를 거쳐 아일랜드 남부에 도착한다. DNA 증거에 따르면 이들은 아마도 영국 남서부나 웨일스를 통해 영국 본토에 입국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 제도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를 가진 비옥한 지역이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중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의 전환은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날카롭고 결정적이었다.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기존에 살고 있던 수렵 채집인들과 자유롭게 섞이지 않았으며, 서부 스코틀랜드의 한 그룹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히 신석기 시대 농부들로 대체되었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사후 매장을 위해 거석 무덤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프랑스, 독일 등지까지 퍼졌던 거석 기념물을 짓는 관행을 가진 신석기인)

영국의 농경민은 2500년 동안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기념비적인 거석 건물을 남겼다. 기원전 3000년 쯤 스톤헨지의 초기 단계가 세워진다. 후에 스톤헨지는 태양 관찰에 적합하게 지어진 원형의 제의적 장소 + 사회 지배계층의 무덤이 합쳐진 건축물이 된다.

영국의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2700~2500년경에 더 강력하고 활기찬 벨 비커 문화로 대체되었다. 유입된 이들로 인해 수백 년 내에 영국 유전자 풀의 약 90%가 교체된다.

[토막 상식]
벨 비커 문화인들의 유전학적 기원: 기원전 2800년경 얌나 문화(Yamna Culture)를 형성했던 유전자가 북유럽 평야로 대량 유입되어 초기 유럽 농부 EEF(Early European Farmers)의 유전자와 섞였고 동부 및 중부 유럽에서 매듭토기 문화 (Corded Ware Culture) 인구를 형성한다. 이들 유전자에는 얌나 문화 유전자가 70% 포함되어 있다. 매듭토기 문화인들의 유전자는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서 점점 옅어지고 희석되는데, 그렇게 희석된 유전자를 가진 집단이 유럽의 벨비커 문화(Bell Beaker Culture)와 거석 문화(Megalithic Culture)를 만든 집단이 된다. 이 과정은 R1a 및 R1b1a1a Y-염색체 하플로그룹이 서유럽에 퍼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기원전 3000~2500년 유럽 신석기 문화, 출처:&nbsp; https://www.eupedia.com/europe/neolithic_europe_map.shtml

유럽대륙 농경의 확산, ⓒTims books, 2007

<이집트>

농경의 확산이 있기 전 이집트 상황 - 기원전 17,600 ~ 5,0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381~389, 423p}

{쑨룽지, 신세계사1, 흐름출판, 2020, 276p}

북아프리카는 몬순이 북상하는 정도에 따라 메마른 사막 -> 초원지대 -> 메마른 사막이 되기를 여러 번 반복해왔다. 뷔름 빙기 (기원전 115,000 ~ 11,700년)에 극심한 건조성 기후일 때는 사하라 지역의 사막 넓이가 넓어지고 수렵채집인들이 더 이상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습도가 더 높은 나일강 계곡이나 해안가로 이동한다. 후기 구석기 문화였던 아스완 지방의 (누비아 사막 위쪽 = 나일강 상류) 쿠바니야 문화는(후기 구석기 문화) 기원전 17,600~15,0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들은 나일강 계곡의 천연자원에 의존하여 살았다. (나일강은 현재의 에티오피아 고지대와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에서부터 시작하여 6650km를 흘러 지중해에 닿는다.) 야생식물과 물고기를 주요 식량 자원으로 사용했고 야생동물이 살아가기 힘든 혹독한 환경 탓에 사냥의 흔적은 거의 없다. 나일강의 범람 주기에 따라 계절별로 임시 거처를 옮기면서 살았기에 더더욱이 발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토막 상식]
현재의 사하라 사막이 생성된 시기: 기원전 2000년대 후반에는 건조한 기후가 다시 시작된다. 사하라 사막이 지금의 크기와 같이 되는 시기는 기원전 1300년경이다.

영거드라이아스(1만 2900년 전 ~ 1만 1700년 전) 이후 몬순이 재북상하면서 나일강 유역은 수위가 상승하고 강이 엄청난 규모로 범람하면서 주변을 비옥한 토양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하기에 이집트는 유일하게 인공 관개 시설을 만들지 않은 문명이 된다.) 습하고 기온이 높아지자 나일강 주변은 더욱더 비옥해지고 기자 고원의 남동쪽에는 자연 저지대 분지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기원전 7000년경에 생성된 파이윰 호수는 (그때는 호수였으며, 지금은 오아시스) 하와라 수로를 통해 나일강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이 지역의 상습 범람 지역에는 다양한 풀이 자랐고, 비옥한 지역의 끝자락에는 아카시아, 야자수, 타마리스크와 같은 관목 종이 자라서 사바나와 같은 생태계가 펼쳐졌다. 야생동물들의(오록스, 가젤, 염소, 야생 소 등) 수도 늘어나 사냥을 위한 도구들이 발견된다.

