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8 - 신석기 시대 (한국 & 일본)

전 인류의 직계 조상이라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순다랜드에 이르렀고, 호모 사피엔스 중 일부는 북쪽으로 향해 지금의 동 시베리아, 중국 북부, 만주 지역에 정착한다. 이곳에 살던 수렵 채집인들은 이후 다시 차가워진 기후로 인해 남쪽으로 그 방향을 틀고 그중 만주의 수렵 채집민 일부가 3만~2만 5000년 전 한반도와 일본 등지로 들어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후에 한반도와 일본이 될 자리 --> 이때 당시에 서해는 육지였고, 동해는 호수였으며 일본과 한반도 땅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 당시 한반도는 한랭 건조한 기후여서 몽골의 초원과 비슷했다.

(순다랜드: 빙하기 때 현재의 동남아시아 말레이 반도부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섬을 잇는 지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작은 대륙의 명칭이다)

홀로세가 시작한 1만 년 전부터는 생계활동이 수렵 채집에서 농경으로 전환되고 중국은 홀로세 초기에 조와 기장을 활용한 농경이 시작하지만, 한반도로 전파된 시기는 약 5000년 전이다. (볍씨의 DNA를 분석해 보면 중국 양쯔 중하류가 그 기원지임) 특징을 꼽자면, 한반도는 외적인 환경(특히 기후변화)에 의해 수많은 집단들이 점유했다가 쇠락하고 다른 집단들이 점유하기를 반복한다. 반면에 일본은 풍족한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한반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이번 파트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점유했던 집단에 대해 다뤄볼 예정이다.

순다랜드
반구대 암각화, 출처:  https://blog.naver.com/nuseah/220585941937
 

한국 초기 신석기 ~ 중기 신석기 - 기원전 8,000 ~ 2,2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674~676p}

{출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063}

한국의 경우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토기의 제작이 농경보다 빨랐다. 그 이유는 식물성&해양성 식량을 조리하는데 불에 잘 견디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고산리 유적지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 유적이 발견되었으며(고산리식 토기), 약 기원전 8000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식물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는 발견되지 않는다. (수렵&채집한 식량을 조리하는데 토기가 쓰임) 주거지를 장기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았고 계절적으로 옮겨가며 사용했다. 원형 구조의 땅을 파고 들어간 움집이었고 대부분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다. 토기는 점점 발전하여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로 불리는 토기들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게 된다.

고산리식 토기
 
빗살무늬 토기

장기적인 주거 유적지가 발견되지 못하는 이유 중 다른 하나는 바다의 해수면이 지속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식량을 구하기 쉬운 해안가에 거처를 마련했던 신석기인들의 주거지 유적지는 장기적인 해수면 상승에 의해 바다에 잠겨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해수면 상승의 기세는 기원전 6000년이 되면 잦아들게 된다. 그러기에 이 시기부터는 영구적 주거지들이 발견된다.

주거 형태는 대부분 수혈주거(수혈식: 땅을 파고 내려가 벽체 없이 지붕만 씌운 건축물)의 구조를 갖는다. 소수이지만, 오산리 유적의 경우와 같이 지상식 구조를 하는 것도 있다. 이 밖에 제천 점말, 영월 쌍굴, 단양 상시, 청도 오진리, 부산 율리 유적 등과 같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과 암음(바위그늘)을 주거 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암음 주거는 일반 취락 내 주거와 달리 수렵이나 어로 등 특정한 행위를 위해 일시적으로 거주한 장소로 추정되나 그 사례는 많지 않다.

출처:  https://m.blog.naver.com/naruluiha/220228679822

주거 내부에는 음식물 조리, 난방, 조명을 위한 화덕이 마련되어 있으며, 구조에 따라 돌을 돌린 위석식과 지면을 얇게 판 수혈식이 있다. 출입 시설은 보통 계단식 혹은 경사진 구조를 가지며, 일부 주거 형식에서는 길게 뻗어 돌출된 복도식의 출입구 시설도 확인된다. 이 밖에도 선반과 저장 시설 등이 내부에서 확인된다.

수혈주거지는 50~100㎝ 정도의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이엉이나 갈대 등으로 지붕을 이어 만든 형태인데, 평면 구조와 기둥 배치에 따라 원형, 방형, 장방형, 타원형으로 구분된다. 주거 구조와 규모는 용도나 혹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하며, 규모는 4~7m 정도가 일반적이다.

