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3 - 농경의 시작

살면서 농경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평균적으로는 '거의 없다'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시점의 순서 상 역사책에서는 1만 년 전에 농경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주 업으로 삼던 사냥을 버리고 농경을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 그럴듯한 설명이 없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이럴 때는 입장 바꿔서 생각하는 것이 현상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의 인간은 현생을 사는 우리와 유전학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다. (최소한의 차이를 확인하려면 10만 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본인이 수렵&채집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던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자.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 갑작스러운 변화를 쉬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만약 그 변화를 택했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찾아온 그 변화에 체념하고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외적인 압력이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의도치 않은 내적 동기가 자극됐거나 아니면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 사람들이 내가 속한 기존의 집단(수렵&채집)을 대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여러 가지 가설이 난무한 상황이고 그나마 최선은 다양한 요인이 함께 작동하여 농경의 출현을 일으켰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어떠한 역사적 현상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 그 원인을 한 가지로 특정한다면 그것은 숲을 보지 못한 근시안적 견해이다. 그렇기에 농경이 시작된 메커니즘 또한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봐야 함이 마땅하며, 이번 Part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시각을 엮어만든 나름의 시나리오를(가설) 소개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후 2000년대를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인류의 농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농경'은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급박하게 진행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4000~5000년간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된 농경에 혁명이라는 말을 붙이려면 변하고자 하는 대상(목적)이 설정되어 있어야 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수행했던 행동들을 나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간 사회는 특수한 상황에 따라 먹을거리를 구하는 기존의 방식을 조금씩 변화시킨 것뿐이고 이 변화의 5000년이 낳은 풍요는 누적된 결과이지 '단기간'의 의미가 함축된 '혁명'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명시한다.

출처:  https://www.indica.today/long-reads/ancient-indian-economy-part-ii-agriculture-ancient-india/
 

수렵&채집의 존속 기간

{데이비드 크리스천, 빅 히스토리, 웅진지식하우스, 2022, 212~215p}

{바츨라프 스밀, Energy and Civilization, MIT Press, 2018, 41p}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 민음사, 2019, 102~104p}

수렵&채집 관련 연구들을 보면, 후기 구석기인들은 비교적 손쉽게 삶을 영위하였다. 인구 밀도가 그리 높지 않던 탓에 발달된 사냥 기술과 채집 기술로 식량을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고, 잡다하게 먹는 바람에 균형 잡힌 식단이 될 수 있었으며,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탓에 근육량도 많고 체격도 컸다. 또한, 역할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았기에 여가 활동 시간도 넉넉하였다. 반면에, 농경은 파종기와 수확기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며, 날씨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작물도 해마다 상당 기간 저장해 두어야 했으며 이에 필연적으로 낭비와 절도가 생겨났다. 생산성은 수렵&채집에 비해 높다 하여도, 단 몇 가지 작물에 의존하기 때문에 춘궁기에는 식량 부족 및 기근에 시달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이처럼 수렵&채집과 비교했을 시 장단점이 뚜렷하게 나뉘는 농경은, 그 장점이 수렵&채집의 단점을 능가하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도입이 더뎌졌고 세계 전역의 출현시기도 다 다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농경의 출현은 수렵&채집의 끝을 의미하지 않았다. 농경 공동체 가까이서 생활하여 농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주변의 환경이 농경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공동체는 수렵채집에 만족하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지금도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일부 지역은 옛 선조들의 지혜를 이용하여 수렵&채집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사실은 농경이 활발했던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증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남아시아,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농경 공동체의 유물을 살펴보면 여전히 상당수의 사냥물 흔적이 남아있으며 (여우, 오소리, 토끼, 영양, 멧돼지, 악어 등의 길들일 수 없는 동물들의 뼈) 이를 통해 단백질을 보충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주식으로 섭취하는 곡물들은 전부 품종 개량 종이다. 야생 상태의 보리, 밀, 쌀, 옥수수 등은 인간의 기호에 맞게 길들이는 데 수천 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개량 종들은 인간의 도움 없이는 야생에서 살아갈 수 없다. 야생의 생존력을 잃어버리는 대신 영양가가 더 높아지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는 인간의 손에 의해 길러지지 않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공생관계가 된다. (야생 상태의 곡물 채집의 흔적은 기원전 2만 3000년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들을 완전하게 길들이고 나서 본격적으로 재배한 것은 그로부터 1만 3000년 후이다) 아래와 같이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지역별로 천차만별이며 서로 교류가 없던 지역이기에 모방이 아니라 지역별로 독자적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지역별로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가 다르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그 이전의 시기는 수렵&채집에 의한 수확물이 부족한 에너지를 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렵&채집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 존재하고 있으며, 현생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수렵&채집의 비율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0으로 수렴하지는 않았다.