기원전 6000~ 5000년 현재의 파이윰 오아시스 북부와 서부에 위치했던 파이윰B(혹은 카루니안 문화) 문화는 중석기의 특징을 보이며 대표적 도구로는 칼과 끌 등의 세석기, 화살촉 등이 발견된다. 정주했던 흔적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가옥 건축에 대해 남아있는 정보가 없다. 계절별로 사냥을 위해 주기적으로 돌아다니며 움막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쿠바니야문화와 마찬가지로 고기잡이에 의존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의견으로는 수단 중앙 지대의 수렵 채집 문화인 하르툼 문화의 조상 격 작은 집단들이 사냥을 하러 나왔던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파이윰 오아시스 과거와 현재, 출처: 어쌔신크리드 오리진,&nbsp; https://www.cambridge.org/core/books/abs/housing-in-the-ancient-mediterranean-world/mudbricks-and-papyri-from-the-desert-sand/FF08762AD743FC7B00ED05EA9965435A
출처:&nbsp; https://opensea.io/kr/assets/matic/0x2953399124f0cbb46d2cbacd8a89cf0599974963/3739159498713421729064022019662024034734206891441254373747325257044566474753
출처: Worldatlas
이집트 오아시스 위치, 출처:&nbsp; https://explorationvacation.net/africa-and-middle-east-page/exploring-egypt/
 

이집트 선왕조 시대 (Predynastic Period) - 기원전 6,000 ~ 3,1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390~417p}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Predynastic_Period_in_Egypt/}

{수잔 와이즈 바우어,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 1, 이론과실천, 2007, 56p}

{브라이언 페이건, 고대문명의 이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79~191p}

<하이집트> 나일강 하류 = 나일강 삼각주 + 파이윰 오아시스

나일강 계곡의 유물들로는 중석기에서 신석기 시대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 어족자원이 풍부했던 수렵채집의 생활을 쉽게 바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정주를 위한 가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곡물 저장을 위해 지하 저장고가 있는 갈대 오두막의 형태였을 거로 추측된다.

파이윰B(카루니안) 문화 이후에 파이윰A(파유미안) 문화가 이어지며 약 기원전 5000~4000년까지 지속된다. 이전 시기와의 차이점이라면 이들에게는 가축(길들여진 소, 야생의 양과 염소) 기르고 토기를(왕겨를 이용한 조잡한 형태의 항아리) 만들었던 흔적이 발견된다. 농사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든데, 이 지역에는 재배가 가능한 야생 식물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더더욱이 농업이 자연발생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후에 농사가 시작된 이유는 레반트 지역에서 들여온 기술 때문으로 추정) 또한, 재배종이 아닌 야생종 식물성 자원을 모아두기 위한 창고를 사용했고 나무 손잡이에 박힌 낫형태의 부싯돌, 면이 톱니 모양처럼 생긴 도구, 날개 달린 화살촉과 잎 모양의 조각을 제작해서 사용했다. 파이윰 문화는 일찍이 발달한 메소포타미아 지역 문명의 혜택이 닿지 않아 어느 정도 단절되었고 사회 및 문화 발전에서도 다른 문화들에 비해 조금 뒤처졌다.

기원전 5000~4000년 파이윰A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나일강 하류에는 이집트 문명의 최초 신석기 문화라 불릴 수 있는 메림데 문화가 펼쳐진다. 퇴적층이 3M에 달해 여러 세대가 한 장소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파이윰A 문화와 다르게 직경 2~3M의 원형 움막집의 잔해가 발견되며 (벽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를 거적으로 두른 후 롬 흙으로 마감) 레반트 지역의 롬 벽돌집과 차이를 보인다. 이 주거 형태는 후기로 가면 롬 흙으로 만든 타원형의 구조물로 바뀐다. 야외에는 조리용 모닥불 자리와 창고가 위치했다. 토기 제작도 활발했으며 식물의 줄기를 첨가해 내구도를 높 민무늬 토기, 빨간색&회색으로 광택을 낸 단지, 다양한 사냥용 촉, 황소 모양 조각상, 낚시 도구 등이 발견된다. 메림데의 후기 문화로 갈수록 곡물을 보관하기 위한 커다란 바구니 같은 용기가 많이 발견된다. 이 시기쯤에 레반트 지역에서 농경의 기술이 전파되었을 거라 추측된다. 학계에 따르면 기원전 5000년경 레반트 남부지역이 매우 건조해져서 선토기문화 C(PPNC)이후로는 주거지가 발견되지 않는데, 이곳에서 살던 주민들이 남하하여 나일강 삼각주의 농업을 활성화시켰다고 보고 있다. 아쉬운 점은 정확 어떤 작물이 재배되었는지에 대한 유물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곡식을 담을 비축 용기와 저장시설의 증가로 추측할 뿐이다.