해안가 주변 주거지에는 조개를 먹고 남은 껍데기를 버려놓은 조개무지들이 발견되며, 주거지의 형태로는 원형 ~ 직사각형 구조에 기둥을 세운 움막 등이 발견된다. 1년 이상 머물렀던 주거에 대한 흔적이 발견되지만, 식량은 여전히 수렵&채집에 의존한다. 다만 사냥 기술은 점점 발달하여 뼈와 돌을 조합해 만든 낚시 & 사냥 도구들이 발견되며 이들이 사냥했던 동물들을 바위 표면에 새긴 반구대 암각화만 봐도 정말 다양한 해양&육지 동물들을 사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해안 패총에서 출토되는 각종 어패류와 상어, 방어, 다랑어, 물개, 강치, 돌고래, 고래 등의 외양성 어종과 해수류는 신석기인이 먼바다까지 진출하여 어로활동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육지 동물 수렵 대상은 패총에서 출토되는 동물 유전체를 통해 볼 때 호랑이, 표범, 곰, 사슴, 멧돼지, 고라니, 노루, 오소리, 너구리, 수달 등의 중소형 동물이었다. 특히 사슴과 멧돼지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보아 이들이 수렵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렵 방법 내지 도구는 다양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먼 거리에서도 사냥을 할 수 있는 활과 근거리용 창 등이 주로 이용되었다. 이 밖에 올가미나 함정, 덫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도 일부 발견되며 부장품으로는 토기, 구슬, 고기잡이 도구 등이 들어있었다.

기원전 3000년쯤 되어도 여전히 수렵&채집은 식량 조달의 주된 역할을 하지만, 이 시기부터는 식물 재배가 조금씩 발견된다. 때문에 잡곡인 조, 기장, 콩, 팥 등은 새로운 식단에 추가되었다. 조, 기장 등이 재배되면서 식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났지만, 해안 지역의 경우는 주 식료의 보조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후기 신석기 ~ 청동기 도입 전 - 기원전 2,200 ~ 1,5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676p}

{강인욱, 우리의 기원, 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북스, 2022, 24P, 174P}

후기 신석기쯤 되면 해안가보다는 내륙 쪽에 주거지가 더 많이 형성됨과 동시에 밀집되어 있다. 식량 조달에 있어 수렵&채집보다는 기장 재배와 벼농사가 주된 역할을 하며(종자를 개량하고 밭벼에서 논벼로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인구가 급증하는 시기는 기원전 1400년경 부터다), 옥으로 만든 유물의 발견으로 미루어 보아 점차 사회 계층화가 형성되었고 마을이나 집단을 이끄는 권력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기원전 2200~2000년 발견되는 유적지와 유물의 수가 현저히 떨어진다. 이는 중국 북부(황허)의 룽산 문화와 중국 남부(양쯔)의 량주 문화를 쇠퇴하게 만든 4.2ka 이벤트에 의해 한반도가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4.2ka 이벤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록 참조)

더 이상 농경을 유지하기 힘든 기존의 신석기인들은 기존의 주거지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지고 식량이 받쳐주지 못하니 인구도 점점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청동기 제작 기술을 갖고 있는 북방 민족들이 두 방향에서 내려오게 된다. 한쪽은 만주 쪽이고 다른 한쪽은 동쪽의 해안가를 따라서 내려온다. 두 집단 사이는 산맥이 가로막고 있기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내려왔다. 이들은 기존에 살고 있던 주민들과 섞이거나, 혹은 비어있는 땅에 자리 잡고 살면서 세력을 넓혀간다. (순수한 혈통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화 같은 이야기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단일 민족이 절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순수한 혈통이면 유전병 때문에 몇 세대를 버티지 못한다. 지금 서로 비슷한 모습의 우리들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살 수 있었던 것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친 정주민과 북쪽 & 남쪽 방향에서 온 이주민들이 혼합된 증거이자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옆 나라들도 마찬가지이기에 노파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나라에 대한 소속감은 단일 민족이라는 사실이 아니어도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더 나아가서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고 미래의 운명을 공유한다면 그 소속감은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해질 것이다.)

전 세계 최초의 청동기 제작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루어졌으며 기원전 4,000~3,000년 쯤에 구리와 주석을 혼합해 주조한 유물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청동기 제작 기술은 서남아시아에서 스텝 초원에 사는 유목 민족들에게 전해지고(안드로노보 문화 계통) 그들이 갖고 있던 기술이 여기저기 퍼지면서 동진하다가 기원전 2,000~1,500년 전쯤 지금의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내몽골)성에 당도하게 된다. 이 지역은 몽골 초원으로 이어지는 경계에 위치하였고 내몽골 동남부 지역은 청동 광석이 풍부하여 이 근방엔 샤자덴(夏家店, 하가점) 하층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오롯이 중국만의 혹은 한국만의 역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연관성으로 따지면 한국의 역사와 더 가깝다. 이쪽에 살던 유민들이 한반도로 많이 내려왔기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국 문명에 청동기 기술을 전파하였고 일부는 남아서 고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닦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국경선은 그어진지 고작 몇백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집단의 이동은 사는데 불편함만 없다면 제약이 된 적이 거의 없기에 생각의 범위를 국경선에 한정 지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은 그 기원이 어떻게 될까?

출처: Fineart
 
출처: 산림청

 

고조선의 기원 - 기원전 2,333년 ~

홍산 문화 ~ 하가점 하층문화와 고조선과의 관계

{출처: 매경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출처: 인사이트 코리아 - http://www.insigh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724}

{출처: 논문 - 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 시론}

{출처: 나무위키 - 홍산 문화}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국사관논총 제33집}

고조선은 스스로를 기록한 역사가 남아있지 않기에 아래의 글에 대해서는 '이러한 견해도 있다'쯤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을 뜻하며,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른다.)