농경은 과거와의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니라 기나긴 사회적 진화 과정의 일부이고 인간, 식물, 동물의 상호작용이 점차 증대된 과정 중의 하나인 것이다.

<농경의 출현 장소와 시기>

서남아시아(비옥한 초승달 지대) : 기원전 9000년경

이집트, 수단(나일강 유역): 기원전 8000년경

중국(양쯔강 & 황허강 유역): 기원전 7000년경

오세아니아(뉴기니 고지대): 기원전 7000년경 ~ 4000년경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기원전 3000년경 ~ 2000년경

인더스강 유역: 기원전 2000년경

메소아메리카(멕시코 중부): 기원전 3000년경 ~ 2000년경

남아메리카(안데스 산맥, 아마존 유역): 기원전 3000년경 ~ 2000년경

북아메리카(미국 동부): 기원전 2000년경 ~ 1000년경

[토막 상식]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사막과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케이프요크 지역의 수렵채집 공동체는 농경을 알았고 심지어 농경 공동체 가까이 살지만 채택하지 않고 그들의 방식대로 살고 있다.

 

농경의 채택 과정

{데이비드 크리스천, 빅 히스토리, 웅진지식하우스, 2022, 217~224p}

아래는 농경의 시작을 다중 원인 이론 모형으로 설명한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글에 최정규 교수님의 '농경과 사유재산의 상보성 관련 논문 내용'을 덧붙여 농경의 채택 과정을 기술하였다.

<농경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 선결 조건 1

{바츨라프 스밀, Energy and Civilization, MIT Press, 2018, 45p}

농경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주변의 식물, 동물, 경관을 조작하여 동식물의 산출량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키는 행위이다. 사전적으로는 땅에 씨앗을 뿌려 그곳에서 자란 식물의 씨앗, 열매, 줄기, 잎, 뿌리 등의 부산물을 얻는 일, 또는 가축을 기르는 일을 일컫는다. 이 행위를 통해 인간은 수렵&채집과 비교할 때, 비교적 적은 에너지로 최대의 생산물을 산출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은 기원전 1만 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기존의 고인류는 음식의 변화와 함께 느린 속도로 신체의 발달과 생활 도구의 변화를 이룩하였다. 또한 그와 동시에 본인 주변에 있는 자연환경을 생활상에 알맞게 변화시켜 나가면서 자연을 최대한 활용한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몸에 배어있는 활용의 DNA는 주변 환경이 작물의 생장에 적합해졌을 때 (영거 드라이아스: 기원전 1만 900년 전 ~ 9700년 전 이후) 인간으로 하여금 그 기회를 살려 더 적극적으로 자연환경을 변화시켜 나가게 만들었다.

- 에너지 교환 비율: 작물을 키우는데 들어가는 에너지 vs 생산물이 갖고 있는 에너지

  • 우리가 아는 곡식 종류 대분의 교환 비율은 11~15배
  • 구황 작물, 바나나, 옥수수 등은 20~40배
  • 하지만, 이러한 교환비율은 농경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 얻은 결과이며, 농경 초기는 야생의 작물을 채집하는 것이 '들인 노동 대비 에너지 소득 비율'상 유리했다.
지역(작물 종류)
에너지 소요 (시간)
(노동에 들어가는 평균 에너지 =700kj/hr)
들인 노동 대비
실질 에너지 소득(배)
동남아시아(쌀)
2,800~3,200hr
15~20배
서아프리카(수수, 기장)
800~1,200hr
10~20배
중앙아메리카(옥수수)
600~1,000hr
25~40배
북아메리카(옥수수)
600~800hr
25~30배

<길들일 수 있는 동식물 종의 존재 유무> -> 선결 조건 2

수많은 동식물 종이 존재하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지만, 인간이 길들인 종은 식물 100종, 포유류는 14종에 불과하다. (동물의 경우 성장 속도, 출산율, 인간 친화력, 무리 습성 등의 요구 조건이 있기 때문) 우리는 결론적으로 길들임에 성공한 종만 알고 있지 실제 야생 종을 발견한 후 그것을 길들이다가 실패하고 포기한 수많은 종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존재했을 수천 년에 걸친 노력은(유적지에서 발견된 2만 년 전 야생 곡물의 흔적 등) 역설적으로 이 길들임이 당연한 결과물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게 한다. 그만큼 실제 작물과 가축으로 길들여 쓸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으며 여기에는 지리적 조건이 한몫한다.