메림데 문화 외에 엘 오마리 문화(기원전 4000년, 발전한 주거지 및 건축기술 & 더 뚜렷한 농경의 증거), 마아디 문화(Maadi culture, 기원전 3900~3500년 레반트와의 교역 흔적이 있으며 구리를 이용한 물품 제조가 가능했고 공동묘지 유적이 있음, 상이집트에 나카다 문화가 번성하던 때와 동일 시기, 현재는 그 자리에 카이로 외곽에 위치함)를 거친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나일강 계곡 중부 지방으로 남하하면서 이집트의 신석기 부흥기 문화를 만든다. (바다리 문화)

마아디 문화는 상이집트의 나카다 문화에 대비되는 하이집트의 대표 문화이다. 특징적으로 하이집트 지역은 서남아시아 지역과 접촉이 많았다. 메소포타미아-레반트-이집트로 이어진 교역 거점의 끝을 담당했으며 동쪽에서 온 상인들은 나귀와 선박에 올리브기름, 포도주, 삼나무, 귀금속, 구리 등을 싣고 삼각주를 찾아와 이집트 지역의 특산물과 거래를 했다. (주로 레반트 지역과 거래) 레반트 지역의 특산물을 강을 따라 상이집트까지 전달되기도 했다. 이러한 무역권이 후일 상&하이집트 간 경쟁의 원흉이 된다.

[토막 상식]
나일강은 매년 6월부터 9월까지 범람하고 10월부터 2월까지 농작물이 영양을 공급받아 2월에서 6월 사이에 수확된다. 이러한 특징은 이집트가 월력이 아닌 태양력을 채택하고 태양을 숭배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집트의 태양숭배는 결국 그들의 왕 파라오를 태양신의 화신으로 생각하게 한다. 때문에 이집트 달의 신은 그 기능이 소멸된다. 그리고 태양의 나라 이집트의 입구인 동쪽은 셈족의 달신인 신(sin)의 땅 시나이반도라 불리게 된다.
고대 이집트 주요 도시

<상이집트> 나일강 상류 = 나일강 계곡 중부부터 누비안 사막쪽에 위치한 나일강 상류까지

기원전 4200~3800년 나일강 계곡 중부에는 하이집트에서 전파된 문화를 갖고 있는 바다리 문화가 번성한다. 이들 문화부터는 농경의 직접적 흔적이 발견되며 에머밀, 보리 등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길들여진 동물은(양과 염소) 음식과 의복은 물론 천막의 재료로도 쓰였다. 던지는 막대기, 칼, 화살촉과 같은 무기와 도구를 포함하여 많은 부장품 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묻혔고 시체는 동물 가죽으로 덮어 갈대 매트 위에 놓았다. 부장품으로 음식과 개인 소지품을 함께 묻었는데 죽은 사람이 사후세계로 가는 여정에 있어 물질적 재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바다리 문화에서 제작된 토기는 이전 문화보다 더 얇고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붉은색과 갈색으로 광택을 낸 섬세한 그릇이 발견되며 토기로는 토기 주둥이에 검은색 무늬를 두른 것들이 발견된다. 당시에는 이미 구리를 다룰 줄 알았으며 이 기술은 레반트 지역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여전히 주거지를 계절적으로 바꿔가면서 썼다.

