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2 - 말(馬)의 역사

세계사가 아니라 시야를 넓혀 인류사의 관점에서 보면 흐름이 전환된 시점이 여럿 눈에 띈다. 지금까지 정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의 공통점은 모두 인류가 쓸 수 있는 에너지의 효율 측면에서(인풋대비 아웃풋) 발전이 있었던 시기이다.

  • 첫 번째, 270만 년 전 섭생 방식에서 육류가 추가되면서 생긴 뇌 발달의 가속화와 뇌 용량의 증가
  • 두 번째, 140만 년 전 불의 사용으로 인해 소화기관의 간소화
  • 세 번째, 10만 년 전 논리, 추론, 계산 등이 가능한 언어적 사고의 출현
  • 네 번째, 1만 년 전 농경이 불러온 생산 방식의 근본적 변화
  • 다섯 번째, 기원전 3000년경 말의 가축화를 통한 생활반경의 확장과 시간의 단축
  • 여섯 번째, 기원후 인간이 사용 가능한 에너지양의 비약적인 발전 (석탄, 석유, 태양력, 핵력 등)

다섯 번째 항목으로 말을 꼽은 이유는 기원전 3000년을 전후로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운동에너지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운동에너지의 활용처는 다양했다. 물건을 더 많이 실을 수 있었고,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으며, 투창과 화살에 힘을 더 실을 수 있었고, 무사하게 적진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 목동은 말을 타면서 돌볼 수 있는 가축의 양이 2~3배 증가한다. 이렇게 운동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동물은 심지어 자가 번식도 가능했다. 말의 습성으로 인해 소와 양에 비해 추운 겨울에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이번 부록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말의 역사를 교양 삼아 알아두자는 차원에서 정리해 본다.

현재의 말은 최초의 말의 조상이라 부를 수 있는 생명체 이후 생긴 수많은 가지 중 하나이다. 그래서 현재의 말을 기준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하는 것은 말의 진화를 지나치게 직선적으로 보여지게 만든다. 미리 당부하자면 그 어떤 진화도 직선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수많은 변형이 있었을 것이지만, 화석으로 남지 않아 그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것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진화에는 방향도 속도도 무의미하다.

아래에 설명하는 말의 가계도는 그저 수많은 가지의 일부분이었음을 이해 바란다.

라스코 동굴 벽화 속 말 그림

 

말의 조상

{출처: https://www.talkorigins.org/faqs/horses/horse_evol.html#part2}

{출처: https://www.prehistoric-wildlife.com/species/p/pliohippus.html}

최초의 태반을 가진 포유류가 6,500만 년 전 지구상에 나오고 나서 말의 조상은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로서 약 5,500만 년 전에 나타났다. 이 시기는 신생대 제3기의 에오세 (Eocene) 시대이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로키산맥이 현재의 모습을 막 갖춘 시점이었으며, 대부분의 저지대의 기후는 아열대 기후였고 야자수가 우거져 있었다. 지금의 알래스카 지역은 목련과 무화과나무가 번성했고 숲이 땅의 대부분을 덮었다. 말, 코뿔소, 낙타 및 기타 포유류의 조상 형태가 이 시기의 화석 기록에 나타난다. 이 당시에는 매우 원시적인 영장류도 나타난다. 이 기간 동안 번성했던 동물들은 나무의 과일과 부드러운 잎사귀를 먹을 수 있어야 했다.