서남아시아의 속칭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환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최초의 농경이 발달한 이유도 지리적 우연에 기인한다. 이 지역에는 길들일 만한 동식물이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판이 유라시아 판과 만나 형성된 토로스 산맥(튀르키예 남부를 가로로 관통하는)과 자그로스 산맥(이란과 이라크 땅의 경계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는)의 아래 지역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서쪽의 요르단과 이스라엘 고지를 포괄하는 환메소포타미아 유역은 그 모양이 부메랑과 유사하여 초승달 지대라 불린다. (아래 두 번째 그림)

이 지역의 해발 240~300m 지점에서만 면양, 산양, 소, 돼지, 밀, 보리, 쓴살갈퀴, 완두, 편두의 조합이 발견되었고, 이 지역에 살던 인간들은 고지대에서 길들인 동식물을 갖고 점점 내려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본격적인 농경을 펼친다. 반면에, 아메리카는 쉽게 길들일 수 있는 동식물 종이 유라시아 대륙에 비하면 거의 없었다. (옥수수의 조상 격인 테오신테는 밀과 달리 커다란 곡물 이삭을 맺지 않아, 여러 세대를 거쳐 선택 교배된 후에야 겨우 낟알이 많고 껍질이 부드러워진 오늘날의 옥수수를 얻음)

서남아시아 3D 지도, 출처:&nbsp; https://fineartamerica.com/featured/middle-east-syria-iraq-3d-render-topographic-map-color-frank-ramspott.html ( made by Frank Ramspott)
출처:&nbsp; From wild animals to domestic pets, an evolutionary view of domestication( Carlos A Driscoll , 2009)
최초 가축화된 시기와 지역, 출처:&nbsp; https://www.worldhistory.org/image/12521/map-of-the-fertile-crescent/
출처: 구글맵

<'일시적으로'라도 정착한 집단> -> 외적인 압력

동물성 식량을 주식으로 삼던 구석기인들은 사냥할 동물들을 따라 그 거주지를 옮겼으나, 전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그 움직임이 점점 더뎌진다.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사냥 도구와 기술이 발달하고, 불을 활용하고,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 상태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이 점점 용이해졌기에 '정착의 맛'을 들인 일부 집단은 주변 환경 여건만 잘 갖추어졌다면 정착을 선택하는 경향이 늘어났을 것이다. 정착 이후에 그들의 터전 근처에서 채집한 야생 곡물을 길러보려는 시도도 존재했다. (나투프 문화 유적지에서 그 흔적이 발견 됨) 하지만, 후기 구석기 말기에는 이들의 움직임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사건이 벌어진다. (후기 구석기시대 말기는 학자에 따라서 중석기시대 혹은 아석기시대亞石器時代로 명명되기도 함)

기후변화 - 영거 드라이아스 이후 현재까지 지속된 간빙기

후기 구석기 말기에 영거 드라이아스 이벤트1만 2900년 전부터 1만 1700년 전 (기원전 1만 900년 전 ~ 9700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약 1200년간 지구를 차갑게 얼려버렸다. 하지만 이 이벤트가 끝난 후, 인류는 1만 년간 지속되는 간빙기의 혜택을 보게 된다. (Warming at the end of Younger Dryas)

따뜻하고 습해진 간빙기 기후의 영향으로 인해 식물성&동물성 식량을 구하는 것이 쉬워진 사람들은 정착을 선택하는 비율이 더욱 높아진다. (굳이 이동하지 않고 정착해도 주위에 식량이 풍족하므로)

출처:&nbsp; https://www.pressdispensary.co.uk/q991593/images/20k.jpg

인구 과잉 압력 - 깔때기 효과

주변 환경에 만족하지 못해 정착하지 않은 집단들은 따듯해지는 날씨 덕택에 더 좋은 지역을 찾아 이주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환경이 맞으면 정착하고 아니면 과감히 이주) 이 대열 속에서 서남아시아는 사람들이 이동하는 주요 통로였다. 마찬가지로 메소아메리카(지금의 멕시코 중부)도 이러한 길목 중에 하나였고, 이 지역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정착 + 새롭게 이주해 들어오는 사람들의 유입이 합쳐져서 이 지역은 깔때기처럼 인구압이 생성된다.