 

[토막 상식]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의 강과 달리 나일강은 범람에 대한 예측이 가능했다. 백나일(빅토리아 호수 발원)은 나일강 유량의 16% 정도를 공급하고 청나일(에티오피아 고원)은 유량의 84%를 공급한다. 따라서 나일강의 범람은 전적으로 청나일강의 유량에 달려 있는데 매년 여름 에티오피아 고원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비가 흘러내려서 나일강 유역에 홍수를 만든다. 이집트인들은 이 시기를 아켓(Akhet, 6월中~10월)이라 했으며 우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우기 때 퇴적물들이 홍수가 덮은 땅 위에 가라앉고 물이 어느 정도 빠지게 되면 농부들은 진흙 위에 파종을 실시한다. (페레트Peret = 파종시기, 10월中~2월) 토양에 물이 충분하기에 곡식들은 늦여름과 가을에 물공급 없이 자랄 수 있다. 추수기인 쉐무(Shemu, 2월中~6월中)에 추수를 하고 나면 땅은 강렬한 태양빛에 의해 마르고 갈라지는데 이 흙 속으로 공기가 들어가 토질의 염류화를 막는다. 그리고 다시 아켓이 돌아와 토양은 건강한 상태로 새로운 작물을 심을 준비를 한다. 이 때문에 이집트 문명의 작물 생산성은 다른 문명들보다 높은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된다.
바다리 문화 유물, 출처:&nbsp; Prehistory to Predynastic Egypt.&copy; Notes & images compiled by Gregory Mumford 2023

나일강 상류의 끝단에 존재하던 하르툼 신석기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상이집트 지역에는 나카다 문화가 꽃피운다.

[토막 상식]
하르툼 신석기 문화: 기원전 4000년 백나일강과 청나일강이 합류하는 하르툼 지역에 위치하던 신석기 문화. 사냥과 고기잡이가 주 식량원이었지만, 가축을(주로 소) 키웠으며 기전 3000년대에는 이 지역을 떠나 에티오피아 & 동아프리카 지역 유목민의 조상이 됨.
 
나카다 문화 위치

[나카다 1기 문화] - 기원전 4000~3500년

나카다 1기 문화는 아비도스(Abydos), 나카다(Naqada), 히에라콘폴리스(Hierakonpolis)가 포함된 영역에 걸쳐 퍼졌다. 이 거주구역은 1km 간격으로 작은 마을들이 들어선 형태였고, 범람원의 경계에 위치하여 초에는 1km2 당 76~114명을 부양할 수 있는 곡식이 경작되었으나, 수풀과 관목을 제거하고 제방과 배수로를 연결하는 등 범람 지역을 정비하여 1km2 당 760~1,520명 분의 곡식 생산이 가능해졌다. 곡식으로는 에머밀, 보리, 아마, 렌틸콩을 경작했으며 양, 염소, 돼지, 소 등을 길렀다. 나카다 1기 문화가 이전의 바다리 문화와 확연히 다른 점은 정착생활로의 확실한 전환이 있었고 재배 동식물의 양과 종류가 늘어났다. 야생 식물의 채집도 일부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채집보다는 농경이 우위에 있었다. 잉여 곡식이 생겨나자 비농민 계층(상인, 기능공 등)이 활성화되었다. 붉은색과 갈색의 광택 나는 용기는 바다리 문화와 비슷하지만 기하학적 모양을 새겨 넣는 기법이 추가되고 그림처럼 장면을 묘사해서 넣기도 하였다. (동물, 배, 사냥, 전투 등등) 상아 막대기나 펜던트에 조각된 남자&여자 조각상이 특징이다. 구리를 이용한 물품들을 만들 줄 알았으며 본격적인 동기시대를 연다. 주거지는 보통 원형의 오두막 형태를 띠었다.

 
나카다 문화별 토기와 나카다 1기 범위, 출처: 위키피디아

[나카다 2기 문화] - 기원전 3500~3200년

나카다 2기 문화의 범위는 하이집트의 파이윰 호수까지 확장된다. 나카다 1기에 비해서 토기는 더 단단해지고 농경에 의한 생산 경제가 완전히 자리에 잡는다. 다른 지역과의 무역도 활발해져 토기의 기울어진 주둥이와 추가된 손잡이는 레반트 지역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토기의 수요가 증가하자 물레를 발명하기에 이르렀고 토기의 대량생산이 이뤄진다. 이러한 대량생산은 주변과의 무역 목적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구리를 이용해 무기와 장신구를 만들었다. 주거지는 햇볕에 구워진 벽돌을 이용하였고 안뜰(나중에 이집트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도 발견된다. 밀 맥주를 양조하는 기술도 존재했으며 하루에 대략 1000리터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양조장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돛을 단 범선이 등장하였고, 상류로 갈 때는 북풍을 이용하였으며 다시 내려올 때는 노를 저어 내려왔다. (물류와 교통이 용이해짐) 상이집트의 주요 수출 품목인 토기와 맥주는 범선을 통해 수출됐을 것이다.