5,500만 년 전 지구

지질연대표

히라코테리움(Hyracotherium) - 5,500만 년 전

지금의 성채 카피바라 정도 크기였던 히라코테리움은 말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히라코테리움은 다른 말로 새벽의 말이라는 뜻에서 에오히푸스(Eohippus)라고 불리기도 한다. 생김새는 아치형 등, 짧은 목, 짧은 주둥이, 짧은 다리, 긴 꼬리를 가진 "강아지 같은" 모습을 보였다. 과일과 상당히 부드러운 잎을 먹었으며 아마도 덤불에서 덤불로 날렵하게 다니기 위한 몸채였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히라코테리움은 일반적으로 작은 숲에 서식하는 사슴과 유사한 생태적 지위를 갖고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히라코테리움(Hyracotherium)은 동시대 포유류에 비해 신체 크기에 비해 뇌가 비교적 컸고 그 당시에 꽤 지능적인 동물이었을 것이다. 특히, 잠재적인 포식자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도록 시각, 후각, 청각과 같은 감각이 발달하였을 것이고 가벼운 몸집으로 인해 위협 대상을 발견했을 시 빠른 속도와 민첩성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현대의 말이 발가락으로 치면 검지 만으로 걷는 것과 달리 히라코테리움의 다리에는 모든 발가락뼈가 존재했고 아직 융합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유연하고 회전도 가능했다. 발가락은 앞발에 4개, 뒷발에 3개를 갖고 있었다. 발바닥은 강아지처럼 패드가 있었다. (딱딱한 굽이 아님) 사실, 대부분의 에오세(2천만 년이라는 꽤 긴 기간) 동안 히라코테리움과 그 가까운 후손(오로히푸스, 에피히푸스)에서는 사소한 진화 변화만이 일어났다. 몸과 발가락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대부분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다만, 가장 큰 변화는 치아에 있었다. 히라코테리움은 과일보다는 많은 양의 질긴 식물을 먹기 시작하면서 이파리의 저작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치아를 갖게 되었고 총 44개의 이빨이 있었다. 어금니는 현대 말의 어금니 형태로의 진행의 시작을 보여준다.

에오세(Eocene)가 진행됨에 따라 당시의 풍경은 숲에서 더 빠른 달리기 형태로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탁 트인 평야로 바뀌기 시작했다.

히라코테리움 크기
 
히라코테리움

메소히푸스(Mesohippus) - 4,000만 년 전

올리고세(Oligocene)로 접어들면서 말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북미의 기후는 더욱 건조해졌고, 광대한 숲이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수풀들은 이러한 기후에 맞춰 변화해갔다. 이에 더해 메소히푸스 같은 동물들은 히에노돈(Hyaenodon, 재빠른 육식성 포유류)과 빠른 육식성 동물을 피하기 위해 더 빠르게 달리도록 진화 적응했다.

메소히푸스는 에오세 말 약 4.000만 년 전에 나타난다. 이 종은 히라코테리움보다 약간 더 커서 진돗개 정도의 크기였다. 등은 덜 아치형이었고, 다리는 조금 더 길었고, 목은 더 길어졌다. 두개골에 변화가 많이 찾아와 주둥이와 얼굴이 눈에 띄게 길어지고 두개골이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었다. 메소히푸스는 뒷발에 세 개의 발가락이 있었고 앞발의 네 번째 앞 발가락은 흔적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줄어든다. 또 다른 신체 변화로는 대뇌 반구는 눈에 띄게 커진다. 턱 끝 쪽의 작은 어금니 3개의 크기가 보통의 어금니 크기와 같아지며 덕분에 질긴 잎을 더 잘 씹을 수 있게 된다. 입 앞쪽의 앞니는 한 입 가득의 풀을 자르는데 수월할 수 있도록 발달하였고, 자른 풀을 갈아주는 어금니는 지속적으로 발달한다. (얼굴이 길어진 덕택에 어금니의 개수와 크기가 커질 수 있었음)

메소히푸스 복원 상상도

 

 
메소히푸스의 두개골(위), 말의 두개골 변화(아래)

 

메리키푸스(Merychippus) - 1,700만 년 전

메리키푸스는 달리기에 훨씬 더 잘 적응한 현대 말 형태의 가장 잘 알려진 발생 중 하나이다. 이전의 종들과 달리 메리치푸스의 발가락은 한 개만으로 온전히 체중을 지탱했다. 중심 발가락 양쪽에는 여전히 두 개의 발가락이 있었지만 이미 흔적기관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현대 말에서는 전혀 볼 수 없음) 다리 쪽은 더욱 잘 달릴 수 있도록 근육이 발달되었고, 아래쪽 다리의 관절에는 발달한 힘줄 덕택에 더 많은 힘을 낼 수 있었다. (팔뚝의 요골과 척골이 융합되어 다리의 회전은 불가능해짐) 크기가 커지면서 다리가 길어졌기에 얼굴이 풀 쪽에 닿기 위해서는 목이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둥이는 길어졌고, 턱은 더 깊어졌으며, 눈은 더 많은 어금니를 수용하기 위해 더 뒤로 이동한다. 치아에 시멘트 층이 발달하여 치아 크라운이 더욱 단단해진다. 뇌는 갈라진 신피질과 더 큰 소뇌로 인해 눈에 띄게 커졌으며, 이로 인해 메리키푸스는 이전 말보다 더 똑똑하고 민첩해졌다.