현재 중국의 동북부 쪽 대릉하가 흐르는 지역에 중국의 황허 기반 문화들과는 다른 문화가 꽃피운다. 스텝 유목 민족들은 오래전 본인의 선조들로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선진 기술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동진하면서 유입된 후 더 이상 유목생활을 하지 않고 기존의 정주민들과 섞이면서(정복 혹은 융화) 그들이 갖고 있던 선진기술은 황허 & 양쯔 문화와는 다르게 펼쳐진다. 이 지역에 위치했던 문화는 아래와 같다.

<랴오닝(遼寧)성의 훙산(紅山, 홍산) 문화 - 기원전 4200~3000년>

홍산 문화의 주거지는 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에 기둥을 세운 형태였으며 경제 기반은 농업이었다고 추측된다. 하지만, 홍산문화의 유적에서 곡물이 나온 흔적은 아직까지 없다. 다만, 홍산문화층에서 나오는 돌보습, 돌팽이 등을 통하여 홍산문화의 농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돼지 사육에 대한 증거는 발견되었기에 이들은 수렵&채집과 가축 사육을 통해 식량을 조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사냥으로는 붉은 사슴, 멧돼지, 곰을 사냥했다. 양사오 문화와 시기가 겹치지만 발전 양상이 다르고 공통점이 거의 없다. 양사오와 다르게 홍산 문화의 주거지는 소규모에 수도 적었는데 수렵&채집 상활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랴오닝 성의 뉴허량(牛河梁, 우하량) 유적지에는 제의 장소가 발견되었는데 (돌로 만든 기단 위의 조성물) 일각에서는 지배층의 무덤이라는 의견도 있고 사당이라는 의견도 있다. 여신 묘, 눈에 옥이 박힌 안면상과 채색된 토기, 용과 나비 모양의 옥기가 특징이다. 제의 구역 주변에서는 무덤도 발견되며 부장품도 옥으로 된 조각품, 채색 토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보아 사회 계층의 구분을 확인할 수 있다.

랴오허의 상류 일대에서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적석총과 최고급의 옥기를 사용하며 번성했던 홍산문화는 기후 환경이 악화돼 식량 생산이 신통치 않게 되자 그들은 설치류(※쥐목 포유류의 총칭) 등을 잡아 식량으로 대체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인구밀도가 높은 마을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페스트(Plague)가 확산되는 바람에 기원전 3000년경이 되면 이들의 문화는 자취를 감춘다. (남아서 소하연(샤오허옌) 문화를 탄생시키기도 하고, 뿔뿔이 흩어져 서진 혹은 동진하기도 한다.) {출처: 강인욱 칼럼 https://firenzedt.com/10930/}

<랴오닝(遼寧)성, 네이멍구(內蒙古)성의 샤오허옌(小河沿, 소하연) 문화 - 기원전 3000~2000년>

소하연 문화는 후(後) 홍산문화로 분류되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잇는 동석병용기 시대의 유적으로 홍산 문화와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 하층문화 시대를 연결하는 문화이다. 이곳에서는 농경 시대의 주거지, 토기, 동물상, 청동기 유물 등이 발굴됐고 후대 동이족의 나라 상나라 갑골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원시 상형문자가 등장했다.

청동기 제작에는 많은 인력이 투입돼야 하기에 청동기의 발견만으로도 해당 사회에 지배 계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랴오닝(遼寧)성, 네이멍구(內蒙古)성의 샤자덴(夏家店, 하가점) 하층문화 - 기원전 2000~1500년>

하가점 하층문화는 홍산 문화-소하연 문화를 잇는 청동기시대 문화로 연산(燕山) 남북의 넓은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북쪽으로 시라무강, 동쪽으로는 의무려산 서부, 서쪽으로는 하북성 일부까지, 남쪽으로는 발해만까지 분포한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조양시에서 가장 많이 발굴됐는데 유적지가 1300여 곳이라 한다.

주로 기장을 심어서 먹었으며, 돼지와 양, 염소, 소를 길렀다. 사냥은 더 이상 큰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잉여 농작물은 주거지 내의 공공건물 내에서 보관된 후 분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장품을 보면 분명한 사회적 계급이 눈에 띈다.

이들은 홍산 문화처럼 종교적인 신전(神殿) 대신에 강을 따라 도시를 건설하였고 서로 교역을 했다. 사람들이 쌓은 성벽 안에는 도로가 잘 갖추어진 마을들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이들의 성터만 500개 이상 발견되었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4~5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특징으로는 이중벽을 쌓아 만든 방어시설과 돌로 만든 요새, 하수도가 발견된다는 점이 있다. {출처: 강인욱 칼럼 https://firenzedt.com/10930/}

하가점 하층문화 기원전 1500년경이 되면 빠르게 쇠락하여 유물의 수가 급감한다. 단기적인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방에 살던 유목민들이(카라수크 문화 계통) 이 지역에 내려와 연산 이북 지역에 하가점 상층문화를 새로이 형성되는데, 기원전 1500~700년경 문화 유적이다. 이들은 북방 기마유목민들의 청동기시대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가점 상층문화 유적지에서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됐으며 특히 빗살무늬 토기, 돌무덤, 비파형 동검, 복골 등이 발굴돼 한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과의 연결 관계가 주목되었다.