신분의 차별은 무덤에서 발견되는데, 부유한 사람들은 기원전 3600~3500년경부터 미라로 만들어지는 관행이 시작되었고 부장품은 고인과 함께 했다. (일부 무덤에서 송진을 먹인 아마포로 손과 팔을 감싼 여자 시신이 발견) 무덤에 사용되는 나무와 봉헌물의 측면에는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나카다 북쪽의 아비도스는 중요한 매장지가 되었고 큰 무덤(12개의 방이 있는 무덤)이 건설되기도 하여, 묘지(죽은 자의 도시)로 유명한 도시로 성장한다. 무덤들은 원래 진흙 벽돌을 사용하여 지어졌지만 나중에는(제3왕조 동안) 크고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회암으로 지어진다. 결국 그 장소는 훗날 이집트 왕들의 매장지가 된다.

거주지는 담으로 둘러싸인 읍락의 형태를 취했으며, 이곳에서 이집트의 전형적인 장방형 평면 형태의 진흙벽돌 가옥이 발견된다. 어떤 거주지는 궁전처럼 상당한 규모였고 상위 계층의 집 수준을 보았을 때 추장 사회에 근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인구 규모는 한 거점 당 1만 명 정도 거주한다. (네켄=히에라콘폴리스의 경우를 예로 듦) 이 정도 규모의 인구를 하나로 응집시키려면 혈연으로는 불가능하다. 당연히 현지의 신앙이 있었으며 이들은 송골매 신을 섬겼다. 이 송골매 신이 후대의 이집트 왕권의 상징인 호루스가 된다. (나무로 만든 기초적인 형태의 신전도 발견됨)

이집트의 상형 문자는 기원전 3400~3200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개발된 것으로 추측된다. 최초로 발견된 이집트 문자는 당시 아비도스에서 온 것으로 토기, 점토 인장 자국, 뼈와 상아 조각에서 발견된다. 이 시기에 상형문자는 기록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완전한 문장의 형태는 발견되지 않는다. 완전한 문장의 증거는 제2왕조(기원전 2890~2670년)에 페리브센 왕이 통치할 때쯤 이집트의 기록으로 발견된다.

나카다 2기 장방형 가옥

(미라 제작법) --> 유튜브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OZvRIKM_1AI

나카다 1기(Amaratian), 2기(Gerzean) 문화 범위, 출처: 논문 -&nbsp; NUBIAN A-GROUP AND EGYPTIAN NAQADA TRADE RELATIONS IN THE PREDYNASTIC
 
나카다 2기 문화 유물, 출처: Predynastic Egypt: Naqada I-III. &copy; Notes & images compiled by Gregory Mumford 2023

[나카다 3기 문화] - 기원전 3200~3100년

나카다 3기 문화는 나일강의 수로를 이용한 무역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문명(우루크 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건물을 위한 벽돌을 굽는 방법, 원통 인장, 무덤 벽의 상징, 토기 디자인, 고대 이집트 종교의 기본 형태와 같은 산물은 그 자체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이다. 아비도스와 히에라콘폴리스(Hierakonpolis)의 기념비적 무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이 아닐 수 없다. 가나안 지역과의(오늘날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이 위치한 레반트 지역의 상업 국가들을 일컫음. 이 길목을 지나야만 메소포타미아로 갈 수 있었음) 지속적 거래로 인해 현재 남부 이스라엘에 이집트 식민지가 생겨났다. 지역 사회는 무역으로 성장하고 번성했으며 이로 인해 하&상이집트의 인구는 증가하게 된다.

그렇게 나일강에는 각각의 지역별 공동체들 간에 무역 상품과 교역로를 놓고 경쟁관계가 생기며,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공격한다. 전쟁의 승리자는 지역의 교역권과 더불어 식량과 재화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확보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간다.

당시 상이집트의 세 가지 주요 도시 국가는 아비도스(Abydos, 그리스에서는 This라고 부름), 나카다(Naqada) 및 네켄(Nekhen, =히에라콘폴리스) 이었다. 아비도스가 나카다를 정복한 다음 네켄을 흡수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른 의견으로는 네켄이 나카다를 정복하고 아비도스가 정복이나 왕실 결혼으로 네켄을 지배) 이 과정에서 아비도스의 왕인 스콜피온 킹 2세는 확장된 국력으로 하이집트의 교역로를 통제하기 위해 삼각주의 마아디 문화 후손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스콜피온 킹 2세가 거의 정복한 상&하이집트를 그의 후임자인 나르메르(Narmer)가 통일한다. 이렇게 나르메르는 중앙 정부를 수립하고 다음 3천 년간 지속될 문화를 시작하는 초기 왕조 시대의 최초의 왕이 된다. 이집트의 고대 문명은 이때부터 시작이다. 