포식자에게 쫓기는 메리키푸스

 

플리오히푸스(Pliohippus) - 1,500만 년 전

약 1,500만 년 전 마이오세(Miocene) 중반에 플리오히푸스(Pliohippus)가 나타난다. 플리오히푸스의 중심 발가락 양옆의 발가락은 거의 없다고 무방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 플리오히푸스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제외하고 현대의 말인 에쿠스(Equus)와 매우 유사하며 에쿠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여겨진다. 첫째, 플리오히푸스의 두개골에는 깊은 안와가 있는 반면(이 구덩이의 기능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음), 에쿠스는 안와가 전혀 없다. 둘째, 플리오히푸스의 치아는 강하게 구부러진 반면 에쿠스의 치아는 매우 직선이다.

플리오히푸스

 

에쿠스(Equus) - 400만 년 전

약 400만 년 전 모든 현대 말의 조상인 에쿠스가 나타난다. 크기는 오늘날의 조랑말 크기였고, 단단한 척추, 긴 목, 긴 다리, 회전이 없는 융합된 다리뼈, 긴 코, 유연한 주둥이, 깊은 턱이 있었다. 에쿠스의 초기 형태는 지금의 말과 매우 유사하지만 얼룩말의 몸채에(상대적으로 땅딸막하고 곧은 어깨와 두꺼운 목) 당나귀와 비슷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또한, 아마도 뻣뻣하고 솟아난 갈기, 길고 거친 꼬리, 중간 크기의 귀, 줄무늬 다리, 그리고 적어도 등에 약간의 줄무늬가 있었을 것이다(이 모든 특징은 현대 말과 공유됨). 이들은 폭발적인 진화 속에서 12개의 새로운 종으로 빠르게 변화한다.

후기 플라이오세 시점인 258만 년 전에 시작된 제4기 빙하기(참조)때 특정 에쿠스 종은 구대륙으로 건너간다. 다른 에쿠스 종은 남하하여 남아메리카로 퍼졌다. (기존에 남&북아메리카에 서식하던 에쿠스종은 기원전 10,000~8,000년 전에 기후 변화와 인류의 남획으로 멸종한다.)

구대륙으로 건너간 일부는 아프리카에 진출하여 현대 얼룩말(Equus burchellii)로 다양화되었다. 다른 것들은 건조한 기후에 적응한 당나귀(Equus asinus)로서 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전역에 퍼졌다. 또 다른 일부는 에쿠스 카발루스(Equus caballus)와 에쿠스 프르제발스키(Equus przewalskii)로 나뉜다. 에쿠스 프르제발스키의 서식지는 현재 몽골과 중국의 초원지대에 국한된 반면, 에쿠스 카발루스는 아시아, 중동 및 유럽 전역에 퍼졌다. 여기서 나오는 에쿠스 카발루스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이라고 부르는 종이며 인간의 역사 주요한 전환점이 되는 동물이다.

에쿠스 프르제발스키( Equus przewalskii)
에쿠스(Equus)속의 가계도

 

현대 말의 역사

{출처: https://www.talkorigins.org/faqs/horses/horse_evol.html#part2}

{출처: https://www.prehistoric-wildlife.com/species/p/pliohippus.html}

{출처: 데이비드 W.앤서니, 말&바퀴&언어, 에코리브르, 2015, 295~296p}

기원전 17,000~15,000년 전에 그려는 라스코 동굴(Lascaux Caves) 벽화에도 나오듯이 유라시아에 살던 구석기인들 중 일부는 말이 사는 초원에서 삶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들에게 말은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한 용도였다. 말을 길들이게 된 경위는 아래와 같을 것이다.