우리의 상상 속 서남아시아는 사막의 모래바람과 척박한 환경뿐이라 정착을 결정했다는 것이 지금의 통념으로는 의아하겠지만, 기원전 1만 년 ~ 6000년 사이의 서남아시아는 드넓은 초원과 들판이 있던 지역이었다. (사하라 사막의 일부 지역도 마찬가지) 그 이유는 지금 동남아시아나 인도로 부는 계절풍(몬순)이 서남아시아까지 그 영향을 미쳐서 고온다습한 기후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아래의 7월 ITCZ - Intertropical Convergence Zone가 몬순의 북방 한계선이지만, 밀란코비치 주기에 영향을 주는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 변동, 세차운동, 이심률의 변화는 이 선을 계속 변경시키고 있으며 1만 년 전은 서남아시아 쪽까지 올라왔을 것) 다만, 서남아시아의 몬순은 8.2ka event이후로 약화된다.

오히려, 서남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농경이 시작된 이유는 환경이 척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풍족하게 지내던 정착 수렵&채집인들이 앞으로 설명할 다른 계기에 의해 농경 도입의 혜택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출처:&nbsp;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Modern-Position-of-the-Intertropical-Convergence-Zone-ITCZ-in-July-and-January-redrawn_fig5_270591775
[토막 상식]
몬순: 우기와 건기를 만드는 바람의 변화를 일컫는다. 바다는 비열이 높고, 육지는 비열이 낮기 때문에 여름에는 대륙이 빨리 가열되어 온도가 바다보다 더 높아지고 이로 인해 저기압이 생성된다. (반대로 바다는 고기압) 이로 인한 기압차는 바다에서 대륙으로 향하는 바람을 만든다. 수분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상대적 고온인 대륙은 고온다습하고 비가 많이 오게 된다. 반대로, 겨울에는 대륙이 더 빨리 차가워져서 바람이 바다 쪽으로 불기 때문에 춥고 건조한 날씨가 형성된다.
몬순 개념도, 출처:&nbsp; https://scijinks.gov/what-is-a-monsoon/

그렇게 생성된 인구압으로 인해 1만 년 전 전 세계 인구는 440만 명을 돌파한다. (인구가 1천 년에 걸쳐 두 배씩 증가하는 시점은 기원전 5000년은 돼야 한다.)

출처:&nbsp; https://ourworldindata.org/grapher/population
 

 

<정착 생활의 덫에 사로잡힌 공동체>

{출처: The Neolithic Agricultural Revolution and the Origins of Private Property, 최정규 교수, 2019}

온난해진 기후와 깔때기 효과에 의해 생긴 인구압은 집단이 정착에 대한 장점을 더 많이 발견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세대에 걸쳐 정착을 하고 살림을 일구다 보니 더 이상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는 이동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이동이 줄어듦에 따라 이동의 제약이 되었던 늙고 병든 구성원들은 살아남아서 집단의 힘이(경험&노하우&육아보조)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정착은 집단 내의 출산율도 올려주었다. 수렵&채집 사회의 여성들은 자녀가 3~4세가 될 때까지 모유를 먹이기 때문에 생리 주기가 늦어져 가임률이 떨어지게 된다. (다만, 그만큼 생존율이 높았음) 정착 사회에서는 이동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아이들이 부모의 품에서 지내는 시간이 짧아지고 수유 기간도 1~2년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여성의 가임기 복귀가 빨라진다. 하지만 정착 초기의 출산율 증가가 인구증가를 바로 불러오진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8세기에 걸쳐서는 인구가 정체되거나 감소한다. 그렇다면, 정착 생활 자체가 '덫'으로 변한 특수한 계기는 무엇일까?

정착이 불러온 사유재산 개념의 확대

소유욕은 '자원의 탈취와 방어'라는 인간의 본성(유한한 자원을 지키고 외부의 위협에 증오심으로 반응하며 상호 배타적으로 점유되는 영역에서는 텃세 행동이 발달하는데 이 텃세 행동이 재산 소유 관습으로 이어짐)에서 기인한다. 본격적인 농경을 시작하기 전에 인간들은 정착생활을 통해 사유 재산 체제(영토, 주거지, 저장 가능한 식량, 보관해야 할 희소한 장신구)에 눈을 떴을 것이고 이를 지키는 데 있어 정착은 선택 항목이 아니라 필수 항목이 된다. 인간은 아직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바램의 크기보다, 이미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에 대한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 정착하면서 모은 개인의 사유 재산은 부유한 정주 수렵&채집민으로 하여금 쉽게 이주하지 못하게 막는 심리적 덫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덫도 양의 Feedback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어떤 Feedback이 농경으로 하여금 점점 수렵&채집을 넘어선 대안이 되게끔 만들었을까?