[토막 상식]
이집트 제0왕조 = 선왕조
  • 스콜피온 킹 1세 (Scorpion king 1st)
  • 크로커다일 (Crocodile)
  • 이리 호르 (Iry-Hor)
  • 카 (Ka)
  • 스콜피온 킹 2세 (Scorpion king 2nd)

이집트 제1왕조
  • 나르메르 (Narmer)
  • 호르-아하 (Hor-Aha)
  • 제르 (Djer)
  • 제트 (Djet)
  • 메르네이트(Merneith)
  • 덴 (Den)
  • 아네지브 (Anedjib)
  • 세메르케트 (Semerkhet)
  • 카아(Qa'a)
  • 바(Ba) - 재위기간이 짧고 불분명
  • 스네페르카(Seneferka) - 재위기간이 짧고 불분명

출처: https://www.historyfiles.co.uk/KingListsAfrica/EgyptAncient.htm#Archaic%20Period, https://ancientegypt.fandom.com/wiki/Protodynastic_Period

나르메르가 제1왕조를 세우면서 멤피스에 새 도읍을 건설한다. 멤피스는 '하얀 벽들'이라는 뜻인데 이는 모든 벽에 석회를 발랐기 때문이다. (석회는 빛을 받으면 환히 빛남) 나르메르는 멤피스를 중심으로 남부의 나일강과 북부의 삼각주를 모두 지배 아래 둘 수 있었다. 나르메르는 그렇게 62~64년을 통치하다가 재위 마지막 해의 어느 날 하마 사냥을 나섰다가 하마에게 짓밟혀 즉사한다.

+나카다 3기 문화 시기 때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수메르 문명의 우루크 시대 후기쯤이었음

[토막 상식]
이집트(Egypt)는 '후트 카 프타(Hut-ka-Ptah)-프타 영혼의 신전'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멤피스의 다른 이름은 헤크페트(Hkpt)이며, 그 멤피스의 가장 큰 사원의 이름이 후트 카 프타 이다. 이를 그리스어로 하면 아이깁투스(Aigyptos)이고 이것에서 파생된 것이 이집트(Egypt)이다. 애급(埃及)은 Aigyptos의 한자 음차 표기이다. 나르메르는 멤피스에 궁전을 세워 그것을 '페르-아(p r â, perâa)'라고 불렀으며 큰 집이라는 뜻이었다. 파라오(Pharaoh)는 바로 '위대한 거처'를 뜻하는 'p r â, perâa 에서 파생되었으며 신왕국 시대 이후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됨.
나르메르의 팔레트,&nbsp; 나르메르가 적들을 정복하고 땅을 정복하는 군사 지도자로 묘사되어 있는 석판, 상이집트의 왕들은 하얀 왕관을 썼고, 하이집트 왕들은 붉은 왕관을 썼다. 좌측 석판의 나르메르는 하얀 왕관을 쓰고 포로를 내려치고 있으며, 우측 석판의 나르메르는 붉은 왕관을 쓰고 통일된 나라의 왕이 되어 적의 시체를 내다보고 있다.
최초의 파라오 나르메르의 두상

마무리

시중의 고대 문명사 책에는 이집트의 초기 왕조에 대한 언급만 있고 그전의 몇 천 년에 걸친 역사 설명이 부족하여 정리해 보았다. (유럽은 불행이도 거의 언급이 없거나, 짤막하게 서남아시아에서 농경 기술을 가진 인구가 넘어갔다고 기술해놓는 정도가 전부이다) 농경의 확산과 신석기 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시기가 다를 뿐이었다. 다음 파트에서는 중국의 신석기시대를 다룰 예정이다.

<참조한 서적>

  •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헤르만 파르칭거, 글항아리, 2020.03.20.)
  • First Farmers Paperback(Bellwood, Blackwell, 2004.12.07.)
  • 신세계사1(쑨룽지, 흐름출판, 2020.01.20.)
  •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클라이브 폰팅, 2019.12.27.)
  • 세상의 모든 역사: 고대편1(수잔 와이즈 바우어, 이론과실천, 2007.10.01.)
  • 고대 문명의 이해(브라이언 M.페이건,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03.16.)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094795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