말을 길들이기 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이미 소와 양을 길들이고 고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말을 길들이기 위한 수요가 적었다. 하지만,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사람들의 사정은 달랐다. 건조해진 환경에서 겨울이 오면 소와 양은 쌓인 눈 밑의 짧은 길이의 풀들을 찾지 못해서 굶어죽을 위험이 있다. 하지만 말들은 발굽으로 눈을 헤집고 풀을 먹을 수 있으며 물이 부족하면 얼음을 발굽으로 깨고 먹는 습성이 있기에 겨울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텝의 유목 민족들은(이미 소와 양을 기르던 사람들) 겨울에도 육식을 하기 위해서는 말을 기르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말은 소와 마찬가지로 우두머리 암컷만 통제하면 전체 무리를 통제할 수 있었고 (반면에 수컷은 다루기 힘들었고 그래서 소와 말의 수컷은 힘의 상징, 정력의 상징이 됨), 소 사육에 사용하던 기술을 말에 적용하였다.

위와 같은 말의 선택적 사육 과정은 수백 년을 거치게 된다. 현대의 가축화된 말의 고향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와 북쪽의 서부 유라시아 지역, 더 구체적으로는 볼가돈 하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2021년 10월 Nature 지 내용) 겨울 육식을 위해 길렀던 야생말은 가축화되어 운송 수단으로서 쓰이게 되는데 이 시기는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때 당시의 흑해 북쪽에 존재했던 문화는 얌나 문화(Yamna Culture, 기원전 3,300~2,600년)이다.

말은 기존에 운송용으로 쓰던 황소보다 2배 빠르고 힘은 3배 좋았던 말은 운송 분야에 혁명을 가져오며 인간이 증기기관을 발명하기 전까지 수천년 동안 주요한 운송수단으로 자리매김한다. (지금도 고원 지대는 말을 대체할 운송 수단이 없다) 또한, 말은 인간의 이동에 있어 새로운 차원을 열게 된다. 인간에게 생활권이란 무리 없이 이동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정해진다. 말은 그러한 생활권을(경제적 생활권 포함) 수단계 점프시켜 주었으며 연료도 자체 보충이 가능했다. (스텝 지대의 풀을 뜯어 먹으면 되므로) 말의 가축화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유라시아에는 유목 사회가 형성된다. 이들은 이동하면서 가축을 사육할 수 있었고 초원이 있는 이상 제약이 없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평지에 한해서)

하지만, 사육의 시작이 확산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가축화된 말의 확산 즉, 말과 관련된 운송 및 이동 기술의 폭발적인 증가는 기원전 2100~1800년 사이에 북유라시아 대초원에 존재했던 신타슈타 문화에서(Sintashta Culture) 기인한다. 신타슈타 문화 사람들은 아시아와 유럽 사이를 오가며 이동했고 말이 끄는 전차 기술을 널리 전파한다. 이때는 이미 중앙유라시아 기준 청동기 시대에 돌입한지 1000년 이상 지난 상태였다. 신타슈타 문화 사람들은 말을 이용하여 첨단 금속 가공 기술, 바큇살, 인도유럽어와 같은 문화적 액세서리가 사방으로 널리 퍼지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 결과 후세기에는 전차와 바큇살이 조금 더 보편화되었고, 기원전 2000년 후 서남아시아의 전쟁 판도를 바꾸게 된다.

<대표적인 마구의 기원>

  • 재갈: 최초 기원전 3700년 보타이 문화
  • 안장: 기원전 800~700년 아시리아 (말의 등에 가죽이나 천을 덮은 모습이 부조석에서 확인됨)
  • 등자: 기원전 500년 인도에서 나무로 된 발걸이를 사용, 본격적으로는 서기 300~400년 고구려식 등자가 스텝 지대를 타고 널리 퍼짐
  • 편자: 기원전 400년 아시아의 기병들이 말에게 식물로 짠 신발을 신겼고, 철로 된 신발은 서기 100~150년경 로마에서 "히포 샌들"이라는 이름으로 말발굽에 씌웠다. 'U'모양의 편자는 서기 600~700년경 북유럽에서 나타난다.
재갈
 
안장
등자
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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