[토막 상식]
한반도의 전차: 하가점 상층문화는 중국의 상나라와 같은 기간을 공유했던 문화이며 이곳에서 전차의 존재가 확인된다. 다만, 한반도의 전차 사용은 기원전 300~200년쯤에 나타난다. 이렇게 사용이 늦어진 이유로는 이 시기의 한반도는 군대보다는 종교의 힘으로 대제사장이 다스리는 경우가 많았고, 산악지형의 특성상 전차 운용이 어려웠다.
출처: 강인욱, 유라시아 역사 기행, 민음사, 2015, 57p
 

이렇게 황허지역 문화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 홍산~하가점 하층 문화에 대해서 중국은 발 빠르게 아래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

<중국의 입장>

중국은 예로부터 사방의 오랑캐들을 사이(四夷)라 했는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했는데 그중에서도 지금의 난하의 동쪽(고대에는 이곳이 요하로 불림) 지방을 요동 그리고 이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랑캐의 땅이라고 부르던 그곳에 홍산 문화가 번성했고 (기원전 4200~3000년) 같은 시기의 황허 유역 양사오 문화는 제단, 여신 사당, 적석총군 등의 고국 단계를 입증할 만한 유적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중국인들의 중원 중심 중화사상이 깨지고 만다. (발달한 옥그릇, 옥 장신구도 동북쪽이 더 이른 시기에 존재 - 차하이&싱룽와 문화 때) 이에 방향을 돌려 동북을 중원 문명의 원생형 문화로 보는 작업을 시작한다. (동북공정)

그리하여, 중국은 역사에 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였고 그동안의 ‘황하 중심 문명론’에서 벗어나 ‘다중심 문화 발전론’을 전개하였다. 하여, 중국에서는 홍산문화가 황하문명에 앞서고 있으며 우하량 유적(홍산 문화)에는 기원전 3500년경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인정하고 중국 내 일어난 모든 문화가 중국 문화라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토막 상식]
중국은 원래 황제의 후예라고 해왔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염제를 포함한 염·황후예라 했다. 그런데 1983~1985년 우하량 유적 발굴 후에는 입장을 크게 바꾼다. 그동안 오랑캐인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치부해왔던 치우를 중국의 조상으로 영입했다. 그렇게 신화로 취급되던 삼황오제(기원전 4000~3500년경)와 황제 염제·치우제(오랑캐인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치부)의 삼시조가 역사에 편입되고 황제와 치우가 싸운 탁록대전도 기원전 2700년경의 역사적 사실로 만들었다. 또 지금의 중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인물인 단군 웅녀 주몽과 이들로부터 비롯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의 고대사는 당연히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이 중국의 주장 --> 1994~1998년 중에 ‘귀근원’이란 절을 세우고 ‘중화삼조당’이란 사당을 지어 중국인들의 조상은 황제 염제 치우를 모두 포함한 삼시조라 선언

<반론>

양사오 문화와 홍산 문화와의 공통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문화이다. 홍산 문화가 중원 문화와 다르다고 반드시 한반도와 관련된 문화일 것이라는 흑백논리는 아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중원에서는 볼 수 없지만 한반도에 널리 퍼져있는 것들과의 연관성으로 비추어 볼 때 홍산 문화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 판단할 근거로서 아래 글을 본다면 그 역할은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홍산 문화와의 연관성]

(1) 단군조선 건국 이야기와 연관된 유물 출토: 건국 기록과 매장된 유물의 유사성이 보임 (곰을 숭배)

(2) 옥 귀걸이의 분포: 옥 귀걸이는 싱룽와 문화에서 처음 등장하여 홍산 문화 시기에 황하문명의 양사오 문화와 교류하면서 남하한 것으로 본다. 요하 지역의 옥기의 약 60%가 한반도 근처인 랴오닝 수암 지역과 약 20%가량이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나는 바이칼옥이고 요하 지역의 옥결이 해안가, 즉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 동해안까지, 남으로는 장강 유역까지 전파되었다.

(3) 돌무지무덤 & 돌널무덤: 난하의 동쪽 지역인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는 돌무지무덤, 돌 상자 무덤 등 돌을 재료로 사용한 무덤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지만, 난하 서쪽 지역에는 이러한 유형의 무덤들이 거의 없으며 중국은 땅을 파서 묘 실을 만드는 토광묘가 주류이며 역사 시대 이후에야 목관묘가 널리 사용되었다 한다.

[하가점 하층문화와의 연관성]

(1) 성곽의 특징: 하가점 하층문화는 70여 개의 성을 짓고 고구려식의 ‘치’를 보유한 특이한 한민족 특유의 성 구조를 갖고 있다. 또 토성, 석성으로 구성된 3개의 수도도 보유하고 있고 청동기도 제법 잘 주조하고 청동 창도 출토되었다. 70여 개의 성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이렇듯 70개의 성을 관리하려면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중 사서에 등장하는 요서 지역의 유일한 국가는 고조선이다.