[토막 상식]
수렵&채집인의 사유재산: 수렵채집인의 생계는 유동적이고 일시적이며 분산된 자원에 의존했기에, 이에 대한 명확한 개인 소유물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욱이 수렵채집인의 부의 대부분은 지식, 기술, 네트워크 연결, 신체적 기량 등 다른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몰수하기 어려운 형태를 취했기에 얕은 수준의 사유 재산 개념은 있었을지 몰라도 체제로의 변환은 없었다고 보고 있다.

 

<정착이 만들어낸 사유재산과 농경>

{출처: The Neolithic Agricultural Revolution and the Origins of Private Property, 최정규 교수, 2019}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131p}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식물학과 동물학의 준 전문가였던 수렵&채집 집단은 영거 드라이아스 이후 따듯한 기후가 됨에 따라 주위에 동식물이 풍부한 곳으로 이주를 한다. 몬순기후에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유럽과 아시아로 뻗어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서남아시아는 우연히도 길들일만한 작물이 많아서, 수렵&채집의 생활을 유지함과 동시에 선조로부터 전해지던 지식을 활용해 일부 동식물을 길러보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식량이 풍족했으니 실패를 하여도 다시 시도할 수 있었고, 풍족한 환경에 만족하면서 정착을 하는 집단들이 늘어갔다. 이처럼, 역사학자들이 주장했던 기후 변화와 깔때기 효과에 의한 인구압은 정착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농경 출현의 직접적 동기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정착을 시도한 공동체에는(촌락, 마을) 영토, 채집한 식량, 귀금속, 장신구, 주거지와 같은 방어 가능한 부를 저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사유 재산에 대한 개념은 농업으로의 전환을 강요할 국가나 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최초의 농부가 되려는 사람에게 일종의 동기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온화한 날씨에 편승해 일부 동식물을 시험삼아 길러보던 사람이라고 하자. 옛 조상들의 지식을 활용해 이러한 시도들이 조금씩 성공을 거두었을 때, 수확한 작물의 생산성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나의 힘으로 나의 공간에서 직접 기른 수확물'이기에 이러한 것들은 나의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하기 쉬웠다. 그다음 해에는 일부 방식을 개선하고 아들딸의 노동력을 더 투입하여 수확량을 늘린다. 이러한 효용감은 (많은 실패가 있었겠지만) 기초적 농업에 필요한 작물 생장에 대한 이해를 부추겼고, 더 나아가 고정 투자를 수행할 동기를 부여했다. 이러한 성공은 주위 마을 사람에게 전파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농사에 뛰어들면서 개개인의 사유재산이 그 마을에서는 당연시된다.

널리 채택된 농업과 사유 재산제도는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불필요한 경쟁을 없애고 농업과 관련된 개인적 이익을 높일 수 있었다. (야생에서는 펼쳐진 자원을 누가 먼저 채취하느냐로 경쟁해야 하지만, 농업은 나의 힘으로 나의 공간에서 직접 기른 수확물을 다루기에 남이 기른 수확물과 경쟁할 필요가 없음 ->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잉여 생산물에 의한 권력 차이가 생기고 이것이 계급 생성의 원인이 되지만 농경 초기는 생산성이 그만큼 뒷받침되지 못함) 이렇게 농사가 의도치 않게 사유 재산의 소유와 분쟁 감소를 용이하게 하면서 이러한 메커니즘은 집단 내의 적용이 촉진된다.

이렇게 확산된 경제 모델(농업과 사유 재산, 정착 생활)이 생산하는 총 에너지양채집 인구가 생산하는 에너지양을 가뿐히 추월한다. 농경 생활에 의한 부작용으로 인해(질병, 영양 불균형, 한정된 자원에 따른 경쟁) 유아 사망률이 높긴 했지만, 이를 뛰어넘는 출생률 증가가 농경사회를 뒷받침해 주었다. 이러한 잠재력은 추후 더 빠른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위계적 정치 체제, 국가의 출현, 군사적 이점을 불러옴과 동시에 농업이라는 대안을 전 세계로 확산시킨다.