(2) 비파형 청동검: 비파형 청동검이 발해만 지역과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된다. 하가점 하층&상층문화인들이 만든 청동 검은 황하에서 발견되는 중국식 청동검과 제작 방법이 다른데, 이러한 청동검 제조법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이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출처:&nbsp; http://www.insigh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724

고조선은 어느 날 날을 잡아두고 건국한 것이 아니기에 그 기원을 논하는 게 상당히 조심스럽다. 하지만, 조선시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라 기원전 2333년 건국이 됐거나 혹은 그 근처 시기에 건국되었다는 견해가 단순히 신화적 발상이 아니라는 것을 위의 증거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논문 '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 시론'에서는 위와 같은 증거를 기반으로 고조선의 발전과정에 대한 대략적 순서를 아래와 같이 풀어놓았다. 아래의 연대 중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고조선'이 건국됐다고 말은 할 수 없지만(증빙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에) 건국의 시점은 빠르면 2기 초반 늦어도 3기가 끝나기 전이었을 것이다.

① 1기:홍산문화기 (기원전 4000년~2500년) - 신석기시대 중기~후기

② 2기:하가점 하층문화기 (기원전 2000년~1500년) - 청동기시대 

③ 3기:하가점 상층문화기 (기원전 1500년~철기시대 이전) - 청동기시대

④ 4기:초기 철기시대 (철기시대)

첫째, 고조선 초기는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며, 그 첫 단계인 단군조선은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회였다.

둘째, 고조선 초기는 청동기시대 초기에 해당하며, 그 첫 단계인 단군조선은 이미 국가를 형성한 사회였다(청동기시대의 상한 연대를 잡는 시각과 당시 국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논자마다 차이가 있음).

셋째, 고조선 초기는 기원전 1천년기 초의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며, 그 첫 단계부터 노예 소유자 사회의 국가였다.

아래는 논문에서 고조선의 형성에 대해 그대로 발췌한 부분이다.

종래 우리는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고조선의 개국 연대에 관해서 큰 의문을 품은 적이 많았고,

아직도 많은 학자들은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는 한술 더 떠 고조선의 성립배경이었던 것으로 추정한 1기를

신석기 시대 후반기의 홍산문화기로 올리고 있으니, 많은 학자들에게 더 큰 혼미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이루어진 고고학 상의 발굴 성과는 대체로 기원전 2500년 이후,

다시 말해서 하가점 하층문화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할 무렵에

‘나라’라는 새로운 정치형태가 확립되거나 강화될 수 있었던 사회기반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단군신화 내용에서 추방 사회 또는 공동체 사회 말기의 요소를

가려내는 작업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단군신화의 배경이 농경사회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보이는 고고학 상의 증거가

단군신화의 내용을 뒷받침해 준다고 판단되면, 여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홍산문화기는 농업경제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용’ 모양의 옥기는 물, 곧 비와 깊은 관계를 보여주며,

이런 유물이 나오는 것은 만물을 다스리는 하늘의 존재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이 깊은 관심이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족사회 단계의 토템이나 단순한 조상신을 섬기는 것만으로는 군장 사회가 통제될 수 없었고,

일정한 지역의 우두머리를 초자연의 하늘신과 결합시킨

세계관의 확립과 전파가 당시 사회에 필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하량, 동산취, 성자산, 호두구 등에서 보이는 나온 여신, 여신 묘, 제단, 돌무지무덤,

옥으로 된 껴묻거리 등의 유구와 유물은 당시 사회구성원이

상당히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가르쳐 준다.

군장 사회의 요소는 홍산문화에서 잘 관찰된다.

이와 같은 복합사회 안에서 당시의 여신은 농사를 주재하는 흙의 어머니[地母神]와

지배집단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모태로서의 어머니[祖上神] 같은 기능을 지녔다고 추론된다.

우하량 유적에서 나온 여신상은 땅에 존재하는 만물의 어머니였을 뿐만 아니라

땅과 하늘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하량에서 나온 여신도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웅녀와 같은 신화 상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산문화에서 나온 껴묻거리의 재질로 볼 때,

천부인은 옥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천부인의 존재는 당시 사회에서 지배집단의 세습 관계,

다시 말해서 하늘에서 다스림을 위임받았다는 점을 보장해 주는 징표였으리라고 추정된다.

단군신화 가운데 환웅이 이끌었던 3천의 무리[徒三千]는 이른바 신정의 규모를 보여주며,

이러한 규모는 군장 사회의 초기 단계에 어울리는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가늠된다.

신정에 대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우하량에서 나온 여신상과 여신 묘의 고고학상 증거라고 생각된다.

환웅을 보좌하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는

거주지를 달리하여 분포했던 단순한 부족장의 우두머리라기보다는

환웅을 직접 보좌하는 관계 또는 친족관계를 유지하며,

전체 사회구성원을 통제하는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신시를 중심으로 그들의 살 터가 마련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으나 당시 지배세력의 정확한 규모와 통제 범위가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문제는 발굴된 각 유적의 규모와 분포 관계를 비교 분석하는 연구 등을 통해서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환웅이 주재하는 穀(곡식), 命(생명), 刑(형벌), 善惡(윤리)는 당시의 사회규범이 잘 정비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는 서로 계승 관계에 놓여 있으며,

2기의 성립은 많은 성과 방어시설이 활발하게 축조되고,

청동 주조기술이 나타나기 시작한 하가점 하층문화기에 해당한다.

1기의 말기에 단군왕검이 등장하여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연 시기가 바로 2기 초에 해당한다.

종래 많은 학자들은 단군왕검의 등장과 함께 고조선 역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조선의 성립은 군장 사회라는 역사 경험을 발판으로 삼아 이룩되었다.

환인-환웅웅녀-단군왕검으로 연결되는 맥락은 어느 날 갑자기 단군조선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까닭에 여기서는 고조선 역사의 발전단계를

단군왕검이 등장하기 이전에 해당하는 군장 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았고,

이러한 견해는 이치에도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랴오허와 다링허(랴오닝성 서부의 하천) 유역에서 드러난 고고학 발굴 자료와 연구성과는

잊혀버린 고조선 역사의 흐름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었고,

이와 같은 성과는 고조선사 연구가 더욱더 발전하는데 새로운 발판이 되고 있다.

한창균, 1992,「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시론」

 

고조선 건국은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오려면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건국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2,333년은 한반도 기준으로 아직 후기 신석기 시대였기에 일개의 나라가 거대하게 들어섰다고 말하기 애매하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사회집단 형태는 아마도 씨족사회와 군장국가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했을 것이다. 때문에 일종의 신분의 세습화, 직업의 전문화, 전통적인 족장권(族長權)의 성립, 재분배 경제 등이 군장을 중심으로 점점 이루어지는 단계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군의 건국에 대한 이야기도 군장국가의 면모를 보여주기 충분하다. 씨족사회와 군장국가사이의 어딘가쯤에서 출발한 고조선은 그렇게 기원전 1500년경이 되면 청동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한국 청동기 시대 - 기원전 1,500 ~ 1,0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677p}

{강인욱, 우리의 기원, 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북스, 2022, 18P, 67P}

{출처: https://www.pet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42}

{논문: 한반도의 홀로세 기후변화와 선사시대 사회 변동, 박정재, 2021}

청동기 시대가 되면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한다. 이는 기장과 쌀이 대규모로 경작되고 기타 작물인 보리, 밀, 콩 등을 순조롭게 재배하면서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곡물 생산량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때는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표지 유물인 민무늬 토기가 출토된다.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고인돌이라 불리는 거석 묘비의 축조에 있다. 거석 묘비는 스텝 초원 유목민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초원의 특성상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기에 마을을 형성하기 어려웠던 이들은 돌아가신 조상의(권력자) 거석 묘비를 하나의 모임 장소로 생각하고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방 유목민의 문화를 간직했던 고조선인들은 그들이 정착한 한반도와 만주 땅에도 많은 고인돌들을 남긴다. 때문에 고조선의 문화권을 보통 고인돌이 퍼진 범위로 잡는다.

민무늬토기
 
강화도의 고인돌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계급 차이가 존재했음을 증빙하는 또 다른 유물은 비파형 동검이다. 청동기는 그 당시의 신소재였고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 유물을 만들게 할 권력이 근처에 있었음을 방증한다. 고조선 때의 귀족, 제사장, 전사 등의 지배계급은 청동으로 만든 유물을 소유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권력의 크기는 그가 소유한 물건을 만드는데 드는 피지배계급의 시간과 노력의 크기와 동일하기에 (청동을 만들기 위한 재료, 기술자 집단에게 지시할 수 있는 힘 등) 고인돌 & 청동검이 발견되는 장소를 고조선의 영역이라 말하는 것은, 기록된 역사가 없는 상태에서 유물만으로 유추해낸 최대한의 해석이다. (하지만, 고조선이 역사 기록으로 남는 것은 관중의 언행을 기록한 <관자>라는 책에서가 최초이며, 관중이 기원전 7세기 무렵의 사람이기에 고조선은 이 시기부터 실질적인 역사로 들어온다.)

 

고조선이 번성했던 시기는 북방의 기마 민족이 내려와 세운 요동의 하가점 상층문화가 번성했던 시기와 겹치기에 (기원전 1500~700년경) 고조선과 이들의 관계는 동일 집단 아니면 긴밀한 교류를 맺었던 집단으로 추정된다. (이들을 고조선의 일부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지만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하가점 상층문화를 이룩했던 집단은 기원전 700년 전경 2.8ka 이벤트로 인해 기존에 농경을 통해 생산했던 곡물량을 유지할 수 없었고 점차 국력이 쇠약해진다. 곡물 생산량의 감소는 지배계층으로 하여금 피지배계층에게 더 높은 세금&상납을 요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주변의 이질적인 집단과의 전쟁도 불사할 정도로 상황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이를 버티지 못해 기존에 살던 주거지를 버리는 유민들이 속출했을 텐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후가 유지되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한반도 남단에 기존에 거주하던 정주민과 융화되어 새로운 문화인 송국리 문화를 만들어낸다.