한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인간은 큰 그림을 그려 일부러 농업을 확산시키고 곡물 재배에 의존적인 삶은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저 배를 좀 채우고 약간의 안전과 소유물을 얻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일련의 사소한 결정이 거듭해서 쌓였을 뿐이다.

농경이 불러온 부수적 영향

{클라이브 폰팅,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 민음사, 2019, 130~134p}

수렵채집의 삶에서 정주 생활 방식을 택하고 우연히 농경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찾은 것은 인류 역사의 주목할 만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선택을 함으로써 얻는 것과 잃는 것이 공존하는 법이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영향도 감내해야 한다. 위에 언급했던 영양 불균형, 기근, 인구 증가, 위계적 힘 출현 이외에도 농경은 아래와 같은 점들을 야기했다.

<자연 훼손>

농지조성과 정주를 위한 목재 재료, 난방과 요리에 쓸 연료를 위해 농부들은 수풀의 나무를 베어냈다. 삼림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고, 나무가 자라나는 속도보다 베어내는 속도가 더 빠른 상태로 인류는 화석 연료를 이용하기 전까지 몇천 년 동안 삼림을 훼손했다. 지력이 약한 지역에서 이러한 행위가 지속되면 농경 촌락은 심각한 수준의 토양침식과 농경지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서남아시아에서 최초의 농경을 시작한 이들이 다시 유목민으로 돌아간 이유에는 기후 변화뿐만 아니라 환경 파괴에 의한 농업 불가능 환경 조성도 한몫한다.

<질병>

수렵채집인이라고 질병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동물을 직접 죽이게 되면 촌충과 위장 전염병의 영향하에 놓일 확률이 높았고, 말라리아에 걸릴 위험도 존재했다. 하지만 질병의 파괴력은 걸릴 위험뿐만 아니라 전파력도 같이 고려해야 한다. 수렵채집인은 기본적으로 소규모 집단에 이동 생활을 유지했기에 질병이 퍼져나가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하지만 정착 생활은 질병이 퍼져나가기 좋은 조건을 조성했다. 해충과 병원균 숙주(설치류 등)가 숨어살기 좋은 가옥, 저장된 식량, 음식물 쓰레기, 오염수, 물웅덩이, 동물과 사람의 변, 동물 원성 감염증(Zoonosis) 등이 이러한 조건에 부합했다.

[토막 상식]
소: 홍역, 천연두, 디프테리아, 결핵, 탄저, 브루셀라, 살모넬라
돼지: 살모넬라, 인플루엔자, 브루셀라, 탄저, 일본뇌염, 백일해
양: 탄저, 브루셀라
개: 광견병, 톡소프라스마증
닭: 인플루엔자
말: 감기, 탄저, 뇌염, 살모넬라
쥐: 페스트, 발진열, 살모넬라, 랩토스피라증, 양충병
고양이: 살모넬라, 톡소프라스마증
관개수로: 주혈흡충증

 

마무리

어릴 적 읽었던 대부분의 역사책은 기후변화와 인구압이 농경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표현한다. (지금도 대부분 그런 식으로 끝맺음하고 신석기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입장 바꿔서 생각했을 때 전혀 와닿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내 주변의 기후 변화가 무쌍하고 인구가 늘면 더욱더 보수적으로 내가 하던 방식(수렵&채집)만 고집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이해 속에 기후변화와 인구압은 절대 농경의 동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착이 사유재산을 일깨우고 그러한 사유재산에 대한 개념이 농경을 소극적으로 시도하던 수렵&채집인을 자극하여 증폭시켰다는 설명은 이러한 메커니즘이 농경이 생겨나게 된 동인이 아니었을까라는 하나의 완성된 가설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앞으로 많은 진화인류학자, 역사학자 분들이 추가적인 가설을 세우시겠지만 아직까지 나를 온전히 이해시킨 것은 이것뿐이라 나름의 정리를 해보았다.

다음 Part에서는 신석기 시대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대해 다뤄볼 예정이다.

 

<참조한 서적>

  •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헤르만 파르칭거, 글항아리, 2020.03.20.)
  • 빅 히스토리(데이비드 크리스천, 웅진지식하우스, 2022.12.23.)
  •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5.11.23.)
  • Energy and Civilization(Smil Vaclav, MIT Press, 2018.11.13.)
  • 신세계사1(쑨룽지, 흐름출판, 2020.01.20.)
  •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클라이브 폰팅, 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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