송국리 문화는 기원전 800~300년간 한반도 남부에(주로 충청, 전라, 경상 지역) 존재했던 문화로 (기원전 300년 이후에도 잔존하긴 하지만, 유적과 유물의 수가 급감) 원형 집터와 송국리형 토기를 지표로 하는 한국 청동기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문화이다. 송국리 문화인은 완연한 비파형동검에 묘제를 고인돌이 아닌 석관묘를(청동기시대 지하에 묘광을 파고 판돌이나 깬돌로 장방형의 돌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1매 이상의 뚜껑돌을 덮는 무덤 양식) 사용하고 있어, 이들은 한반도에 기존에 살고 있던 청동기인이 아니라 요동에서 새롭게 들어온 집단으로 간주된다.

특히 요동 남단의 요동반도 지역의 문화와 가장 흡사하여 이들이 요동반도에서 출발하여 지금 북한의 서쪽 지역을 거치지 않고 금강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여진다. (육로가 아닌 해로) 송국리 문화가 번성하는 시기에도 한반도의 중부 이북에는 송국리 문화가 전파되지 못하였고 이 지역에는 기존 청동기 집단이 살고 있었다.

저지대를 개간하여 논농사를 지었던 송국리 문화인들은 2.4ka 이벤트에 의한 대규모 가뭄으로 인해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는 점토대토기 문화인들에게 내어주고 만다. (점토대토기 문화인들도 요동지역에서 살던 고조선인들)

[토막 상식]
2.8ka 이벤트: 기원전 2850~2750년 태양활동의 감소로 인해 발생한 전 세계적 한랭기로써 전 세계 평균 기온이 2.5도 정도 내려갔다. 한랭 건조한 기후는 농경민들에게 혹독한 가뭄을 안겼고 작물 생산량을 급감하게 만들었다.
2.4ka 이벤트: 기원전 2400~2300년 태양활동의 감소로 인해 발생한 가뭄기

 

일본 조몬 문화 - 기원전 13,000 ~ 300년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글항아리, 2020, 679~685p}

{출처: https://jomon-japan.jp/kr/learn/jomon-culture#c03}

출처: Fineart

20,000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동해 바다는 호수였고 지금의 부산과 규슈 사이는 육로로 이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기원전 14,000~13,000년 급격한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한반도와 일본은 분리된다. 일본은 토기가 발견된 시점을 전후로 그전은 구석기 시대, 그 후는 조몬 문화라 부른다. 토기 위에 장식된 새끼줄 문양인 승문의 일본식 발음인 죠몽(じょうもん)에서 조몬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조몬 문화는 1만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여러 전통들이 지속성을 갖고 전해 내려온다. (거주지의 형태를 빼고는 연도별로 문화적 특징을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

토기에 처음부터 새끼줄 문양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래처럼 (좌에서 우측 방향으로) 문양이 발전해 나간다. 일본도 다른 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농경보다는 토기의 발명이 우선이었다. 음식을 조리하거나 요리할 때 불에 견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채집한 식물들은 보통 삶지 않으면 맛도 없고 소화도 잘 안되었기에 반드시 조리가 필요했다. 이런 토기의 발견을 통해 이들이 수렵&채집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일본은 세로로 긴 지형이기에 지역별로 그 식량 구성의 차이가 보이기도 한다. (홋카이도의 경우 생선과 조개 및 갑각류에 대부분의 식량을 의존했다.)

 
 
 
 
출처:&nbsp; https://jomon-japan.jp/kr/learn/jomon-culture#c03
 

계절별로 채집을 달리했으며 봄에는 식용 가능한 식물들, 여름에는 고기잡이(참치), 가을에는 고기잡이(연어)와 견과류, 겨울에는 사슴과 멧돼지 그리고 고래잡이를 했다고 한다. 해양성 식량에 대한 의존이 높았기에 유적지에서는 패총과 고기잡이 도구 등이 많이 발견된다. 조몬 문화는 다른 동아시아 문화와 다르게 농경이 발달하지 않았고 가축사육의 흔적도 없다. 식량 획득을 수렵&채집에만 의존한다. 때문에 채취한 식량들을 보관하기 위한 저장용 구조물들이(바닥을 높게 지은) 많이 발견된다. 일본은 사냥, 채집, 어획만으로도 그 당시 거주민들이 살아가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풍부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었고 덕분에 인구가 증가했음에도 생산경제가(농경) 필요하지는 않았다.

출처:&nbsp; https://jomon-japan.jp/kr/learn/jomon-culture#c03

조몬 문화 사람들은 이동 생활에서 정주 생활로 크게 변화하여 생활의 거점인 취락이 생긴다. 취락 안에는 원형 혹은 사각형의 수혈식 주거지(수혈식: 땅을 파고 내려가 벽체 없이 지붕만 씌운 건축물)와 무덤이 만들어지고, 지역을 대표하는 거점 취락도 나타난다. 굵은 기둥을 사용한 대형 건물과 축제 장소인 성토 등의 시설, 대규모 기념물인 환상열석(원형으로 배치한 돌 구조물)도 등장한다.

 
출처:&nbsp; https://jomon-japan.jp/kr/learn/jomon-culture#c03
조몬 문화 취락의 발전 양상, 출처:&nbsp; https://jomon-japan.jp/kr/learn/jomon-culture#c03

무덤들은 주거지 근처에 위치했으며 초기에는 직사각형 혹은 타원형 구덩이에 토기, 석기 조개, 상어 이빨, 장신구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고 중기에는 더 섬세해진 용기, 귀걸이, 옥 구슬 등이 같이 묻혔다. 몇몇 무덤은 더욱더 훌륭한 부장품이(칠기 그릇, 단검, 점토 조각상) 같이 묻혔으며 이는 후기로 갈수록 많아진다. 이는 사회적 계층이 있었고 일종의 신분 차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제의 시설도 발달하여, 돌로 만든 환상열석의 크기가 초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크기도 커지고 여려 겹이 된다. 제의 유적지에서는 신앙과 제사와 관련돼 보이지만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물이 다수 발견된다. 사람과 동물을 본 뜬 것, 돌을 도검처럼 막대 모양으로 가공한 것 등이 있는데, 풍요와 수렵의 안전, 공양 등의 의례 그리고 위신을 세우는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nbsp; https://jomon-japan.jp/kr/learn/jomon-culture#c03
 

조몬 문화의 마지막과 도래인

{출처: https://www.pet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42}

{논문: 한반도의 홀로세 기후변화와 선사시대 사회 변동, 박정재, 2021}

1만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본 열도는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기원전 800년경을 시작으로 외지의 기술을 가진 집단들이 대규모 일본 열도로 건너가게 된다. 이들을 도래인이라 부르는데, 그 첫 번째는 기원전 800년경 시작된(2.8ka 이벤트) 대규모 가뭄으로 인해 요동지역에 살던 유민들이며 이들 중 일부는 한반도 금강(송국리 문화)으로 향했고 일부는 뱃길을 따라 지금의 규슈 지역에 당도하게 된다. 2차로 건너간 시기는 기원전 400년경 2.4ka 이벤트로 인한 대규모 가뭄 때문이었으며 이때 한반도 남부에 퍼져있던 송국리 문화인들의 일부가 규슈 지역에 당도한다. (이후로도 한반도에 정치적 변동이 있을 때마다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 이들도 마찬가지로 도래인이라 불림)

(남아있던 송국리 문화인들은 농경을 지속할 수 없는 환경이 되자 다시 수렵&채집을 통해 식량을 확보한다.)

출처:&nbsp; 논문 - 한반도의 홀로세 기후변화와 선사시대 사회 변동, 박정재, 2021

이렇게 규슈에 당도한 도래인들은 섬의 북부지역에 살던 조몬 문화인(아이누 족)과 융화되어 청동기 문화와 농경 문화를 꽃피우며 조몬 문화와는 다른 야요이 문화를 만들어낸다. (지금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 구성을 보면 80%는 야요이 문화인, 20%는 조몬 문화인에서 기인한다.) 야요이 문화인들은 점점 일본 열도를 장악해 나가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농경민과 수렵&채집민의 생산력과 출산율 차이에 있다. 일본 열도는 한반도보다 벼농사하기에 더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 (일본은 2모작이 가능한 반면, 한반도는 쌀 재배의 북방한계지역이라 1모작이 최선) 또한 벼농사는 다른 곡물 농사와 다르게 곡식의 장기 보관이 더 용이하다는 점이 있다. 한 해 두 해는 별 차이 없을지 몰라도 수십 년 쌓인 생산력 차이는 압도적인 인구 차이로 귀결됐을 것이다. 더군다나 야요이 문화인은 청동 기술을 같이 갖고 있었다. 두 집단 간 전쟁이 있었을지, 서로 융화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야요이 문화인은 세력이 점점 커지고 조몬 문화인(아이누족)은 세력이 위축되게 된다. 하여, 지금의 조몬 문화인인 아이누족은 북쪽의 홋카이도와 규슈 섬 남쪽 끝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누족

 

마무리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더욱더 조심성을 요하게 된다. 아무래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뿐더러 정성을 들여도 잘해야 중박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사관을 갖고 있기에 나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의 의견도 존중한다. 부디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되는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의견 남겨주길 바란다. (참고하셨던 서적의 정보까지 같이 주시면 문헌 간 비교에 용이할 것 같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와 고조선이 저렇게 짧게 마무리될 수 있는 수준의 기간이 아니지만, 이번 파트는 문명 이전의 사회를 잠시 맛보는 것이기에 문명 이후 사회 파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고조선과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같이 다뤄야 하기에)

다음 파트에서는 인도의 신석기 시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참조한 서적>

  •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헤르만 파르칭거, 글항아리, 2020.03.20.)
  • 우리의 기원, 단일하든 다채로든(강인욱, 21세기북스, 2022.12.14.)
  • 기후의 힘(박정재, 바다출판사, 2021.11.05.)
  • 유라시아 역사 기행(강인욱, 민음사, 2015.07.24.)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행했던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gb145/223132757837